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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준 열사 - 님의 흔적을 발견하다

DoDuck 2007. 3. 11. 18:56
열사의 흔적을 발견하다

 

98년 전, 조선 독립을 위해 멀고 먼 타국으로 향했던 사람이 있다.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유럽 사람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국임을 주지시켰던 그.

1999년 5월 13일 일본 나가자키 대학 이와마츠 명예교수는 손수 접은 종이학 천 마리를 갖고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어떤 곳'을 찾아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깊이 사죄했다. 그 곳에는 아웅산 수지, 넬슨 만델라, 김대중 전 대통령 등 각국의 지도자들이 친필로 새긴 '평화'라는 휘호가 수십 개 걸려있기도 하다.

유럽 내 유일한 항일 유적지이자, 한국 근대사의 산 증거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Yi Jun Peace Museum) 이야기다.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 3인 열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돼 이 곳에서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을 알리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 박물관에 소장된 3인의 특사 사진. 이준, 이상설, 이위종(사진 왼쪽부터)
ⓒ2005 박성진

 

98년 전, 이준 열사의 흔적을 발견하다

 

▲ 이준 열사 기념관. 정면에 걸린 태극기는 개천절 기념으로 추가로 걸린 것이다. 광복 6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서울시청에 걸렸던 1호 태극기다.

이준 열사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라는 고종황제의 밀령을 가슴에 품고 서울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열사와 합류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 열사와 합류, 시베리아를 횡단해 독일 베를린과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르는 장구한 여정에 올랐다.

이준 열사 기념관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다. 3인의 특사는 6월 25일, 회의장에 도착했으나 그들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의 황제폐위 요구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러던 1907년 7월14일, 당시 데 용(De Jong) 호텔이었던 이 기념관에서 이준 열사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들의 투쟁도 막을 내리고 만다.

 

 

 


 

 

▲ 3인의 특사가 도착한 헤이그 HS 역.
ⓒ2005 박성진

이후 세기가 바뀌어 2007년 이준 열사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오늘, 이 곳은 열사의 넋을 기리는 장소이자 유럽의 유일한 항일운동 유적지로 남아 후세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넘어갈 위기 처한 건물, 사재 털어 기념관으로

 

▲ 1907년 만국회의 당시 건물 모습(데 용 호텔). 네덜란드 1978년 연감 수록. 사진 옆 페이지에는 '헤이그에서 발생한 한국인들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2005 박성진

1995년, 데 용 호텔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전 주인으로부터 매매될 위기였던 데 더해 주변지역이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됐던 것.

이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한 교민부부의 헌신 덕이었다. 1991년부터 이준 열사 기념사업을 해오던 네덜란드 교민 이기항(68), 송창주(65) 부부는 사재 20만 달러를 털어 매입위기에 놓인 이 건물을 구입했다.

▲ 1991년 이준 열사 기념사업을 시작해 1995년 기념관을 개관한 이기항, 송창주 부부
ⓒ2005 박성진

건물 매입을 한국정부에 건의하지 그랬냐는 질문에 이씨 부부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절차도 복잡할 것으로 생각했다"며 "오래 살아온 교민으로서 중요한 유적이라고 생각돼 한국인으로써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직접 구입하게 된 것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공관은 바로 인근에 위치해 있다.

헤이그시의 적극적인 후원도 뒤따랐다. 1995년, 이 건물이 공개 입찰을 통해 매입될 위기에 처하자 이씨 부부가 헤이그 시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

"당시 이 건물이 언론에 공개돼 매매될 처지에 놓였는데, 우리가 헤이그 시청에 한국 역사 유적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정식 청원서를 냈다. 헤이그 시청측은 그 뜻이 매우 좋다고 인정해서 신문에 공고하지 않고 직접 우리가 구입하도록 배려했다. 건물을 포함하는 지역이 재개발 대상에서도 제외됐고, '호레카법'(네덜란드의 호텔 레스토랑 카페 관리법) 적용 건물에서 박물관 시설로 변경해 주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씨 부부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태극기를 거는 이유

 

이준 열사는 누구인가?

1859년 12월 18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난 이준의 본명은 이순칠(호 일성(一醒), 해사(海史), 청하(靑霞), 해옥(海玉)). 이다.

그는 1894년 초시에 합격해 함흥 순릉참봉에 임명됐으나 곧바로 사직했다. 이어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 한 후,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됐으나 조신들의 불법행위를 파헤치다가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됐다. 이후 독립협회 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 대학 법과 졸업 후 귀국한 뒤 독립협회 활동을 재개하다 체포됐다. 이준은 수개월 뒤 석방됐으나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이어 대한보안회, 공진회, 헌정연구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다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추서됐으며, 그의 시신은 1963년 네덜란드 헤이그 묘지에서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됐다. / 이준 열사 기념관 자료 요약 정리.

수리와 개보수를 거쳐 1995년 8월 5일 개관하게 된 이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은 이씨 부부가 네덜란드, 일본, 러시아 등지의 문서보관소, 도서관 등에서 마이크로필름을 뒤져가며 직접 수집한 것들이다. 엄청난 전시물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 근대사의 한 궤적을 뚫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당시 네덜란드 신문 자료는 을사조약에 대해서 "새로 체결된 한일협약은 한국의 지배에 대해 일본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였다"라고, 헤이그 밀사 사건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한국의 황제가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 대가로 아마도 폐위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기념관 소개글에는 "유럽 한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될 것이며, 나아가 한국문화 세계화의 창구, 나라사랑, 정의사랑, 평화사랑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바란다"는 내용의 설립 취지가 담겨 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건물 입구에 걸린 태극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단번에 눈에 띈다. 해외에 있는 한국 유적지가 태극기를 내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 부분의 태극기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일제시대에 초등교육을 받았던 북한 출신 이기항씨는 어린 시절에는 일장기가 우리나라 국기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한국 전쟁 후 월남하고 나서야 태극기에 대해 알게 됐다고. 그는 곧 다가올 이준 열사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태극기에 관한 수필을 집필중이기도 하다.

▲ 개관 후 기념관 입구에 걸었던 태극기를 모두 꺼내 펼쳤다.
ⓒ2005 박성진

지난 8월, 서울시청을 장식했던 광복 60주년 기념 태극기 중 제1호도 이 곳에서 보관중이다. 이 태극기 얘기가 나오자 부인 송씨는 지금껏 기념관 건물 밖에 내걸었던 태극기를 모두 가져와 바닥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태극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준 열사도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건물밖에 태극기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한 일본 기자의 기록에서 본 적 있다. 우리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고 있다."

 

"어려워도 끌고 갈 테니 많이 와서 보고 느끼라"

 

▲ 아웅산 수지, 넬슨 만델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 친필 휘호. 넬슨 만델라는 1995년 9월1일, 1996년 11월26일 두 번에 걸쳐 평화 휘호를 전하기도 했다.
ⓒ2005 박성진

이씨와 송씨는 태극기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만큼이나 후세 역사교육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박물관 개관 전인 1993년, '이준 아카데미'를 공식 사단법인 단체로 등록한 것도 결국 후세교육 때문이었다.

그러나 400년 가까이 된 낡은 건물인데다 관람객도 많지 않아 입장료 수익만으로는 열사의 뜻을 지키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개관 초기에는 국가 보훈처, 전경련 등에서 후원금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2년마다 열리는 기념행사 때 보조금으로 2~3천 달러 정도를 받는 게 정부 지원금의 전부다.

이에 대해 이씨는 "내 나이도 이제 우리나이로 예순 아홉이다, 힘에 부쳐서 전담 직원도 한 명 필요하고 한데…휴가도 못 가고 1년 내내 지킨다"며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송씨는 "정부가 돕든 누가 돕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보고 느끼고 배우고 가기나 하라"며 일갈한다.

"지난번에 어떤 학생이 혼자 배낭 메고 와서 반나절 동안 열심히 적으면서 보고 갔던 게 기억난다. 이런 역사를 현지에 와서 배워야 하지 않겠나. 저쪽으로 가면(손으로 가리키며) 이준 열사가 도착한 기차역(덴 하그 HS 역)이 아직도 있다. 그 분이 바로 이곳까지 걸어온 길을 따라 죽 걸으면서 우리 역사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뜻 깊은 여행인가. 그냥 유명한데 가서 사진 찍는다고 그게 관광이고 여행은 아니지 않겠나. 멀리 해외 여행하면서 이런데 와서 보고 가는 게 소중한 경험이 될 거다."

 

" 암스테르담 섹스숍엔 한국인들이 많다던데..."

 

▲ 이와마츠가 기증한 천 마리 종이학과 평화 기원 메시지. 이와마츠를 비롯 일본인 관람객들은 "용서를 구한다" "잊지 말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005 박성진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그리 많지 않다.

이씨는 "단체 예약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안 오는 경우가 많다"며 "1900년대 초기 운동가들과 그 자손들의 첫 세대는 대부분 별세했다, 나는 그 다음 세대인데 우리 세대도 다 됐고, 내 자식 세대 차례인데 이런 데 누가 관심 있겠냐"고 하면서도 못내 아쉬워했다.

송씨도 "누가 그러더라…암스테르담 섹스숍에 가면 한국인이 제일 많은데 여기는 조용하다고"며 뼈있는 한마디를 보탠다. 교민 김모씨도 "히딩크 고향에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는 관광객은 봤어도 헤이그에 가보겠다는 사람은 못봤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인들의 드문 발걸음과 달리, 이곳에는 북한인, 일본인들도 많이 다녀갔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은 "용서를 구한다" "잊지 말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소망은 오는 2007년 이준 열사 서거 100주년 기념일 전에 현재 건물 2,3층만 사용하고 있는 기념관을 1층까지 확장해 이 건물 전체를 이준 열사 기념관화 하는 것이다.

노부부는 이 곳이 유럽 한 도시에 외롭더라도 높게 서 있는 한국인들의 정신적 고향, 역사의 흔적으로 남길 바랄 뿐이다.



 

 

이준 열사 사망에 얽힌 흔적과 의문, 과연 자살인가?

▲ 이준열사 사망 관련 자료들.
ⓒ박성진

이준 열사는 1907년 7월 14일 순국했으며, 사인으로는 자살설과 병사설 두 가지가 있다.

네덜란드 대표언론 <데 텔레그라프(De Telegraaf)>는 1907년 7월 17일자에서 "이준은 볼에 종기를 앓고 있었고 이를 수술로 제거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수술의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보도한 반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7월18일자 호외를 발간,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언론의 정식보도는 7월19일자.

그러나 당시 발행된 사망 진단서에는 사인(死因)이 없다. 1907년 7월 14일 한국에서 온 이준이라는 이름의 한 기혼 남성이 죽었다는 내용이 전부다.

일본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스즈키 대사는 7월 17일 이준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친필 서한에서 단독(丹毒, 상처에 세균감염)에 의한 사망과 자살설 두 가지 모두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 <이준 열사 기념관 자료 참조 정리>

 

박성진 기자/ⓒ 2005 OhmyNews

 

이준열사 기념관을 찾아가려면...네덜란드 헤이그 중앙역 (Den Haag Centraal Station)에서 트램(전차)을 이용해 한 정거장 떨어진 스푸이(Spui)역에서 하차한 뒤 역 근처 바겐슈트라트(Wagenstraat) 172번지 건물을 찾으면 된다. 이메일 : yijunpeacemuseum@hotmail.com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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