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④ (희생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이 아니다)

DoDuck 2007. 11. 20. 16:40

  사실 양보나 희생은 자발적으로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해야 한다는 것은 자주 듣는 이야기다. 그만큼 미련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선인들이 이에 대해 가르쳐 온 것이다. 그러나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라”는 가르침은 우리들 귀에 매우 생소한 이야기다. 예수님의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라는 말씀은 ‘오직 나와 하나님만 알 수 있게’라는 뜻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희생이기 때문에 생기기 쉬운 오해’를 경험하면서 깨달았다. “양보든 희생이든 대가를 바라지는 않되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라!”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하는 희생에 대해서 마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것은 자살이었을까, 타살이었을까? 소크라테스가 도망가라는 제자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살이었나, 타살이었나?

  분명히 잘못된 재판을 통해 사형당한 그분들에게, 단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는, 아니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면서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택한 죽음이요, 그러니 자살이라는 논리는 정당한 것인가?

  옛날 ‘전교조’활동을 이유로 해직되었을 당시, 교문 앞에서 복직투쟁을 하는 우리들에게 ‘지가 좋아서 학교를 그만두고는 뭐하는 짓이냐’고 비웃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기 위해 떠나는 쥐가 스스로 죽거나 다치기를 원해서 고양이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냐”고 되물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것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자기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며, 그 희생의 의미를 애써 외면하였다.

  지난해(2006년 11월)에 YTN에서 방영한 [전태일 - 사랑을 시작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소선 여사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왜 태일이가 분신자살했다고들 하느냐? 태일이는 분신으로 항의한 것이지 자살한 게 아니다.”

  그렇다. 심지어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단지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의 죽음마저도 그게 자살이 아니다. 그의 죽음을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귀를 막고 있었던 메마른 이 사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에 의해 강요된 죽음’이라고 주장하면 지나친 비약이요 억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평가해선 안 될 일이다. 그는 한 사람이 목숨을 바쳐야만, 그렇게 목숨을 던져 외쳐야만, 이 사회가 응답하리라는 생각으로 희생을 결심한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