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5 진정한 용서

너에겐 다른 선택이 없다고? (용서는 누구에게? ⑥)

DoDuck 2008. 1. 11. 10:41

  “너도 내 입장 돼 봐. 내겐 다른 선택이 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앞서 말한 다른 경우에 비해 그다지 건방져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행동이 잘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얘기가 단순히 과거에 대한 변명이라도 여전히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지만, 한술 더 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런 선택을 할 거라는 것을 드러내는 주장이라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살아가는 일이 모두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물론 원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잘하고 싶지만 몰라서 잘못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그런 경우다. 그렇지만 잘못이라는 걸 알고 나면 사람은 반성을 하고 잘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간다. 무엇이 최선인가를 찾아낸다. 아무도 희생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희생을 선택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희생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용서를 빌어야 할 죄의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한다는 것, 이미 자신의 무지로 인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고쳐나갈 수 있는 길을 찾고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라, 다시 또 그런 잘못을 또 저지르겠다는 것,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사람들이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는 단 하나 나쁜 습관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알면서 왜 실천을 못해?]라는 제목으로 길게 다룬 바가 있다. 나의 이성적인 의지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몸에 밴 (중독된) 나쁜 습관 때문에 무심코 그 나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습관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잘못이라면 그는 나쁜 습관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 것인지 상담과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독자들의 치료과정처럼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겠지만 그 치료과정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도 내 입장 돼 봐. 내겐 다른 선택이 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은 무의식적인 습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또 하나 우리가 살펴봐야 할 문제다. 왜 나쁜 줄 알면서 그 길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이해해 주는 것에는 생존욕구와 같은 기본적 욕구가 있다. 사흘 굶어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는 속담이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살인일지라도 정당방위라고 인정될 경우 무죄로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다른 선택이 없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비비고 싶은 언덕도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단호하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기본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냐고. 사흘 굶어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는 속담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는가? 지율 스님 같은 이는 무려 100일을 단식하기도 하였다.

  나는 수업시간 중에 화장실 다녀오게 해달라는 학생들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안 돼! 찔끔찔끔 말려!” 앞서 <“누구나 저지르는 잘못은 잘못이 아니다?”>에서 말했듯이 욕망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다. 욕망의 조절능력에 따라 사람의 인격이 다르게 평가된다. 배설충동을 느낀다고 해서 그때마다 배설하고야 마는 것은 유아기의 일이다. 똥오줌을 가릴만한 나이가 지나면 사람들은 최대한 참고 화장실을 찾기 마련이며, 찾을 수 없으면 으슥한 곳이라도 찾는 것이다. 수업시간과 같은 예정된 시간에 더구나 중학생이나 되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아직도 유아적임을 드러내는 짓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이처럼 단호하게 말하는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이 잠기는 편이 낫다.사람을 죄짓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유혹이 없을 수는 없으나, 유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이 불구가 되어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서 던져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마 18:5~9)
  나는 가출을 반복하고 탈선행위를 밥 먹듯 하는 학생의 집에 가정방문을 하여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 봐도 말릴 수 없는 아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 이 아이의 다리를 부러뜨립시다. 골절로 몇 달간 입원할 수밖에 없도록 해봅시다. 부모의 마음으로 차마 못하겠거든 교사인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만 써주십시오.” 물론 어느 학부형도 이런 제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우리가 분노하거나 좌절하기 쉬운 상황이 있다. 정말 참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 그리하여 자포자기하고 충동에 몸을 맡기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라. 또 그 선택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예이지만 영화속에서 사례를 찾아 들려주고 싶다. 미국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원제: Pay It Forward)]에서 주인공 시모넷 선생님은 알콜중독자 부모 밑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하며 성장하였다.(얼굴에 화상을 입은 안면장애를 가지고 있음) 이러한 환경이라면 대부분 어떤 모습의 인간으로 성장하기 쉬울까? 트레버라는 주인공 학생도 비슷한 형편에 있었다. 그러나 트레버가 맑은 영혼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잠시 가출했다가 시모넷에 의해 돌아오는 과정조차도 나무라고 싶지 않다. 마지막에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죽었으나 트레버의 인격은 이미 시모넷선생님보다도 높은 인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다.
  “나에겐 다른 선택이 없다”고 말하는 친구들은 모든 악의 씨앗인 무지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한 친구들이다. 저급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친구들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 법을 배우는 게 필요하다. 극기훈련이 필요하다. 삶의 목표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여전히 다른 선택이 없다면 죄의 대가도 감수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의지마저 갖춘 상태라면 선의지가 상실된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