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3 희생과 양보의 원리

연재를 마치며 (심리테스트 결과 및 각각의 응답에 대한 나의 충고)

DoDuck 2007. 11. 28. 11:32

  다음은 노원중에서 근무하던 시절 "심리테스트 무인도시리즈"를 가지고 인터넷 공간에서 설문투표를 진행한 결과와 그 당시 이런 깨달음을 전하면서 마지막에 덧붙였던 각각의 선택에 대한 충고이다. [shalom-maker가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온 이 긴 글을 마치면서 부록으로 드리고자 한다.

   이 글을 읽어 온 여러분들에게 늘 주님 주시는 평화가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노원중에서 실시했던 심리테스트 설문통계 결과 

 

 

무인도의 두 사랑하는 남녀.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살아나갈 수 있다면?...... ” 

          

여        자 (335명)

남        자 (94명)

선  택     문  항

%(응답자)

선  택     문  항

%(응답자)

절대 헤어질 수 없어. 차라리 같이 죽는다

55(184) 

절대 헤어질 수 없어. 차라리 같이 죽는다

33(31)

하나라도 살아야지. 남자를 살게 한다.

9(29) 

하나라도 살아야지. 여자를 살게 한다.

30(27)

하나라도 살아야지. 여자인 내가 산다.

13(44) 

하나라도 살아야지. 남자인 내가 산다.

11(11)

어떻게 해? 운명이 결정해 줄 때까지 기다린다

23(78) 

어떻게 해? 운명이 결정해 줄 때까지 기다린다

26(25)

 

 

 

 위 설문의 각각의 선택에 대하여 강의 후에 주었던 충고


“절대 헤어질 수 없어. 차라리 같이 죽는다”고 대답한 50%의 친구들에게 : 선생님은 이번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의 선택을 최악의 선택으로 질타를 가했습니다. 가장 혹독한 평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업을 마치면서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자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을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간단히 바꾸려들지 마십시오. 선생님의 이야기는 선생님 나름대로의 어떤 기준을 가지고 꾸준하게 생각을 발전시킨 결과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판단근거에는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잘못된 것인가요? 선생님은 절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잘 압니다. 이별의 아픔을 겪느니 차라리 함께 죽겠다는 생각을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더구나,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저세상이 계속된다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고, 그것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면, 당연히 차라리 같이 죽는 일을 선택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이 지상에서의 삶이 가장 귀중한 것이라면 절대로 둘 중에 누가 양보하는 일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의 비판을 여러분은 다만 이런 질문으로 받아들여 주길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까?” “잠시 헤어져 있는 채로 사랑을 할 순 없습니까?” “죽음이란 영원한 이별입니까?” “……” “……”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사실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이 오직 한 사람, 그 뿐입니까?” “여러분의 ‘우리’라는 세계 안에는 단 둘만 존재합니까?”


 

상대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선택을 한 친구들에게 : 여러분의 선택에 경의를 표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노파심 때문에 몇 마디만 말하겠습니다. 강의 도중 지적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선택이 생각하기 귀찮아서, 생각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도피수단은 아닌지 반성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다시 생각해보라는 얘기입니다. “누가 양보해야하나”를 결정하는 “의미 있는 차이”가 “누가 더 희생정신이 강한가”로 귀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희생자의 사랑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더 상대방을 사랑하는가, 누가 더 희생정신이 큰가를 따져 더 큰 사람이 죽자“고 말한다면 “지가 죽고 싶어 죽었지, 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자신이 사는 길을 선택한 친구들에게 : 여러분의 선택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택은 “사는 일의 중요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선택이 단지 “너냐 나냐”라는 차이에만 주목한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우리라는 세계”안에 여러분 자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 주십시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산 자의 도리”를 충성을 다하여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운명에 맡기겠다는 친구들에게 :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여러분의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선생님도 신앙인으로서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이성적 판단을 포기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생각하기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앞서 말한 것처럼, 운명에 맡기는 것은 “의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때의 선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최대한 의미있는 차이를 연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