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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묵상]141107「평가 」

DoDuck 2014. 11. 7. 08:59

[날마다 묵상]141107「평가 」


(마25:30-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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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평가'에 대한 노이로제를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를 부당하다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객관적(혹은 절대적) 평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등급을 매기려는 시도 자체에 격렬히 저항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모습이 평가의 부정적인 기능인 '낙인효과' 때문에 생긴 것으로 이해합니다.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는 '얼마나 사람다운 사람인가' 등급이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오해도 인격을 평가하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화시킵니다.

평등이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라는 의미인데, 사람들이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은 어쩌면 바로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믿습니다. 아멘!" 한 마디로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에 사람들은 하나님도 오늘 말씀처럼 냉정하게 평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너무 먼 훗날의 얘기라서 거기까지 미처 신경쓰지 않고 있나요?

죽음 뒤에 닥칠 일이라고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그렇게 부당하거나 불가능한 일인가요?

오늘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심판이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나그네 되었거나 헐벗었거나 병들었거나 감옥에 갇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이렇게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평가기준까지 이렇게 분명히 제시되어 있는데, 평가가 부당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까지는 믿겠지만, 난 하나님을 모른다." 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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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도 꿈을 꿉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역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인격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하는 꿈을 꿉니다.

군자(君子), 한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신 분.

그런 분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했는데, 우리는 그동안 욕심이 눈을 가려서 '개같은 놈'들을 대통령으로 뽑아오진 않았을까, 반성하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착한 이웃'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될 때, 그 사회는 전쟁과 범죄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수백조에 이르는 부채를 국민들에게 짊어지게 만든 사기꾼에 날강도 같은 이를 대통령으로 뽑아놓고도 아직도 자기 손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