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⑥ (사랑을 가르치라)

DoDuck 2007. 11. 25. 21:04
 

  희생자에게 주는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라”는 충고에 대해서 좀 더 덧붙이고 싶다. “제발”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라!

  이렇게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양보와 희생을 결심하는 사람들이‘나의 희생을 내가 좋아서 하는 짓이라고 오해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제발,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라!” 이렇게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양보와 희생을 결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를‘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그에게 사랑을 ‘받는다’뜻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은 그래서 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보다 그 사랑에 둔감하기 쉽다. 의미 있는 차이를 찾아 희생양이 결정되든, 운명의 장난으로 희생양이 결정되든, 수혜자는 그 희생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 때문에, 그의 운명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희생과 양보를 하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인가?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희생하고 싶지 않은데, 모두가 양보하고 싶지 않은데, 왜 짐승들처럼 다투지 않고, 의미 있는 차이를 찾아서, 또는 운명의 장난에 맡겨 희생과 양보를 결정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내면속에 평화에 대한 갈망, ‘너와 나, 곧 우리’를 향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과 양보를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마음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지금까지 미련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대가를 바라지 말고,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이 네 가지를 말해 왔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양보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먹으면 살찔까봐’라고 핑계를 댄다면, 상대방은 살쪄도 괜찮다는 것인가? 나에게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에 양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대방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폐기물 재활용이나 아나바다 운동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말하자면 진정한 희생과 양보는 아니란 것을 확인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문제제기인 셈이다.)

  사랑에 둔감한 이들을 위해 당신의 안에 있는 근본적인 사랑을 드러내라! 그들에게 희생과 양보의 진정한 동기가 ‘의미 있는 차이’나 ‘운명의 장난’을 넘어서서 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에 있었음을 알게 하라! 그리하여 살아남은 그들이 또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을 때, 그들이 난감해하지 않고 당신이 보여준 그 길을 따라가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