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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목사 빈소 스케치(국민일보)

DoDuck 2007. 9. 16. 13:10
고 김동완 목사 빈소 표정 “민주화·빈민 선교 열정 사랑실천 큰 뜻 영원히…”

[2007.09.14 22:33]


“순례자처럼 살다 갔어.”

14일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고 김동완 목사 빈소에서 만난 권호경(67) 목사는 빈민운동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김 목사 빈소는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에 마련됐다. 권 목사에게 김 목사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역자였다. 권 목사는 1972년 월드비전한국 오재식 회장에게서 김 목사를 처음 소개받았다. 도시빈민 선교에 뜻을 합친 두 사람은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에 몸담으며 13년을 청계천 판자촌에서 함께 살았다.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후보도 당시 멤버 중 한 명이다. “끝까지 가난하게 살았지. 나는 그래도 이러고 사는데…”라는 권 목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어머니가 쌀 서말에 감동해 혈압이 높아져 돌아가셨어. 왜 약수형제교회를 어머니랑 같이 개척했더랬잖아.” 김 목사가 남겨놓고 간 재산이라곤 융자가 절반이 넘는 반지하집이 전부라고 했다. 김 목사 동서가 “그 집 내놨잖아요”라며 걱정스레 응수했다.

이날 아침 빈소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 10여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민가협 회원이기도 한 이소선(78) 전태일 열사 어머니와 각별히 가까웠던 김 목사다. 빈소에는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전태일기념사업회, 각종 복지재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교계 단체와 언론사 등 각계 인사들이 보낸 화환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김 목사의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그는 그러나 늘 낮았다. 16년을 김 목사가 시무한 교회에 다녔다는 지혜(20·여)씨는 “약한 사람한테 한없이 약하고 강한 사람에게 강했던 분”이라고 돌이켰다. 영정 사진도 가족이 겨우 찾아낸 사진이었다. 김 목사가 표창 받으며 찍었던 사진을 침대 밑에 숨겨뒀던 것을 가족이 발견해냈다.

‘세상에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절망이 사라진다.’ 김 목사가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적혀있던 글귀다. 기독교계의 큰 산이자 민주화 역사의 산 증인이었던 김 목사는 ‘사랑’이었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