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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후감 :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 장주원 (진보적 형평과 퇴보적 형평에 대해 말하고 있는 명문장)

DoDuck 2016. 4. 19. 21:48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장주원

큰 자연재해를 겪은 어느 먼 나라에 성금을 보내면 "우리나라 고아들만도 얼마나 많은데"라며 혀를 차고, 우리나라 고아들에게 기부를 하면 "주변의 힘든 사람부터 도우라"고 핀잔을 주고, 주변의 힘든 사람을 성의껏 도우면 "네 한 몸이나 잘 건사하라"고 냉소하는 지인이 있다. '내 한 몸 잘 건사'는 정확히 뭔지 몰라 아직 못 해 본 관계로 반응이 어떨진 모르지만, 예감상 그 때도 그리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 할 것 같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에 난입해 뜬금없이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건을 들이미는 일베류 인간들을 볼 때마다 그 지인이 생각난다. 그들이 주장은 말하자면 일종의 '형평성 논증'이다.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건에 희생된 이들에 비해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나 국민적 추모의 열기가 과도하므로,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따라서 그만큼의 보상과 관심이 마땅히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형평성이 정의에 관한 보편적 감수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가치라는 점에서 형평성 논증은 언제나 감각적 호소력을 갖는다. 음주운전을 하다 걸려도 "왜 나만 잡느냐"고 외치고, 군대에서 후임을 때리다 문제가 되도 "다들 군소리 없이 맞았는데 왜 너만 난리냐"고 항변할 수 있는 건 그래서다. 부당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음주운전, 폭력)를 기준으로 놓고 그와의 형평성을 맞추는 것을 '퇴보적 형평'이라 하는데, 세월호 사건에 연평해전과 천안함을 들이미는 것은 정확히 거기에 부합하는 예가 된다. 게다가 이것이 무지에 의한 것이 아닌 인지된, 의도적인 주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악질적이라 할 수 있다.
국가를 보호할 '의무'를 수행하던 중 사망한 군인들과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민간인 -그것도 대부분 미성년자인- 을 동렬비교할 수 없음은 차치하고라도, 만일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사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이나 국민들의 애도가 미흡했다 여긴다면, 다른 상가집에서 깽판 칠 시간과 정성으로 천안함이나 연평해전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애도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누군가를 끌어내려' 이루어내는 '퇴보적 형평'이 아니라 '나를 더 나은 상태로 밀어올려' 이루어지는 '진보적 형평'이 달성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의 고아'나 '주변의 힘든 사람'이나 '내 한 몸' 중 어디에도 아무 관심 없으면서도 단지 그것들을 타인의 선행을 깍아내리고 시비를 걸기 위한 도구로 쓸 뿐인 내 지인처럼, 그들이 천안함이나 연평해전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는 건 오로지 세월호 추모에 똥물을 뿌리기 위해 난입하는 순간 뿐이다. 그 동기는 물론 정치적인 것이며, 이들이 입만 열면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로보트처럼 되뇌이 것도 정치에 매몰된 스스로의 자아를 그대로 타인들에게 투영해 보기 때문이다.
천안함과 연평해전의 희생자들의 목숨 또한 세월호 희생자들의 목숨보다 눈꼽만큼도 더 귀하거나 덜 귀하지 않다. 모든 죽음이 한 우주의 소멸이고 세계의 파탄이다. 어디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따위의 개소리를 지껄이는가. 도대체 어느 정파가 잠시 이득을 얻고 말고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한 문제라고, 그게 당신에게 뭘 해줄 수 있다고 , 그렇게 개보다 못 한 상태로 스스로를 끌어내려야 하는가. 그 하찮은 정파적 이득을 방어하기 위해 순국장병들의 고귀한 죽음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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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작은 공간으로부터 희망을 함께 나누는 큰 길에서 만나는 길목
| 길목 | 2016.04.19 | 1205호 |



새벽예배를 인도하게 되어 교회에서 밤을 새운 날 아침, 매일 메일로 받아보는 [길목]에서 이 글을 읽었다.

읽어가면서 얼마나 시원했는지ㅡ 마지막 질문을 차라리 제목으로 삼을까 하다가, 원저자의 뜻을 존중하여 그대로 두었다. 다시 한번 외쳐본다. "그 하찮은 정파적 이득을 방어하기 위해 순국장병들의 고귀한 죽음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

군대에서 빠져나가려고 온갖 술수를 다부렸던 자들이 애국심을 들먹일 때마다 느껴온 역겨움과, 바로 그런 자들이 주는 몇 푼 알바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짓밟아 뭉개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동원되어 시키는대로 떠들어대는 무슨무슨 전우회 같은 이들에 대한 연민이 뒤범벅이 되어, 나는 그동안 이런 얘기를 어떻게 반박해주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그래, 내 주변에도 큰 자연재해를 겪은 어느 먼 나라에 성금을 보내면 "우리나라 고아들만도 얼마나 많은데"라며 혀를 차고, 우리나라 고아들에게 기부를 하면 "주변의 힘든 사람부터 도우라"고 핀잔을 주고, 주변의 힘든 사람을 성의껏 도우면 "네 한 몸이나 잘 건사하라"고 냉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격이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의 크기"이며 그 세계는 온 인류,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커질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쳐온 나인데, 그들은 자신의 벌레같은 인격수준을 드러내며 나의 인격을 자신들의 수준과 같이 낮추라 한다.

글쓴이 장주원님은 이것을 '진보적 형평'이 아니라 '퇴보적 형평'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 어쩌면 이렇게 내 생각을 꼭집어주고 있는지, 정말 고맙다.

나에게 벌레같은 인격수준을 드러내며 나도 그들같은 인격수준으로 퇴보하라고 요구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벌레처럼 기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태어났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두한 같은 이가 무지막지한 백색테러로 사람다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놓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벌일 수 있는 나라에서 나는 태어났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난도질 당해왔는지, 그래서 모두가 짐승보다 못한 자로 살기를 강요당해 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여전히 다른 아기가 울 때 따라 우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심어 놓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 본성을 꽃피우기 위하여 노력하지.

부디 '벌레같은인격수준을 드러내는' 그들도 하루속히 그들의 본성을 되찾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자신의 인격수준을 거룩한 경지로 고양하려는노력을 게을리하지 마시기를 ㅡㅡㅡ.

출처 : 평화를 만드는 교회
글쓴이 : DoDuck강형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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