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① (자발적으로)

DoDuck 2007. 11. 20. 14:09

  ‘누군가 양보를 또는 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문제는 ‘누가 양보해야 하느냐, 누가 희생해야 하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누가 희생(양보)하게 되느냐’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희생은(양보는) 어떻게 해야 하고, 덕분에 덕을 보는 사람(수혜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할 것이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 싸우는 경우에도 누군가는 희생되기 마련이며, 서로 양보하겠다고 나서더라도 결국 둘 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이 희생하기 마련이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란 이야기다.

  이미 합의된 ‘의미 있는 차이’에 따라 누가 양보해야 하는지가 분명하다 하더라도 (또는 운명에 맡겨서 희생양을 결정했다 할지라도), 그가 어떤 태도를 보여주느냐, 또 수혜자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들의 관계는 파탄으로 결말이 날 수도 있고, 희생이나 양보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 희생이나 양보를 통하여 관계가 더욱 사랑이 넘치는 관계가 되고, 다시 또 누군가 양보를 또는 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금이 가지 않을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희생자의 태도’와 ‘수혜자의 태도’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짐승들처럼 약육강식, 힘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수혜자는 희생이나 양보를 강요해선 안 되는 법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희생자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희생을 치러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희생과 양보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등을 떠밀려 마지못해 하는 희생이나 양보는 아름답지 못하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 누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희생해야 할 사람, 양보해야 할 사람이다. “내가 십자가를 지마!” 이 한 마디가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겐 그만큼 미련이 많기 때문이다. 희생이나 양보란 하고 싶어서 하는 짓이 아니라, 상황을 보니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무릇 희생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사항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미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련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미련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버려야 할 것인지……. 세상의 많은 가르침들은 그래서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불가에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가르치고, 도가에선 무위자연을 추구하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미련을 버릴 것을 가르치는 가르침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믿는 기독교에선 이러한 가르침을 순종이라는 단어로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