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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부자의 가훈, 육훈(六訓) 과 육연(六然)▣

DoDuck 2006. 10. 23. 10:09

▣경주 최 부자의 가훈, 육훈(六訓) 과 육연(六然)▣
 

< 12대 300년 동안 부를 이은 비밀 >

▣경주 최 부자의 가훈, 육훈(六訓) 과 육연(六然)▣


부를 이루는 것도 어렵지만 부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 경주의 최부잣집은 12대에 걸친 300년 동안 면면히 부를 이어와 경탄을 자아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네 정서에도 불구하고 부를 얻었으면서도 존경받는 부자로서 300년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한 가문이나 기업이 흥성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번 이야기는 어느 한 개인도 아닌 가문 전체의 영광으로 회자되는 최부잣집 부의 내력이다.

이 집안은 어떻게 부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원칙은 없었지만 여섯 가지 가훈과 처신의 법칙 육연이 그들 가문의 정신적 저력이자 구심점으로 작용해 수백 년의 명문가를 이루어왔다.

오랜 세월을 흘러 이어오고 있는 이들 가훈을 읽어가다 보면 세상사를 살아가는 지혜와 인간 심리를 꿰뚫는 통찰이 뿌리 깊게 녹아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V 최부잣집의 육훈(六訓)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이들은 대대로 진사는 지냈으나 한 번도 그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양반으로서 과거는 보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는 일가의 곧은 마음가짐에 있다.

벼슬을 하여 조정에 나아가면 당쟁에 휘말릴 우려도 있고 탐욕을 부릴 우려도 있기 때문에 선조들이 철저하게 막았던 것이다.

소설 상도에서 보더라도 임상옥은 재물, 권력, 명예라는 세 가지 균형이 깨지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계율을 깨달으며 부질없는 욕심을 접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욕망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원칙으로 최부잣집은 이를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2, 재물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

최부잣집은 절대로 만 석 이상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돈이 돈을 번다는 속담처럼 부의 증식은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통상 70%대에 이르는 소작료를 관례로 했는데 남들같이 받으면 만 석을 초과했기 때문에 소작료를 낮춰야 했다.

대체적으로 소작료는 40% 이하로 받아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날수록 혜택이 늘어나기 때문에 더불어 기뻐했다고 한다.

부도 지나치게 축적하면 재앙이 된다는 경계로써 만 석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3, 찾아오는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시대는 여행자들이 객사에서 자는 것보다 그 지방 유력자들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어가는 것을 청하는 일이 많았다.

여관과 같은 숙박업소가 발달하지 못한 사회적인 영향 탓도 있었으나 과객들을 대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최부잣집이 만석꾼이라는 소문이 조선팔도에 알려지면서 영남을 오가는 과객들은 반드시 한 번씩은 들렸다가 갔다.

하루에 머물 수 있는 과객 수용수가 일백 명이나 되었으나 어떤 사람도 문전 박대를 당하지 않았다.

대접을 후하게 받은 과객들은 최부잣집의 덕망을 칭송하고 다녀 동학과 같은 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최부잣집은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최부잣집은 1년에 3천석의 쌀을 소비하였는데 1천 석은 집안에서, 1천 석은 과객과 이웃을 위해 각각 사용했다.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

부자가 되겠다는 이들은 사람이야 어찌 되든 시기를 보고 값이 폭락할 때 물건을 사들이겠다는 풍조가 만연했다.

심지어 기근이 들어 굶주림이 극심해지면 쌀 한 말에 논 한마지기를 넘기는 사례도 빈번했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러한 행동은 가진 사람의 도리가 아니요, 양반의 처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금기로 정해 그 시대에 모범이 될 수 있었다.

이 가훈 속에는 흉년에 논을 사면 원한을 사게 되어 훗날 다시 원한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이치를 담고 있다. 

 가훈으로 이들은 남이 어려울 때 헐값으로 땅을 사는 것을 후손들에게 금지시켰고 이를 철저하게 지켰다.

 

5,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최씨 일가의 며느리들은 시집을 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했다.

만석꾼의 부자가 며느리들에게 무명옷을 입게 하는 것은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으나 며느리들은 가풍을 잘 지켰다.
춘궁기에는 누구도 쌀밥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부자라고 해도 철저하게 절약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부잣집은 이웃의 고통을 모른척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에서 굶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쌀을 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적선지가(積善之家)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부자들이 대부분 인색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은 어떤 면에서 부호라기보다 자선사업가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V 최부잣집의 육연(六然)

 

1,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 하라
2, 대인유연(對人悠然) : 남에게 부드럽게 대하라
3,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어도 맑게 하라
4,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이 있으면 과감 하라
5, 득의담연(得意淡淵) : 뜻을 얻었어도 담담 하라
6, 실의태연(失意泰然) : 뜻을 잃어도 태연 하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육연이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처세에 관한 가훈과 같지만 유사감연과 실의태연을 보면 그들이 은유자적 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처리하고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처리하라는 가훈은 부에 대한 처신의 경지를 뛰어넘어 인생의 지침이 될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대대로 만석꾼 이상의 부를 더 증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은 부에 대한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자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졸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갑자기 나쁜 짓으로 돈을 모아 없는 사람을 멸시하며 사람마저도 물건 취급하는 사람, 인격과 품격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리배를 떠올렸다. 하지만 진정한 부자는 최 부잣집처럼 사물의 이치에 밝고 예를 알았으며 주위를 두루 살필 줄 아는 이들이었다,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등의 계율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부메랑 원칙을 담은 철학이다. 흉한 것을 주면 나쁜 일로 받고, 좋은 것을 주면 기쁜 일이 되어 돌아온다는 단순한 이치이지만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저지르기 쉬운 것들이다.

육훈과 육연은 이들이 단순한 부의 기술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원칙으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적절하게 하여 품격을 지킬 수 있었던 방책이었다.

 

나만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이 오래도록 부자가 되도록 가훈을 만들어 전승하게 했던 최 부자 집은 아름다운 부자의 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