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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은준관목사님의 설교)

DoDuck 2006. 7. 14. 04:49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실천신학대학원 은준관 총장, 목회자는 예배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라
2006년 07월 10일 (월) 17:28:39 [조회수 : 978] 은준관

제 3교회의 도래

<제 3교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third church)> 이것은 무명의 시제, 월버트 뷸만(Walbert Büehlmann)이 세계교회의 역사적 운명을 두고 예언한 글이었습니다. 뷸만은 희랍정교회를 상징으로 ‘제1교회’라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절대적 교권주의에 저항하면서, 교회의 자주권을 높이 들었던 제1교회! 제1교회는 초대교회가 구현한 예배 전통을 지금까지 보전해온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뷸만은 제1교회를 ‘아침에 지는 별’이라 불렀습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잃어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역사로부터의 단절이었습니다. 제1교회는 영성의 이름으로 반역사적이며 반개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1교회는 영성과 역사 사이의 단절로 자신을 영적 고립주의의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제1교회의 위험성은 세계 모든 교회! 아니 오늘의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때로는 유혹하는 독소일 수도 있습니다.

2000년의 교회사에는 1500여 년을 주도해온 교회가 있었는데 뷸만은 이를 ‘제2교회’라 했습니다. 제2교회는 놀랍게도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와 유럽과 미국을 주도해온 개신교회를 모두 포함하는 기독교 왕국(Christian Empire)입니다. 제2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그 중심에 기독교 왕국을 세워 온 전투적 교회(The Church Militant)입니다. 승리주의의 표상이 된 제2교회! 무조건 크고 강한 조직과 제도 그리고 건축으로 세상을 압도하여 온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톨릭 사제이면서도 그는 냉철한 언어로 제2교회를 ‘아침에 사라지는 달’이라고 비유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라는 것입니다. 세계 정복과 그 중심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는 것이 마치 하나님나라 실현인 것처럼 착각하여 모든 에너지를 쏟아온 제2교회! 그런데 바로 비만증 때문에 또 다시 역사로부터 단절되면서 고립주의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뷸만은 그의 붓끝을 21세기로 돌리고 있습니다. 20세기에서 발화되어 21세기로, 아니 제3의 밀레니엄으로 치솟는 교회 하나가 등장하고 있다고 흥분하였습니다. 남미교회·아프리카교회·아시아교회를 묶어 그는 ‘제3교회’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 3교회는 ‘별은 지고’, ‘달마저 사라져가는’ 미명! 미명을 헤치고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제3교회는 21세기를 비출 지상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긴긴 가난을 씹어오고’, ‘온갖 착취와 압제에 시달렸으며’, ‘죽음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오염되지 않은 영성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제3교회로서의 가능성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고난의 영성이 1000만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세계 교회의 비밀을 풀이한 뷸만은 제3교회를 두고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충고 하나를 던졌습니다. 제3교회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성과 제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3교회가 지평에 떠오르는 태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동시적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부활 신앙이 역사와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부활’, ‘신앙’은 제3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며, 그 부활 신앙으로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Praxis는 교회의 존재론적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념이나 제도에 의한 Praxis가 아니라 부활에 의한 치유와 변화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3교회로의 발돋움

여기서 저는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제3교회로 발돋움을 하기도 전에 그 문턱에서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 위기는 ‘교인 감소’라는 현상에서, ‘신학교육의 난맥’에서, ‘보수와 갈등’에서 그리고 ‘목회자들의 자질’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고민은 이것들을 넘어서 신앙 깊은 곳에 자리 잡아온 ‘이원론’, 교묘하게 위장된 이원성을 추적하는 데 있습니다. 부활절 연합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만민이 경험하고, 그리스도가 주관자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나라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이 거대한 행사를 누가 주관하며, 누가 단상 윗자리에 앉는가라는 가장 하찮은 일에 노예가 되어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거부하고 있는 '종교꾼‘으로 전락했습니다.

목회자들은 목회자이기 전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날마다 씨름하면서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 땅의 온갖 아픔을 치유하는 생명의 힘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부활의 주님을 교묘히 거부한 채, 그 틈새에 목회자가 예배의 주역이 되었으며,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제3교회로 가기도 전에 제2교회의 타락을 그대로 모방하는 종교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르는 교회 안에 ‘세습’이라는 말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현존속에 부재

신약 성경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연속적이면서도 비연속적이며, 비연속적이면서도 연속성을 가진 두 개의 공동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공동체는 ‘12제자’입니다. 12제자 공동체의 특성은 ‘자생 그룹’도, ‘자발적 집단’도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내부 공동체’라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은 처음부터 장차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실 하나님의 종말론적 회집(Eschatological Gathering)을 미리 경험하고 또 증언하는 종말론적 내부 공동체이었습니다.

어부의 직업을 과감히 포기했다는 것!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았다는 것! 영원한 그 무엇에 생명을 건다는 그것은 처음부터 종말론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2제자는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영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손끝에서 이 세상 모든 권력과 사탄의 권세까지도 압도하는 하나님나라의 권세를 보았으며, 세리와 죄인 그리고 창녀까지도 초청하여 식사를 나누는 식탁 공동체에서 제자들은 장차 펼쳐 질 하나님나라 메시야 잔치를 미리 보았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기 위한 공동체 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12제자는 하나님의 세계로 파송되어 증인이 되어야하는 ‘보내심’의 훈련에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나라 증인 공동체로서 갖추어야 했던 ‘부르심·세우심·보내심’이라는 3중 구조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완벽한 12제자 공동체가 한 순간에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완벽한 공동체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어둠 앞에서 한 순간 추락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12제자도, 공동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허상이고 허구였습니다. 이 미스터리를 두고 앙리 노엔(Henri Nouwen)은 ‘Absence in Presence’라는 말로 풍자했습니다. ‘현존속의 부재’라는 뜻입니다. 함께 있었으나 함께 있지 아니한 아이러니,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12제자 공동체의 실상이었습니다. 3년이라는 긴 세월, 그것도 밤과 낮으로 몸으로 함께 한 3년, 하나님나라의 부름을 받고, 증인으로 세움 받으며, 파송의 훈련을 거치면서 주님과 함께 있었으나 (현존)제자들은 그 누구도 주님을 주님으로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적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저는 또 다시 한국교회의 위기를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현존속의 부재’의 위기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만을 노래하며 거대한 교회와 형식을 가꾸어가는 동안,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한국교회는 한순간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기가 있습니다. 지도자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 속에 파고드는 화두가 한마디로 성공적 목회라면 그 뒤에는 정치적 욕망이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 하지만, 우리는 ‘내 성공’에 눈이 어두워 사실상 주님을 보지 못 할뿐 아니라 주님과 교인사이를 갈라놓고 그 자리에 내가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제자 공동체와 오늘의 한국 교회는 현존속의 부재라는 닮은꼴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또 다른 공동체 하나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태동된 초대교회라는 ‘교회(Ecclesia)공동체’입니다. 놀랍게도 초대 교회 공동체는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던 11제자와 맛디아 그리고 120문도가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8일, ‘주님의 날’에 그들은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함께 떡을 떼고 주의 만찬을 나누는 공동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에 힘쓰고, 필요에 따라 재산을 공유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모두가 헌신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세우심’이 있었으며, ‘보내심’이 있었기에 제자들이 체험했던 3중구조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공동체는 제자 공동체의 연장은 아니었기에 비연속적이지만, 3중 구조의 공동체 체제에서는 연속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 하나가 깔려있었습니다. 제자 공동체에는 항시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주님께서 몸으로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몸으로 계시지 아니한 그분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재 속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부재 속의 현존이라는 역설이 초대교회의 미스터리였습니다.

부활사건으로 새롭게 된 공동체

여기서 우리는 핵심적인 신학적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왔습니다. 이 질문은 “무엇이! 그 무엇이 깨지고 흩어진 12제자 공동체를 다시 불러 모아 예루살렘 초대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태동시켰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여기에 함께하는 모든 목회자 한 사람의 신앙 양심 앞에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신학적인 응답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미래와 그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어떤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진술 앞에서는 솔직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12제자 공동체와 초대 교회 사이를 이었느냐?’라는 질문 앞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단호히 ‘베드로’라고 부르며, 베드로부터 이어지는 사도 계승이라 대답합니다. 반대로 이 질문 앞에 경험론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의 뜨거운 체험’이라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 앞에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성경을 읽는 신앙과 신학은 그 무엇은 ‘베드로’와 ‘뜨거운 체험’ 이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부활절 예배를 두고 누가 주최할 것이냐? 누가 단상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로 다툼질이나 하는 종교꾼들의 놀이 대상이 아닙니다. 부활하심은 제자뿐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꺾으신 하나님의 생명의 완성이었기에, 부활은 우주적이며, 전 인류적이며, 전 역사적이며, 전 시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던 제자들이 죽음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생명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생명!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 이 생명 안에 복음이고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사도행정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의 처음 Key Word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는 부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깨지고 흩어진 12제자를 초대교회 공동체로 이어간 그 무엇은 부활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활 사건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존재론적 사건이고 근거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가 펼치신 인류 구원 드라마의 주역으로서 이 역사와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십니다.

결론으로 내리고자 합니다. 십자가에서 흩어졌던 부활에서 태동 된 초대 교회 공동체! 그들이 드린 예배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종말론적 사건이고 경험이고 감격이고 변화였습니다. 사도로부터 배운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심과 다시 오실 날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떡과 주의 만찬은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행위였습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나라에는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는, 아니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되는 예시적 행위였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부활을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고 또 대망하는 부활의 후속 사건(Noetic Event)였습니다. 부활이 고백되고 경험되고 증언되는 한 교회는 비로소 교회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위기적 징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1세기 하나님의 창조인 지구촌을 비출 제3교회입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1000만을 헤아리는 그리스도인의 영혼 깊은 곳에 남겨두신 고난의 영적 가능성이 살아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목회자들입니다. 목회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목자라고 착각하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험한 말·쌍스러운 말·반말을 섞어가며 텔레비전에서, 강단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잘하나 식의 엄청난 ‘목회성공 서바이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목숨 걸고 새로운 프로그램·성공 모델들을 찾아 전국뿐 아니라 미국·남미·싱가포르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과 교회 사이의 만남과 응답이라는 감격과 기쁨을 사실상 가로 막고, 단절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박하지만 어려운 포기부터 우리 시작하십시다. ‘교인 만들기’, ‘우리교회 교인 만들기’, ‘내 교인 만들기’ 목회를 포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나의 목회는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는 목회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막혔던 하나님의 목회가 다시 시작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회가 시작되는 그곳에,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증언자로, 대변자로 서서 하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변하는 통로로 길을 예비하는 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배는 그 횟수와 형식을 넘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부르심 앞에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응답하는 종말론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예배의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중보자 되기를 포기하고, 철저한 증인으로 변신하는 그 순간부터 ‘설교’는 형식과 횟수를 넘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목회자에게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종말론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성만찬은 신비적인 연합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축제가 되며, 교육은 하나님 백성 모두를 하나님나라 증인으로 세우는 훈련이 되며, 선교와 봉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계를 치유하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우리 안에 선악과 다가오는 ‘온갖 비본질적인 것들’, ‘생명 없는 것들’에 메여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보는 우리의 위선을 회개하고, 이후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말씀과 감격, 회개와 환희가 일어나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임재하시는 목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시 드시고 지구촌을 비추는 등불로 인 치실 것입니다. 목사님이 서 계신 자리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증언자가 되어 돌아가십시오.

은준관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이 글은 은준관 총장이 지난 6월 27일 한국목회자협의회 파송예배 때 설교한 원고입니다. 저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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