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5 진정한 용서

똥 묻은 개는 겨 묻은 개를 나무랄 권리가 없는가?

DoDuck 2008. 1. 14. 04:19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빛이 나는 이유는 “네가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보라”는 충고이기 때문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원리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뼈대인데 바로 이 속담에는 이 평등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많이 한다. 첫 번째 착각은 “똥 묻은 개는 겨 묻은 개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착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똥 묻은 개는 다른 개에게 묻은 모든 것을 똥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라는 생각이다. 이 두 번째 착각은 곧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식의 궤변과도 통하는 생각이다.

 

  돼지 눈에 돼지만 보인다는 것 자체가 사실과 전혀 다른 얘기란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했다는 이 이야기는 무학대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못된 어법으로 전달한 농담에 불과하다. 진리가 아닌 농담이다. 무학대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교훈일 것이다.
  똥 묻은 개는 다른 개에게 묻은 것이 무엇인지 판별할 능력이 없는가? 다른 개에게 묻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다른 사람도 부끄럽게 만들어 해결하고 싶은 충동이 똥이라고 우기게 한다면 몰라도 판별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닐 것이다.
  많이 양보해서 이 속담이 똥과 비슷한 색깔의 겨를 이용해 “충동이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이 속담이 똥 묻은 개는 똥과 겨를 구분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똥 묻은 개에게 “네 부끄러움이 사리분별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는 충고에 불과한 것이다.
  개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도 거룩한 분을 알아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성인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것 아닌가?

 

  이제 첫 번째 착각 “똥 묻은 개는 겨 묻은 개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실은 이것은 착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착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다. “나무라다”는 말의 뜻은 첫째, “잘못을 꾸짖어 알아듣도록 말하다”라는 뜻이 있다.(naver 국어사전) 이것은 심판자, 교육자의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이 심판을 하거나 가르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바로 이점에서 “똥 묻은 개는 겨 묻은 개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생각을 착각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나는 똥 묻은 개도  용서하는 사람(심판하는 자나 교육자가 아니라)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무라다”의 두 번째 뜻은 “흠을 지적하여 말하다”라는 것이다.(naver 국어사전) 가르치려 드는 게 아니라 어떤 흠이 있다고 지적하여 말하는 정도는 흠을 발견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죄를 알게 되면 우리는 곧장 “그를 용서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용서는 누가 해야 하는가? 죄인의 잘못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용서할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착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용서할 권리와 의무는 심판자(교육자)의 것인가, 그의 잘못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것인가를 착각하는 것이다.
  심판자(교육자)로서의 자격 조건에는 똥이 묻었느냐 아니 겨 같은 것이라도 묻었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사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는 이’는 그 사람의 죄를 아느냐 모르느냐만이 중요한 것이다. 마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잘못을 아는 사람들만이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죄책감 가운데 죄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생각해보면 이 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겨 묻은 개는 똥 묻은 개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은가?
  사실 생각해보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은 ‘똥 묻은 개들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무라는 개들에게 하는 얘기’다. “나무라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심판자, 교육자)으로서 너는 부끄럽지 않으냐?”는 질문이다. 똥이 묻었든 겨가 묻었든 떨어내야 할 더러운 것이라는 점은 같은 것이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다. 겨는 덜 부끄러워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겨 정도는 사소한 거니까 안 부끄러워해도 된다고? 착각하지 마라. 모든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오히려 학생의 실수와 교사의 실수 중에 누가 더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라. 늘 잘못하고 살아가는 ‘개만도 못한 놈’이 일상처럼 잘못하는 경우와 늘 거룩한 척하던 분들이 어쩌다 사소한 잘못이나마 들켰을 때를 비교해보라. 누가 누구에게 부끄러운가? 왜 부끄러운가? 그 부끄러움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은 평등의 정신이 깃든 속담이다. 그러니 이 속담을 가지고 ‘똥 묻은 개들’을 차별하려들지 마라. 평등이란 무엇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격을 똑같이 평가하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 평등이다.
  똥 묻은 개에게서 나무랄 권리를 빼앗지 마라. 똥 묻은 개에게서 누군가의 더러움을 지적할 권리를 빼앗으면, 똥 묻은 개는 자신에게 묻은 똥의 더러움조차도 깨달을 수 없게 되기 마련이다.
  다만 조심하라! 나무라는 개들이여, 겨라도 묻지 않기 위해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