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강형구의 평화교실"을 시작하며

DoDuck 2006. 10. 13. 02:25
    학교에서 창의적 재량활동이라 하여 담당교사의 재량에 따라 일정한 교과서 없이 학생들에게 유익한 내용을 창의적으로 가르치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을 맡아 평화교육을 해보기로 하였다.

 

  오늘의 첫 이야기는 심리테스트를 빙자하여 다양한 생각들을 꺼내놓도록 하는 도입단계의 이야기이다.

  예전엔 <무인도시리즈>로 시작했는데 “무인도의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살아나올 수 있다면”하고 극본만들기를 시키는데 말들이 너무 많다.

  둘 다 살아나올 순 없느냐, 둘 중에 한 명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말들이 너무 많아서 생각끝에 <우주선 시리즈>로 바꾸게 되었다. 한 명만 살아돌아올 수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얘기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살아돌아간 사람이 다시 구조대를 보내어 결국은 모두 사는 상황으로 극본을 전개시키고 싶어한다. 아마 이것이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양보를(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것도 사소하지만 이런 상황을 만나 ‘선착순의 원리’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평화가 깨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싫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야 한다.

 

  극본 만들기를 한 후엔 두 사람씩 짝지어 둘이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고 둘 중에 누가 살아올 것인지를 결정하게 해본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최대한 많이 적어보게 하고 서로 바꿔 읽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 따져보고, 공감이 가는 이유들을 중심으로,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정했다” 최후로 보고서를 쓰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희생양을 결정하는 기준을 어떻게 세웠는지 검토하게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희생하겠다며 토론을 짧게 끝내버리고 만다. 그래서 던지는 질문이 “양보나 희생은 하고 싶은 것인가? 하기 싫은 것인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양보할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양보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양보나 희생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누군가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누군가 양보를(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찌하면 좋을까?)”에 대해 생각해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