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③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지 말 것)

DoDuck 2007. 11. 20. 16:15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희생을 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은 그 대가를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쉽다. 그러니까 타협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타협이란 “내가 양보할 테니 너는 그 대신 무엇을 양보할 것이냐”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대가를 주고받는 것은 양보나 희생이 아니라 거래라는 것이 분명하다. 희생을 하면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희생자의 입장에선 턱없이 싸게 파는 셈이라서 팔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싸게라도 파는 모습에 불과하다.

 

  우리의 미련은 너무나 깊은 것이라서 대가라도 챙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늘 생기기 마련이라서 수많은 성인들이 바로 이것을 경계하였다. 도덕교과서에서도 진정한 선행은 칭찬이나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고,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가르치고 있다. ( 나는 이 말씀의 참뜻을 헤아릴 때 “모르게 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가, 그에 대한 상(賞)을 상대방에게 구하지 않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어느 정도까지 대가를 바래서는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버려야 한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은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는 요구다. 심리테스트 무인도시리즈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너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고자 하는데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니?”라고 물을 수조차 없다면 희생자의 마음은 얼마나 고독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독을 참고 견뎌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모든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은 바로 이 고독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을 뻔히 알면서 그 길을 결심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으며, 불쌍한 여공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이 그렇게 고독한 길을 걸었다. 자신의 수제자조차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을 알고 있었던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으로 고독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었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 것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작게 느껴진다고 해서 희생의 결심이 흔들릴 것이라면, 아예 묻지를 마라.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사랑의 크기를 기준으로 희생양을 결정해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희생자의 사랑이 수혜자의 사랑보다 큰 법이다. 누가 더 착한가를 기준으로 희생양을 결정해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희생자가 수혜자보다 더 착한 것처럼. 상대방의 사랑의 크기에 실망해서 결심이 흔들릴 수 있는 조건에서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내가 죽어 줄 테니, 너도 같이 죽자”는 얘기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무릇 희생양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그 희생을 누군가 요구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한 입장에서 어떤 조건의 사람이 희생해야 할 것인지 확인이 되었다면, 그는 요구받기 전에 자발적으로 나서야 한다. “누구도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등 떠밀지 않았네….” 읊조리며 그 길을 가야 한다. 서로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해 운명의 결정에 맡겼다면, 그 운명의 결정에 순순히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미련을 가지고  다시 결정하자고 하지 말며, 대가를 요구하지 말며, 심지어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들지 말아야 한다. 고독하게 희생과 양보를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모르게 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어 실패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다음에는 바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하라!”다음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