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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

DoDuck 2006. 12. 6. 07:26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
2006.09.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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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의 유래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표상물로 태극기, 애국가 그리고 나라꽃 무궁화가 있다.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해서는 제정과 채택, 공포등에 대한 확실한 규정과 근거가 있으나 국화인 무궁화는 뚜렷한 법령 규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무궁화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었으며 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꽃으로 인식되면서 나라꽃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라꽃이 무궁화인 것을 알고, 여러 문헌에도 국화로 제정된 정확한 근거에 관해서는 서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무궁화가 우리민족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은 역사적으로 그 연원이 무척 오래되어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재조명 하고 있는《단기고사(檀寄古史)》에는 ''근수(槿樹)''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환화(桓花)''나 ''천지화(天指花)''로 무궁화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 ''훈화(薰花)''표현하여 단군시대에 무궁화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뒷받침 해준다.

신라 효공왕 때와 고려 예종 때에는 외국어 보내는 국서에서 우리 나라를 ''근화향(槿花 鄕)''이라 표현 할 만큼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사전 》에, "고려조시대에는 전 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상·의학상에 진중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의 사쿠라, 영국의 장미와 같이 피어 국화로 피어 있다가 이조에 들어서 왕실화를 이화로 정하매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족으로 부터 소원해졌든 것인데 20세기의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매 유지들은 민족사상의 고취(鼓吹), 국민정신의 통일 진작에 노력하여.... " 라고 기록되어 있어 무궁화가 고려 시대부터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이화(李花)가 이씨 왕조의 문장이 되었으므로 무궁화가 조선을 대표하는 꽃으로 표현되지 못하였으나, 여러 문헌과 작품에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홍직의 《국어대사전》에, "무궁화는 구한국 시대부터 우리 나라 국화로 되었는데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를 옛부터 ''근역'' 또는 ''무궁화 삼천리''라 한 것으로 보아 선인들도 무궁화를 몹시 사랑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라고 하여 조선 후기 개화기(開化期)를 거치면서 다시 무궁화를 우리 나라의 상징화(象徵花)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20년을 살다 간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가 쓴《풍류한국》을 보면 프랑스, 영국, 중국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전체 국민의 꽃으로 만들어 졌으나, 우리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가 아닌 민중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고,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주 전통의 부분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 민족과 무궁화를 결부시켜서 이야기한 것은 여러곳에서 찾을 수 있고, 우리 스스로는 옛부터 우리나라를 ''무궁화 삼천리''라 하면서 은연중 무궁화를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압박속에서 무궁화가 겨레의 얼로,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서 뚜렷이 부각되어 고통속의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

우리는 무궁화가 우리 나라의 국화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예로부터 은연중에 우리의 국화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양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발표한《나라꽃 무궁화의 어문학적 고찰》에서는 "무궁화가 실제로 민족을 상징하는 꽃으로 부각된 것은 구한말 이후였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물론 앞서의 그러한 무궁화와 우리 민족과의 깊은 인연이 바탕이 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점차 밀려드는 외세의 압박속에서 민족 자존(自尊)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려는 노력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 하여 현대적 의미의 국화로서의 무궁화는 구한말 이후부터로 보고 있다.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의 학예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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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生夕死로 永遠 …… 錦繡江山의 表徵
조생석사로 영원 …… 금수강산의 표징
- 고래로 조선에서 숭상한 근화가 무궁화로 변해 국화가 되기까지
''朝鮮國花'' 無窮花의 來歷
조선국화 무궁화 내력
녯말이외다마는 대한시대에 국화(國花)를 무궁화(無窮花)로 숭상하엿섯스니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동대문 밧 류중균).
往昔은 木槿花
왕석 목근화
우리가 무궁화라는 것은 근화(槿花)를 이르는 것임니다.
근화를 무궁화라고 하는 까닭은 분명한 사상의 증거는 업슴니다마는 근화를 고대에는 목근화(木槿花)라 하엿다는 말은 이천오백 년 전 중국 전국시대에 지은 책《산해경(山海經)》에
君子之國多木菫之華
군자지국다목근지화
라 하엿고 기우에
君子國在其北 (중략)
군자국재기북
其人好讓不爭有薰華草朝生夕死
기인호양부쟁유훈화초조생석사
라 하엿스며 그 주(注)에 ''薰(훈)''은 ''菫(근)이라 하엿스니 근화를 훈화(薰花)라고도 하고 혹은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하엿스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 오든 모양이람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근화를 "ムクケ(무쿠게)"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화뎐되여 무궁화라고 속향에서 불러 내려왓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함니다.

現代에 無窮花
현대 무궁화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무궁화(무궁화)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함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뇬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 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 때의 선진이라고도 하든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잇서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악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때 태여난, 上帝(상제)가 우리 皇上(황상)도으사 海屋籌(해옥주)를 山(산)가치 싸흐소서 權(권)이  瀛(환영)에  치사 億千萬歲(억천만세)에 永遠無窮(영원무궁)하소서 라는 노래의 부속듸여 생겻다고 하는, ''東海(동해)물과 白頭山(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무궁화 삼천리) 華麗江山(화려강산)'' 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무궁화)''라고 쓰기 시작한 듯하담니다.

國歌 짓고 國花
국가 짓고 국화
그리고 이와 전후하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등이 맹렬히 민족운동, 즉 국수 운동을 이르킬 때에 조선을 무궁화에 비겨 청산가튼 웅변을 현하가치 토할 때마다 ''우리 무궁화 동산은… ''하고는 주먹이 깨여질 듯이 책상을 두르리고 연단이 부서질 듯 발을 굴럿슴니다. 아마 이러한 자극과 동긔로 근화가 무궁화로 변하야 그 때에 국민이 라고 하든 사람의 귀에 익어지고 입에 오른 듯함니다. 엇잿든 이 때를 전후하야 근화를 무궁화라고 뚜렷이 쓰기 시작하고 또한 이것으로써 조선의 국화(國花)를 만든 듯함니다 그러나 ''無窮花(무궁화)라는 저를 쓴 동긔는 순전히 보기 좃코 뜻깁게 하노라고 쓴것 이지요.
일시는 이화로 일시 이화 근화, 즉 무궁화가 위에 긔록한 바와 가치 그 때에 비로소 국화가 되엿다 하야 국민의 숭상을 바덧다는 것은 아니외다.
몬저 쓴 바와 가치 이천오백년 전 녯날부터 조선 나라에는 근화가 만허서 중국 사람의 눈에는,
君子之國 多木槿之華
군자지국 다목근지화
로 보혔고 또한 그보다 좀 느져서 《해동역사(海東繹史)》에 고려시대에 중국에 글을 보낼 때에 고려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자칭하였스니, 근화가 고래로 조선에 만헛든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임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근화에 대한 긔륵이 조곰도 남지를 아넛스니 이는 리태조가 조선을 어든 후에 리화(李花)를 숭상하는 뜻으로 나라의 자랑 거리요, 백성이 다가치 숭상하든 근화를 배척한 듯하외다.
그래서 그간 근화가 사람의 눈에서 머러지엇든 것이겟지오. 무궁화 특색 식물학을 배호지 아넛스되 본 사람은 다 알겟지마는 무궁화는 꼿이 그리 화려하지 못하고 가지가 그리 맵시 잇지 못하며 입피 또한 빽빽하야 운치 잇지 못하지마는 아츰에 이슬을 먹으며 피엿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꼿송이가 또피고 또죽고 또피고 하야 끄님업시 뒤를 이어 작구 무성하는 것이 찰나를 자랑 하엿다가 바람의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꾸라''보다도, 붉은 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크다란 중국의 함박꼿보다 얼마나 근긔잇고 꾸준하고 긔게 잇고 기염성 잇고 소담하고 귀여운지 도뎌히 남들의 그것에 비길 바가 아닐 것 임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이 조생석사(朝生夕死)하되 뒤가 잇는 근화를 무궁화라 하야 나라의 국화로 한 듯 하담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궁화가 일홈가튼 사명을 다 못하야 서북도에서는 볼 수가 업시 되엇스며 경긔방면에서는 뜻잇는 사람의 동산치례나 되엿스며 전라도에서는 농가의 울타리 감이 되어 잇슬 뿐이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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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에 대하여 김정상은 《무궁화보》에서 "무궁화가 조선의 국화로 적힌 것은 이 신문이 최초인 듯하고 개화 이전에는 무궁화가 책 속에 적혀 있을 뿐이고 민족의식 에 들지 못하였다." 고 결론지었다.

우호익의 〈무궁화고〉에는. "무궁화는 부지불식 간에 조선의 이상화가 되었으며 조선의 국화가 되었다." 문일평(文一平)의 호암전집(湖岩全集)중 《화하만필(花下慢筆)》에는, "근세 조선이 이 꽃으로서 국화를 삼는 것이 이러한 사적(史的)인 유구한 관계가 있었 던 때문이다." 라는 구절등 계속해서 발표된 글에 무궁화가 조선의 국화였음을 규정하 고 있다.

한서(翰西) 남궁 억의 무궁화에 대한 사랑은 남과 달랐다.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인 1910년 11월부터는 배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기 위하 여 우리 나라 지도에 무궁화를 수놓게 하였다.

1919년 9월에는 홍천 보리울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궁화 묘포장(苗圃場)을 만들어 무궁화를 심고 가꾸어, 나누어 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민족운동을 일으킬 때마다 조선을 무궁화에 비기는 웅변 을 토하여 무궁화를 민족의 상징으로 부각시겼는데, 이 시기가 독립협회의 창설(創設) 과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을 때이므로, 1890년대 후반이었다.

한편,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인 1900년에 외교관복이 칙령 제15호로 제정되었는데, 가슴 부분에 금수(金繡)한 근화(槿花)의 수로 등급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1902년 우리 나라 최초로 제정 공포의 역사가 있는 국가(國歌)〈대한제국 애국가〉가 같은 제목의 책으로 인쇄되어 졌는데, 이 책의 표지에 태극을 중앙에 그리고 주위에 네 송이의 무궁화를 그렸다.

조선 왕조의 잔재(殘滓)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화의 물결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던 이 시기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인 외교관복과 국가(國歌)의 표지에 무궁화가 등장한 것은 법령 제정의 의미를 떠나서도 무궁화가 이미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3월 1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이 선포됨에 따라서 수립된 상해 임시 정부에서는 3·1독립선언서 전문과 임시정부의 각료(閣僚)명단, 임시헌장, 선언문, 정강 (政綱)을 실은 독립선언서를 발행하였다. 이 대한독립선언서의 상단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도안되어 자리잡고 있다.

무궁화가 우리 나라 국화임을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하고 반복되는 애국가의 후렴구일 것이다.

애국가는 우리 나라의 국가(國歌)로 국기와 더불어 우리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 고래로 숭상되어 오던 무궁화는 개화기부터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는 꽃으로 재인식 되었고 대한제국시대에는 이미 국화로 언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일제의 침략기 에는 독립지사들에 의해 우리 국가의 표상(表象)으로 지켜졌다.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무궁화는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의 위상(位相)을 정립하기 위하여 정부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부터 국가를 상징하는 휘장으로 의장 화되는 등 우리 나라 국화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무궁화의 특성은 우리 민족정신의 표상으로 부각 (浮刻)되었고, 오늘날에는 무궁화가 관념 속의 국화로만 인식되지 않고 우리 주위에 심고 가꾸어 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꽃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