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양 결정의 원리 ⑤ (합의가 정말 가능할까?)

DoDuck 2006. 10. 25. 01:08
   희생양을 결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차이를 절대적인 진리로서 정립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견강부회하는 논리가 횡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의미 있는 차이를 찾아내라고 하지 않고 합의해내라고 충고하고 있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그런데 희생이나 양보라는 건 하고 싶지 않은 것임을 감안하면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합의보다는 치열한 대립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학생들의 극본쓰기에서 이미 이런 모습들이 나타난다. 극본의 대다수가 '배틀로얄'을 흉내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짐승들과 달리 양육강식의 생존경쟁을 비인간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특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고들 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 잔인한 속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문제를 '구경'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빠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인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동물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게도 호전적인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가 비교를 시킨다면 전쟁에 대한 욕망이 있다할지라도 평화가 더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맹자는 인간은 날 때부터 네 가지 마음의 싹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단다. 이른바 4단(四端)이란 것인데,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양지심(辭讓之心) - 예(禮)라는 덕의 싹'이었다. 양보란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사람이 처음부터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나는 맹자가 말한 사양지심이란 것을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예(禮)의 핵심은 '서(序)'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누군가의 양보와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대립과 갈등을 추구하지 않고 차례를 정해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양지심(辭讓之心)이며, 이 마음속에는 "내가 양보할 차례라면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자세가 숨어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의미 있는 차이'란 객관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오랜 경험속에서 통계적인 관찰을 통해 하나의 관습으로 정해져 있다. 사실 법이나 예절이나 도덕 등 모든 사회적 규범은 무엇을 의미 있는 차이로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당사자들 사이에 합의가 어려울 때 우리는 이 관습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절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 까닭은 그 가까운 사이가 누군가 양보해야 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관습규범인 예절규범에 따라 해결하는 모습이 가장 바람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