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강약이나 빈부의 차이가 양보와 희생의 기준이 된다면 누가 양보해야 할까? 당연히 강자가 약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이것이 거꾸로 된 세상은 짐승들의 세계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약자가 강자에게 양보를 한다는 것은 양보가 아니라 힘에 의한 강요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커다란 장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사회체제로 인식하게 되는 원인은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빈익빈(貧益貧)부익부(富益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법과 같은 강제적인 규범을 통해서 부자의 양보와 희생을 제도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2, 재물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3, 찾아오는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5,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을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 운동이 널리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착순의 원리는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중심이 되고 있는 오늘날 사회질서의 핵심적인 원칙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힘의 강약이나 신분의 고하에 따라 새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을 막아주는 도덕적인 원칙인 것이다. 그러나 선착순의 원리는 수평적인 인간관계, 즉 서로 동일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존중되어야 할 원리이다. 100미터 경주를 해서 결승점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빵을 차지하는데, 휠체어와 정상인이 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주를 한다면 불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양보와 희생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차이'로 합당하다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을 더 생각해보면 "누구에게 더 필요한 것인가?", "앞으로 살 날이 누가 더 많이 남아 있는가?", "누가 더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객관적으로 그 차이를 입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서로 견강부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 수많은 난점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왜 양보와 희생을 논하는가?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해진다면 각자의 이기적인 욕망을 떠나서 순수한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살 날이 누가 더 많이 남아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통계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한다. 그래서 나이를 의미 있는 차이로 받아들이는 관습이 성립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누가 더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라 할 것이다. '우리'라는 세계의 확장과 지속성을 위한 노력이 곧 선(善)이며, 각자의 '우리'라는 세계의 크기가 곧 그의 인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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