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5 진정한 용서

용서는 누가 해주는 것인가?

DoDuck 2008. 1. 14. 04:12
  용서는 누가 해주는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까닭은 죄인의 입장에선 용서를 빌더라도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제대로 빌 수 있기 때문이며,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용서해 주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에 대해 각각 먼저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게 했을 때, ‘누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피해자’였다. 그 다음에는 교사, 부모, 경찰, 판사, 검사 …. 이들은 교육이나 심판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쯤에서 멈추지 않고 더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면 다시 하나님, 자기 자신 등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대답이 나오기도 하고,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받으므로 반대로 용서해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다소 엉뚱한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이 대답을 엉뚱하다고 판단하는 것에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앞서 인용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죄 없는 자만이 용서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 가운데도 진정한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적지 않다.
  과연 그런가? 우리가 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닌 것인가? [용서는 누가?]라는 주제에서 첫 번째로 다루고 싶은 질문이 이것이다. 똥 묻은 개는 겨 묻은 개를 나무랄 권리가 없는 것인가?
  어쨌든 나는 여전히 이런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다시 ‘자기 자신, 피해자, 교사,…, 하나님’ 등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여간해서 학생들의 입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미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죄인의 잘못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피해자는 죄인의 잘못을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교육자나 심판자의 입장에서 ‘용서 운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야말로 감추어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용서를 비는 입장에 있는 죄인을 가정해 본다면 죄인 스스로도 자기 잘못을 아는 인간이다.
  죄책감의 정체는 벌에 대한 두려움, 죄인으로서의 부끄러움, 자신이 입힌 피해에 대한 원상복구의 책임감 등이다. 이 가운데 용서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주로 주목하는 것은 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대체로 용서에 관한 잘못된 태도들은 대부분 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과 벌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만 고민하는 심판자의 태도와 관계가 깊다.
  이 가운데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부끄러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까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이 한숨을 쉰다. 오로지 벌에 대한 두려움만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철부지 인생들이 너무 많다.
  나는 용서는 누가 해주어야 하는가를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진정한 용서란 무엇을 어떻게 해주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얘기하고 싶다. 죄값을 치르고도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들(전과자)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얘기하고 싶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들과 영화 [밀양(密陽)]이 안타깝게 그려낸 문제가 무엇인지 함께 검토하면서 진정한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