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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묵상]141225「마라나타-어떤 기다림」

DoDuck 2014. 12. 25. 09:05

[날마다 묵상]141225「마라나타-어떤 기다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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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기 끝에 오늘 성탄절을 맞아, 다시 오시겠다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주어진 약속인가요?


아기 예수,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이었던 그 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과 똑같이 죽으시고,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나신 후, 이번엔 다시 죽지 않고 그대로 승천하시면서, 이제 사람의 모습이 아닌 성령으로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에는,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약속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뿐이었는데, "속히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은 언제 어디서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성탄절에 그리는 아기예수의 탄생처럼 오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세상>에게는 '심판의 사건'이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실 때 분부하신 것들을 지켜 온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날에 예수님은 아기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공중에서 구름과 더불어 나팔소리 속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데리러 오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기 훨씬 전에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마 24:29-31; 막 13:24-27; 눅 21:25-28)

이 말씀을 오늘날 이해하기 쉽게 그려보자면, 난파한 배의 구명정처럼, 해와 달이 삼켜지는 우주적인 재앙의 날에, 구원받을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우주선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얘깁니다.


추수감사절을 지나 성탄절을 앞둔 시간을 우리는 대림절이라 부르며 주님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는 절기로 보냅니다.

그 기다림 끝에 성탄절을 맞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은 그 옛날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가 아니라 우주적인 재앙과 더불어 그 재앙에서 우리를 건지러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승천 이후 주님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치 노아의 시대 노아의 방주를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인 것이지요.


노아의 시대,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는 사람들은 있었어도, 방주 만드는 일을 거드는 사람이나 혹은 방주가 완성되는 날 함께 탈 수 있기를 원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 시대 홍수로 세상이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 우주적인 재앙으로 다가올 심판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 우주적인 재앙에서 망하면 다 같이 망하는 것이지, 특별히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만 구명정을 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더구나 당신의 가르침을 압축해서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라고 요약해주셨던 예수님께선 <소외된 이웃들을 보살피는지>를 [재앙의 날, 구명정을 탈 수 있는 자격]으로 삼을 것임을 밝히셨는데,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주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믿고 기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나면 즉시 다시 오실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직 우주적인 재앙은 닥치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대림절 끝에 맞이하는 성탄절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 그것도 여자의 자궁 안에서 열 달을 기다렸다가 아기로 태어나서 여자의 젖으로 양육되는 하나님을 기념하는 날일뿐입니다.

주님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약속은 거짓이었을까요?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벧후 3:15)[표준새번역] 


이 우주적인 재앙이 늦어지는 이유는 구원을 위한 것이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 실천을 이유로 우리는 살이 찢기고 고통을 받는 중인데, 바로 그 고통을 가하는 이들, 우리의 살을 찢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심판의 날을 미루고 계시답니다.


2천 년 전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병사였거나,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라고 아우성치던 군중이었거나, 초대교인들을 콜로세움 지하로 몰아넣고 광분했던 로마 시민이었거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이 감사한 일 아니었을까요?


나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오늘도 성탄절을 맞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2천 년 전 그 시절에 내가 꼭 그랬을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진도 팽목항에서. 공장 굴뚝에서, 광고탑에서, 거리거리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려, 살려 달라 외치는 분들에게는 어떠할까요?

콜로세움 지하에서 맹수들의 먹이로 바쳐질 운명에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외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24:42)[개정개역]

깨어서 고통을 지켜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닫습니다.

차라리 이제 잠들고 싶은데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말하십니다.

마치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자다가 놓칠 것 같은 그림을 연상시키는 말씀인데, 주님이 다시 오시길 갈망하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듯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침몰하는 배 안에서, 그 에어포켓 안에서 구조대로 오시는 재림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 배 밖에서는 아직 마지막 날이 아님을 당연한 듯 여기는 사람들이 한가하게 스스로 우리가 걸어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주님 속히 오시옵소서!

차라리 우주의 재앙이 당장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그 시간 그 장면을 깨어 지켜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