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또는 일기, 편지/오늘의 묵상

[날마다 묵상]141120「하나님의 형상(2)」

DoDuck 2014. 11. 20. 09:36

[날마다 묵상]141120「하나님의 형상(2)


(창1:27a)[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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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추앙받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우리 모두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예수님, 그렇게 우리도 예수살기를 시작합시다.

그건 예수님 한 분 만의 삶이라고,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라서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가르치는 모든 '제국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우리도 예수살기를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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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평화를만드는교회 수요성서연구 [통독으로 보는 출애굽기]를 들었습니다.

제12장 유월절에 대한 공부였는데 말씀의 시작은 다시 창세기부터 시작한 "성서연구 서론"의 재학습이었습니다.

몇 차례 반복해 온 내용인지라 이제 익숙한 말씀인데도, 수십 년 문자주의에 매여 있었던 더 오래된 습관 때문인지, 들을 때마다 새롭고, 더 많은 이들이 알아야 할 얘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론의 얘기를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과학적 기록이 아닙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하나님과 함께 본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직접 귀에 들려주신 얘기도 아닙니다. 창세기가 기록된 것은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지도 수백 년이 지난 BC.400년 경의 일이었습니다.

수백 년 전의 사건이 수백 년 후에 문자로 기록된 것입니다.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된 것이지요.

사건이 있었고, 우리는 그 사건의 해석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수천 년이 지나 그해석을 읽으며 새로운 깨달음으로 오늘의 사건을 해석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그렇게 살아 운동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읽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어느 종교학자의 얘기처럼 우리는 자꾸 읽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오늘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세오경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고도 이백 년 가까이 지난 시기에 정경으로 성립되었으며, 그 기록은 과학적 사실이 아닌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의 첫시작에서 이민족의 압제 아래 있던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피라밋 구조의 정점에 선 자만이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라고 인정받던 시기에, 너희 왕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그것은 혁명이었습니다.

야훼신앙은 혁명적인 종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계사회의 정점에 있는 왕에게만 허용되었던 '신의 형상' 혹은 '신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켰던 최초의 종교가 야훼신앙을 가진 이들의 종교였습니다.

제국의 다른 신들이 지배자의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해주고 있을 때, 야훼 하나님은 학대받고 착취 당하는 이들의 하나님으로 우뚝 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시작하는 마가복음 1장 1절의 말씀이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를 연 옥타비아누스 황제, 곧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아폴론 신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주', '평화의 왕'이라는 호칭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예수신앙이 얼마나 혁명적인 신앙이었는지, 왜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콜롯세움에서 사자밥으로 던져지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끓는 기름가마에서 죽어가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혁명적인 고백으로 출발한 야훼신앙이 제국의 질서, 피라밋 구조의 종교로 변질되어 갔던 유대교를 수백 년 전의 말씀을 다시 해석해 주시면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신 구세주였습니다.

안식일 규정과 정결 규정을 통해 버림받은 죄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을 율법의 재해석을 통해 '사람이 법보다 먼저'라는 걸 일깨우며,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살아보겠다고 꿈틀거리며 반역의 날을 세우는 이들을 짓밟아, 반란의 싹을 제거하여 얻은 침묵의 상태 - 가진 자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골고루 나누어 먹는 일, 아무도 소외되지 않은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피라밋 세계의 맨 아랫단에 있는 자들을 소외시키는 자들, 그리고 그 소외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들'과 싸우라고, 세상에 불을 던지신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