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양 결정의 원리 ③ (기준으로 삼아선 안 되는 것들)

DoDuck 2006. 10. 13. 02:41
   수많은 차이들 가운데 어떤 차이를 기준으로 희생양을 결정해야 하는가? 의미 있는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가려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어떤 기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믿는 순간 독선(獨善)에 빠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나는 의미 있는 차이를 찾아내라고 하지 못하고 '합의'해내라고 강조한다.

  합의에 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강요된 기준은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자연세계에서의 희생양을 결정하는 원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학생들에게 처음 '극본쓰기'를 시켜보면 '배틀로얄(Battle Royal: 일본영화 중의 하나)'을 그려낸 극본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차이를 의미 있는 차이로 삼을 것인가?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힘들지만, 나는 적어도 희생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차이에 대해서 몇 가지 주의를 주고 싶다.

 

  첫째는 <"누가 더 착한가"의 차이>다. 착한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희생양을 결정한다면 착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나, 나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정의로운 심판관이라면 당연히 나쁜 사람을 희생시키고 착한 사람을 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정반대로 착한 사람이 희생하게 되어 있다. 나쁜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을 반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쁜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힘으로 강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반대로 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착함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자발적인 희생을 택하게 되어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착한 지를 묻지 말자고 권고한다. 싸우고 있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네가 더 착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양보해."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교육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방식인가 어른들을 향해 간절히 외치고 싶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 누가 더 착한가를 기준으로 희생양을 결정하지 않도록!!!

 

  둘째는 첫째의 이야기와 같은 성질의 것인데 <"누가 더 사랑하는가"의 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흔히 사랑의 크기를 가지고 다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서로 닭살 돋는 애정의 표현이라면 좋겠지만, 만일 그것이 희생양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누가 누구에게 희생해야 하는가? 당연히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사랑이 더 큰 사람이 희생하게 될 것 아닌가? 살아남은 자가 사랑이 부족해서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처럼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제발 사랑의 크기를 비교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특히 이런 상황에선 사랑의 크기가 줄어들기 쉬운 법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눈에 콩깍지가 덮여서 서로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가 이런 상황에 부딪쳐 희생양을 결정하는 기준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시커먼 속을 발견하게 된다. 희생이나 양보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므로 교묘한 언변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 자신에게 유리하게 억지로 이끌어가는 논리 전개)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망하지 마라! 상대방이 견강부회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고 절망하지 마라. 당신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습을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본래 그러한 모습의 인간들끼리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되는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라. 지금도 배틀로얄을 벌이지 않고 토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감사하라.

 

  셋째, 의미 있는 차이로 삼아서 곤란한 것은 <"문제의 본질과 벗어난 것들">이다. 그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어차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 어려우므로 이 역시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쉽게 말하면 엉뚱한 이유로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게 된다면 그것은 차별을 합리화하는 잘못이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둘씩 짝지어 무인도나 우주선 시리즈와 같은 상황에 지금의 짝과 같이 있다고 가정하고 둘 중에 누가 살고 누가 희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며 먼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최대한 많이 쓰게 하였다. 그리고 서로 토론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누가 살기로 했고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보고하게 하였다. 아이들의 대답 가운데 아주 특별한 대답이 있었다. 친구가 살고 자신은 죽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너무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물었다. 그럼 너희들의 '의미 있는 차이'는 "누가 더 말을 잘하는가?"의 차이라고 봐도 되겠니?

  아이의 대답.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뭐든지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을 둘러대는데 제가 못 당해요.

  차별은 비본질적인 차이를 기준으로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차별은 견강부회하는 논리에 의해 적당히 합리화된다. 앞서의 말 잘하는 친구의 답을 살펴보니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에 "내가 더 예쁘니까"라는 대답이 들어 있었다. 누가 더 예쁜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으며, 미적인 평가의 차이가 희생과 양보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뭔가, 물어보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선생님은 제가 이 애보다 예쁘다고 생각 안 하세요? 예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잖아요. 못생긴 사람보다 잘 생긴 사람이 살아남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잖아요.

  어떻게 대답해주는 게 좋을지. 예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한다는 말에 대해 시비를 걸어줄까 하다가 참았다. 외모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속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겠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