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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묵상]141108「기독교인의 행복(intro) 」

DoDuck 2014. 11. 8. 13:21

[날마다 묵상]141108「기독교인의 행복(intro) 」


(마4:25-5:2)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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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전하시던 상황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살기 성서학당 가을학기 강좌에서 이 부분에 주목하는 물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어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인가?

소수 정예를 위한 가르침인가, 초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가르침인가?


예수님이 팔복에 대해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 사역의 초기였습니다.

그것도 제자로 선택된 이들의 훈련과정 중에 행한 심화학습이 아니라, 단지 병 고침을 기대하며 모여들었던 사람들, 소문을 듣고 몰려든 초신자들을 향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해 모여든 무리들을 향해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는 긴 강연을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오늘 바쁘신 와중에도 이 자리에 나아와 나의 강의를 듣는 여러분들은 탁월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에게 이러저러한 좋은 것들을 여러분께 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강의를 시작하는 강사들처럼, 

예수님은 몰려든 무리에게 오늘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당신 앞으로 모여든 무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임을 확인하게 하시고,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축복의 말씀을 통해 “너희들은 진정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느냐?”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와 높은 사회적 지위’에서 행복을 찾고 있을 때, 

그들이 “너희는 결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야!”라고 말할 때,


너희는

‘가난하고, 애통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박해를 받으면서도’,

온유한 표정으로 청결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정의를 세우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말할 수 있는가?

 —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당신과 함께 동행하려 모여든 제자들에게 먼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심화학습 주제가 아니라 초신자용 학습 주제로 삼았을까요?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결국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시는 예수님께선 처음부터 그 방향을 수정해주고 싶으신 게 아니었을까요?

방향을 수정하지 않은 채 여전히 제 갈 길 가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상표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좁은 길’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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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결국 행복해지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 아니냐, 당장 행복을 누리자"는 거짓 목자들의 이단사설에 넘어가지 말자고, “제발! 행복이라는 단어를 목적, 목표의 위치에 두지 말기를! 행복이란 늘 어떤 결과로 느껴지기만 하는 것이지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쳤는데(141101 예나 이제나?)‘행복’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둔 우상숭배자(141023 무신론)를 경계하고자 애썼는데,

예수님은 오늘 진정한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은 이 차이를 강조하며, 제게 도전해옵니다.

난 제발 그 사람들이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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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살기 성서학당을 통해 박득훈 새맘교회 목사님의 [하나님나라의 행복한 사람들]이란 제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첫 시작인 '팔복'에 대해 새롭게 깨달으며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 막 행복해지기 시작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오늘 묵상은 어제 강의 서론을 제 방식으로 변주한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