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양 결정의 원리 ④ (속이 다 들여다 보이더라도)

DoDuck 2006. 10. 17. 03:39

  희생이 본래 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의미 있는 차이'를 합의해 가는 토론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으로 정하려 노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바로 이점을 잘 잊는 것같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선 양보와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서로서로 양보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너 한 번 나 한 번 순서대로 돌아가며 양보하는 것일까, 둘 다 동시에 양보하여 함께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원하는 게 다르다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원하지만 한 사람만 만족시킬 수밖에 없다면?  "먼저번엔 네가 양보했으니 이번엔 내가 양보하마." 이렇게? 아니면 "차라리 우리 둘다 참자!" 이렇게?

  물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것이다. 그러나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도 있는 것. 동시에 둘 다 양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린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은 한 사람이 양보해야 하는 것인데, 양보할 사람은 누구?

  미리 합의된 원칙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합의된 원칙이 없는 경우엔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그러나 상대방도 역시 마찬가지고. 결국은 어렵게 양보해달라고 말을 꺼냈는데 거절을 당해서 상처를 받고, 양보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도 역시 상처를 받기 쉽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네 사랑은 겨우 요런 정도였구나! 이 정도도 양보해 주지 못하는 사랑이라니…." 

 

  여기까지는 앞서 [기준으로 삼아선 안되는 것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누가 더 사랑하는가’의 차이를 기준으로 희생양을 결정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한 이야기를 반복한 셈인데, 그만큼 강조하고 싶은 얘기는 제발 속이 다 들여다보이더라도 실망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푸쉬킨의 시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구절을 외우면서 마음을 닦아내기 바란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그러므로 희생양을 결정하기 위한 토론과정에선 제발 순수한 입장에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자! 이미 부딪혀버린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할테니, 이렇게 평화교육이 이루어지는 시간에 미리미리 희생양 결정원리에 대하여 생각해두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더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기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