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희생자가 보여주어야 할 태도 ⑤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게 하라)

DoDuck 2007. 11. 20. 16:43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희생과 양보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사랑을 읽어낼 줄 모르는 그들의 눈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사랑에 대한 무지와 기본적인 인간관의 차이, 또는 그들 자신의 인격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가 그들의 오해를 더욱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옛날 어머님들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모처럼 생선 한 마리를 상에 올리면서 당신은 머리부분만 드시고 남편과 자식에겐 살코기가 많은 가운데 토막을 먹게 했다. 그것은 남편과 자식을 위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희생과 양보였다.  그러나 엄마가 머리만 먹는 모습을 본 자식이 묻는다. “엄마는 왜 머리만 먹어?” 이때 대부분의 어머님들은 한결같이 “생선은 머리가 제일 맛있는 거야. 엄마는 머리가 제일 좋아.”라는 대답이다.

  자식된 입장에서 왜 맛있는 부분을 엄마만 드시는지, 그렇게 맛있는 것은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지면서 좀 먹어보고, 가운데 토막보다 머리 부분이 더 맛있다는 엄마의 말씀을 의심해보고, 그리하여 엄마의 희생과 양보를 깨달아 그 사랑에 감사할 줄 알면 좋겠는데, 개성의 다양성, 기호의 다양성만 믿고 “엄마의 기호는 참 이상도 하지, 어쩜 이런 것을 제일 맛있다는 것일까?” 한 번 고개만 갸웃하고 넘어가는 자식들은 엄마의 희생과 양보를 알지 못한다.

  만일 어머님들이 “나도 가운데 토막이 더 맛있다는 걸 알지만. 그 맛있는 걸 맛있게 먹는 남편과 자식의 모습을 보는 기쁨이 그걸 먹고 느끼는 즐거움보다 훨씬 크고 값지다.”고 가르쳤다면, 아마 결혼한 뒤에 찾아온 어머님에게 어머님이 평소에 좋아하시던 거라며 생선의 머리토막만 내어놓는 자식들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다.

  왜 어머님들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못했을까?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한 번 어머님의 사랑과 배려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식은 얼마나 한심한 녀석인가 말해주고 싶지만, 나는 여기에서 사람들이 보통 예수님의 말씀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모르게 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 것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의 앞 뒤 구절을 살펴보면 이 말씀은 대가를 구하지 말라는 말씀일 뿐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일 뿐이다. 우리는 늘 상을 바라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바랄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라는 것이다. ‘감추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가 아니다.

  예수님부터가 “당신이 왜 십자가에 올라야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게 하려고 애쓰셨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당신 혼자서 당신 몸에 못을 박고 창으로 찌른 것이 아니라 세상 땅끝까지 대대손손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소문내고 광고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광고하고 떠들어대도 여전히 예수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희생자가 자신의 희생을 그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짓인 것처럼 스스로 꾸미고 감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그 희생을 오해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말한다. “양보든 희생이든 대가를 바라지는 않되 네 사랑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