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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의 선교사들

DoDuck 2006. 7. 12. 09:15
<양화진- 초대 한국 선교사들> | 자유로운 글 2004.10.2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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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한국 선교사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사는 법이 나오고 믿음으로 죽는 법이 나온다. 진정한 기독교는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믿음으로 조선을 사랑하여 희생의 삶을 사신 초대 한국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살펴본다. “세계 선교 공동체” 선교사님과 간사님들의 삶이 한 알의 밀알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라면서…….

양화진

양화진은 미국인 2백 30, 영국 30, 프랑스 25, 덴마크 3, 호주 12, 벨기에 4, 백러시아 54, 캐나다 7, 일본 1, 스페인 4, 한국 17 …… 국적을 달리한 묘소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 깜깜했던 100년 전, 배를 타고 몇 개월씩 고생을 해야 동서양이 간신히 이어지던 백 년 전, 나라를 등지고 고향을 버리고 가족과 헤어져 이 미개하고 몰이해로 가득찬 땅으로 들어왔던 선교사들 ……전도자들 …… 그 분들은 정말 성령을 힘입은 사람들이었다…….” “백 년 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분들…….”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땅에 묻힌 하나님의 사람들 ……. 여기 한국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를 먼저 소개한다.

John W. Heron 선교사

1858년 6월 15일생
1872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존이 14세 때…….

존 헤론이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고 작정했을 때 어떤 장벽이 있었나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1. 친구

존이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고 작정했을 때, 오래 전부터 의사의 길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고 같은 길을 걸어온 그의 친구는 실망과 배신감까지 나타내며 존의 뜻을 돌이키려고 한동안 고심했다.

2. 학교

테네시 주 매리빌 대학 졸업 테네시 종합대학 의과대학 개교이래 최우수성적의 영예를 안고 졸업……. 이민 11년만에 1883년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 목사의 아버지 감사의 기도 … 모교에서 후배 양성(의사)을 위해 교수사역을 해 줄 것을 제안 … 끈질기게 … (안정된 길, 장래가 보장되고 튼튼하게 다져진 길. 의미도 있고, 보람도 찾을 만한 일 … )

3. 해티

존스보로 의과대학 교수의 딸

“코리아가 나라이름이에요.? 존의 앞길은 열려 있어요 존은 그 놀라운 실력은 이 넓은 나라, 이 많은 인구를 위해 쓰여져야 해요. 존은 더 많은 사람, 더 큰일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해티의 갈등 … 존의 기도 … 이 여인을 나의 아내로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코리아를 사랑하게 해 주시고 … 함께 가게 해 주세요……. 해티의 결심 … 본격적으로 방해 하고자 했다. 해티의 연구 … 코리아 위험, 미개, 더럽기 짝이 없고, 가난, 굶어 죽는 일이 태반, 일본이 노리고 있고 중국도 계속 손을 뻗치고 있고, 러시아도 한몫 보겠다고 하고, 왕실의 권력다툼은 치열 …….

4. 장로교 선교 본부

조선이 선교 개척지라는 정보는 일본에 가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반대 의견

정치정세가 시끄럽고 … 박해, 외지 선교본부 수석총무의 발표 … 조선 입국 시기상조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

모든 어려운 장벽들이 있었을 때 세계를 품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장벽을 제거해 나가게된다. 그들을 통해 조선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1. F. F. Ellinwood 목사

“우리가 박해를 두려워하며 눈치를 보고 기다려야 합니까? 크리스천에게 박해는 축복이 아닙니까?”

* 여호수아와 갈렙 설교



2. 프레데릭 마퀸드 : 유산 5천 달러 1884년 2월 기부

그 외 이름 없는 기증자들 : 앞다투어 헌금 … 조선 선교의 틀이 짜여져 갔다.

3. George Knox 일본 선교사의 편지 (1883)

“조선 사람들은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동경에는 일본어, 영어 그리고 각종 기술을 배우고 있는 조선 학생이 30명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편지에서 알린 바 있듯이 그 두 학생이 세례를 받았고 그 밖에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조선에서 선교사업을 서둘러 개척할 뜻은 없습니까 미션 스쿨을 설립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큰 성과를 거둘 것을 믿습니다. 목사 두 사람과 의사 한사람만 있으면 사업개척이 충분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는 의사는 신개척지와 그의 도움을 받으려는 열광적인 민중과 만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수도에 학교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수도에서 좀 떨어 진 항구에 설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년 4월에는 선교사가 조선땅에 상륙해 야만 합니다. 이 선교지를 열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세 사람만 택하여 보낼 뜻은 없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없다면 다른 교회에서라도 이 부름에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자원자를 찾아 주십시오.”

4. 미국 신앙부흥 운동 (선교운동)

미국의 신앙부흥운동 (19세기 초 ~ 1840년)

1806년 신앙동우회 (Society of brethren) “미국 회중교회 외국 선교부” 를 낳는 모체 … 최초 선교사 파송 … 1814년 침례교 외국선교회 조직, 1819년 감독파교회 … 외국 선교사업 개척. 이 불길이 신학논쟁과 노예문제 앞에서 꺼져 버렸다. 1861년 -남북전쟁 4년간 그 상처가 10여년이 걸렸다. Dwight L. Moody 부흥운동 … 다시 선교의 불길 타 올랐다.

5. 길버트 리이드 중국 선교사 편지 (1884년 4월 14일)

“나는 지금도 조선 선교지의 즉시점유를 계속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견은 일본측에서, 중국 측에서, 만주 측에서, 그리고 조선 자체로부터 얻은 실정보고에 의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나의 의견은 …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교사와 의사의 자격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나 의사는 선교를 목표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와야 합니다. 교사는 영어를 가르치기에 충분한 서적을 가지고 와야 하겠고 의사는 각종 약품과 의료기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갖추어지기만 하면 도착하는 즉시로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섣불리 일을 하다가는 의심을 사거나 멸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금년 가을까지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두 사람을 꼭 파송하여 주십시오. 한성과 또 여러 항구에는 벌써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좋지 않은 행실을 하는 사람이 있어 서양문명이나 서양사람들의 명예에 큰 손해를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서 빨리 청신하고 헌신적이며 현명하게 움직이는 기독교신자들의 참여로 제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장사꾼이 먼저 들어가고 전도가 그 뒤를 따라서야 되겠습니까? 전도를 계획한다면, 지금부터 곧 시작해야만 합니다.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또 하나님의 섭리대로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이 독일과 체결한 조약에는, 외국인만 개항장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병원사업과 영어교수는 각국인들의 환영은 물론이고 많은 본국인 들의 기대를 흡족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일 사람을 곧 파송하여 몇 달 동안 일본에 머물게 하면서 그곳에 있는 선교사들과 조선사람들과 의논하고 연구하면 여러 가지 준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재로는 선교의 근거지로서가 아니라 병원과 학교사업의 근거지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인데, 위치는 수도인 한성이 아니면 한성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의사의 봉급은 거기 있는 거류민의 치료비로 대부분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존의 결심과 선교부.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선교부에서는 다른 지원자가 없었기에 그를 “장로교파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리곤 더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존은 빨리 가기를 원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고 말했다. 본부는 일본에 머물러 정세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1884년 그는 일본에 도착하여 조선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1885년 6월 21일 한국땅에 들어 왔다.

조선을 향하여 …….

하나님의 사람들 …….

일본에는 많은 선교사가 와 있었다. 조선의 유학생을 찾아내어 그들을 전도하고 있었다.

* 이수정 : 조선의 관리, 1882년 일본에 건너왔다. 녹스 선교사와 맥클레이 선교사를 소개받고 세례를 받는다.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중심으로 조선말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1884년 존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가복음 조선어 성경은 발간되어 있었다. 존은 조선이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조선의 글자를 익히고 써볼수록 신기해서 놀랐다. 더욱 더 조선인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 뮐렌도르프 : 1848년 독일 삭소니아 태생, 할레 대학을 다닐 때부터 법률을 전공하는 한편 동양에 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뜻한 대로 청국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신임을 얻는다.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뒤에 개항, 조선이 무역전문가를 찾기 위해 청나라에 요구하자 청나라는 뮐렌도르프를 추천한다. 1882년 11월 17일 조선 왕실에 들어가 청나라 사신들과 고종을 만난다. 고종은 환대하여 외무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다 맡기고 조선에서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배려한다. 그는 조선식대로 이름을 목린덕이라 짖고 기와집에서 조선식 관복을 입고 기거하는 것, 음식까지 조선의 것을 따랐다. 조선으로 입국하는 외국사람, 특히 서양 사람이라면 조선땅 한성에 들어서는 길로 묄렌도르프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순서로 되어 있었다. 그는 알렌이 조선땅에 발을 붙이고 일할 수 있도록 튼튼한 발판이 되어준 사람임에는 틈림없었다. 헤론도 역시 그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조선땅에 들여보낸 전초병(前哨兵)이며 공병대 (工兵隊) 일원임에 틀림없었다.

* 서상륜, 존 맥킨타이어, 존 로스 :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인 존 맥킨타이어와 존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서상륜과 이응찬이라는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였다. 서상륜은 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면서 두 선교사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서상륜은 번역작업과 함께 목판(木版) 작업을 일일이 깎아내어 인쇄하는 일까지 겸하여 해냈다. 1882년 가을에 심양 문광서원 간행으로 쪽복음서를 내어놓았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와서 복음을 은밀히 전하기 시작했다. 로스 목사는 배편을 이용하여 조선으로 성경을 보급했고 그들은 묄렌도르프의 도움을 얻어 성경을 찾아 보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네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솔내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 Horace Newton Allen : 1884년 미국 북장로교교회가 드디어 그 첫 선교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Horace Newton Allen 이었다. 그는 중국땅에 먼저 보내졌던 선교사였다. 1858년 4월 23일 생이었고 존과 동갑이었다.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가 고향, 오하이오 옥스퍼드에 있는 마이애미 의과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한 뒤 1883년 졸업을 했다. 중국에 도착한 때는 1883년 10월 11일이었다. 8개월 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녔지만 동료의사들이 먼저 자리를 잡은 상태라 정착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조선에 가볼 것을 권유하는 선교사가 있었고 알고 있던 조선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Joseph Hass를 통해 병원이 시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본부로 연락을 한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으로라도 들어가겠습니다.” (1884년 6월 8일) 그 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나 한 주일 만인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에 닿았다. 그 이틀 후에는 한성땅을 밟은 것이다. 알렌은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 라는 직분을 들고 조선땅에 들어왔다. 알렌의 아내 프란시스 메신저는 조선입국을 불안해하며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혼자의 몸으로 먼저 조선에 오게된다. 묄렌도르프는 모든 일을 솔선하여 처리하려는 열성을 보여준다. 조선 왕실의 시의(侍醫)가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참으로 빠른 길이 될 거라고 하여 민영익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약속한다. 민영익 그는 누구인가? 민비의 친정 조카요, 전권대사로 미국을 다년온 있었다. 수구 보수파의 우두머리요 미국에서 고우처 목사와 캐나다 청년 게일을 만나고 어렴풋이 기독교를 알게 된다. 묄렌도르프의 제안을 민영익은 왕실에 건의 해 보지만 민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당시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만나 푸닥거리와 굿을 하고 있었다. 알렌은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때를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26일 아내를 반강제로 불러들인다. 메신저는 조선에 발을 들여놓으며 이런 불평을 한다. “정말 끔찍한 나라예요. 제물포라는 항구의 그 살벌하고 더러운 풍경이라니……. 항구에 몰려 있는 짐꾼들은 짐승 같더군요. 더러운 머리칼은 산산이 흩어져 내려와 어깨를 덮었고, 그 헐렁한 바지는 또 뭔지 … 머리를 잘라내고 바지통이라도 줄였으면 좀 간편해 보이련만 … 그들에게는 병균이 우글우글 하는 것 같았어요. 금방 쓰러질 것 같은 흙집은 겨우 짚으로 지붕을 삼고 있지 않아요 . 도대체 이렇게 하고 대대손손 이어져 왔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할 뿐이에요. 그들의 무지와 몽매를 어떻게 다루고 나가려고 당신이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한심하군요. 사람들은 왜들 그렇게 시끄럽고 , 눈에는 의심과 증오와 대적하려는 공격만이 가득하고 … 그 동안 수많은 카톨릭 신자들을 죽였고 지금도 혹시 기독교 전도를 하는가 싶어 눈에다 불을 켜고 있잖아요?” 12월 4일 알렌의 집에 문이 두드리며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 환자가 있으니 치료준비를 하랍니다.” 묄렌도르프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했을 때 민영익은 심한 출혈 끝에 빈사상태로 누워 있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었으니 우왕좌왕하는 무리가 되었을 뿐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1883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의 답례로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그의 생명을 노린 칼은 뒤통수 쪽에서 목 밑에까지 두 치 깊이로 살을 뚫고 한자 가량이나 찢어 내렸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갑신정변). 이 사건으로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을 향한 선교의 문은 열리기 시작하였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으로 십만 냥을 알렌에게 주고 알렌은 그것을 기초로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게된다. 이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사역의 기초돌을 놓게 되었다(1885년 4월 10일 조선 최초의 병원의 문이 열린 날).

고우처 목사, 맥클레이 목사, 김옥균 : 고우처 목사는 미국에서 민영익을 만나 조선 실정을 상세히 듣고 조선 선교가 시급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 그는 기부금 2천 달러와 함께 확신에 찬 편지를 감리교 외지 선교본부에 보냈다. “조선땅은 선교 개척지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큰 지장이 없다면 그들이 하는 일을 은거의 나라로 뻗쳐서 그곳 조선의 선교사업을 수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선교본부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음해 1884년 1월 재일본 감리교 선교회의 대표자인 맥클레이 목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일하고 계신 일본은 조선땅과 가까우니 조선을 직접 찾아가서 실제 답사를 한 후에 선교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은 편지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일본에서 개화파 김옥균을 만나 조선입국을 추진하게 된다. “잠에서 깨울 수 있는 건 교육뿐이라는 …….” 그의 설득과 김옥균의 나라사랑이 어우러져 이 계획은 추진되어 간다. 맥클래이 부부는 조선을 방문(1884. 6.) 청원서를 올린다. 그리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선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부터 시작할 수 있지만 궁극의 목적인 전도를 굳이 감추어 가면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은 학교개설을 대환영했고 의료사업은 절박하고도 시급한 형편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 출생, 1872년 그의 나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 뉴욕대학 입학 1880년 뉴욕대학 재학중, 뉴 브룬스위크에서 미국의 전국신학교연맹의 정식 창립을 보게 되었고 그 후 이 연맹은 해마다 신학교가 있는 곳에서 대회를 가지며 신학도들의 목표를 설정해 나갔다. 그 해 초에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들은 새로운 결의를 행동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진정한 선교부흥운동이 있어야만 되겠다. 그것은 교회에서 특히 신학생들 중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선교문제에 대하여 각 신학교 사이에 어떤 연락 통신기관이 있어야겠다.” “사역자는 금식기도일을 정하고 선교에 일생을 바치는 특별기도를 시작하자” 언더우드는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순수한 정열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선교에 있다. 선교열이 모자란다는 것은 곧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뉴 브른스위크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는 인도를 선교지로 삼고 준비하고 있었다. 회화를 할 정도로 인도말을 배웠다. 애도니람 저드슨에게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뜨거움을 느꼈다. 1883년 10월, 그는 뉴 브룬스위크 신학교의 대표로 코네티커트 주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 대회에 참석했다. 뜨겁고 아름다운 모임이었다. 각 신학교 대표로 모인 젊은이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은 거룩한 사명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의 영혼은 이를 바 없이 향기로웠다. 빛나는 눈에 뜨거운 심장은 어떠한 일이라도 감당해 내고 남음이 있으리라 믿어졌다. 언더우드도 눈물로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다. 1883년 신학교연맹대회 때 처음으로 알버트 울트만스 박사가, 조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선에 누가 복음을 들고 갈 것인가 … ?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언더우드는 동양권의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인도로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던 터여서, 누구인가 조선으로 갈 사람이 따로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권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무반응이었고 개인적으로 친구에게도 권유해 보았지만 가는 사람이 없었다.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내면에 두드렸다. “너는 왜 못가느냐 ?”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메시지였다. “그렇다 왜 나는 못가는가?”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희생을 치루었다. 인도말을 배우고 준비해 논 것을 모두 조선을 위해 포기해야 했다. 그는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요청을 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다. 그 때 뉴욕의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조선의 길은 막혀 있고 열려있는 문은 있고, 그래서 거기로 가기로 하고 편지를 봉하고 우체국에 마악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그래 조선으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이냐? 조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게 했고 “다시 선교부로 가봐라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시작하여라” 는 소리가 ……. 그는 장로교 본부가 있는 센터 스트리트 23번지를 향해 떠났다. 그는 거기에서 엘린우드 박사를 만났다. 엘린우드 목사는 역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장로교 본부 회의때 언더우드는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된다 1884년 7월 28일 !!!! 호리스 G.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본부가 임명한 최초의 선교 목사가 되었다. 임명되고도 즉각 입국이 되지 못한 상황이라 거의 다섯 달을 더 있다가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어를 배운다. 그리고 1885년 4월 역사적인 조선행 기선을 타게 된다. 미쓰비시 선박회사의 “체료 마루호” … 역사적인 배 … 그 배에는 아펜셀러 부부와 조선의 실정을 살펴보기 위해 파견된 미국 회중교회 선교본부의 테일러 박사와 스쿠더 박사도 함께였고, 마침 고종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뒤 귀국길에 올라 있던 묄렌도르프도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었다.

아펜셀러 선교사 :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 출생 .

아버지는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개혁교회 교인 어머니도 독일계 사람으로 메노나이트(Mennonite :철저한 평화주의, 무저항주의를 지키는 재세례 운동자들의 모임이다 특히 마태복음 5장 38-48까지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파 신자로서 철저하게 성서적으로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아펜셀러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때는 14세였다. 18세가 되었을 때 10월 6일 장로교 집회에서 거듭남의 체험을 한다.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신학생 대표 모임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을 위해 한 평생을 드리고 목포 앞 바다에서 조선인을 구하려다 조난을 당한 순교자! 44세의 아까운 나이로 마지막까지 목숨 바쳐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다. 부인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아펜셀러 선교사 가족은 조선땅에서 최초로 서양사람이 태어나게 한 부부다. 조선 땅에 들어 올 때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였다가 공관의 허락이 없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다 6월 20일 다시 입국하였다.

스크랜톤 (William B. Scranton) : 1856 5월 29일 출생 … 커네티커트 주 뉴 헤븐이 고향.

아펜셀러보다 두 살 위이고 언더우드보다는 3살 위이다. 뉴욕 의과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한 의사였고 1878년 예일 대학을 졸업한 스크랜톤은 그로부터 4년 동안 뉴욕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서 개업까지 하여 의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의 어머니 메리는 아들보다도 먼저 감리교 해외 여선교부의 파송을 받았다. 그 후 스크랜톤도 파송을 받았고, 에펜셀러 목사와 부인 스크랜톤 가족 3명, 모두 5명이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된다. 스크랜톤이 1885년 4월 말에 입국하고 그 후에 부인과 어머니가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1885년 2월 3일에 출발했고 만3개월만에 조선땅에 오게 되었다. 그 때가 6월 20일 !!!!!!

알리스 레베카 아펜셀러는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다. 유치원 과정을 마칠 때까지 조선땅 한양에서 자라다가 교육문제가 간단치 않아 미국으로 옮겨갔고, 1902년 4월 랭카스터 시의 쉬픈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포부와 긍지를 가지고 선교사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가슴깊이 간직했었지만 두달 후인 6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가슴 깊이 간직하였지만 두 달 후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 때 그녀의 나이 16세……. 그러나 1909년 매사추세츠 주 웨슬레아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칼럼비아 대학 사범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그는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갈 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1909년 그녀는 발걸음을 다시 한국으로 옮긴다 ……. 아버지의 영혼이 깃든 나라 한국에 들어서는 길로 그는 이화학당의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1919년 삼일운동 때에는 학생들을 격려해 가며 한국의 민족운동을 뒷받침했고 1922년 10월 미스 월터 당장의 뒤를 이어 이화학당의 6대 당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이화학당은 여자 전문학교로 성장했고 알리스 레베카 아펜셀러는 이화여자 전문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평교수로 있을 때부터 교사확장 문제를 두고 고심하며 모색하던 그는 당장 재직시 현재의 이화대학 대지를 구입했다. 당시는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로 이조 22대왕 정조를 매입하여 현재의 이화대학이 세워질 토대를 다졌던 것이다. 초대교장 재직 4년만에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의 기능을 제각기 활성화 시켰고, 1934년에 전문학교의 새교사를 기공하여 다음해 준공을 보았다.

조선은 그의 영혼의 고향이었고 이화는 그의 사랑이요 배우자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54세가 되던 1939년 그는 교장의 자리를 조선의 딸이요 후배인 김활란 박사에게 선뜻 위임했다. 그리고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선교사들을 한국땅에서 축출하는 소동이 벌어져 1940년, 재한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본국인 미국으로 일단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해방이 되자 1946년 12월 다시 돌아와 이화여자 대학교의 명예총장으로 추대되었고, 해방 직후 혼란하기만 한 여건 속에서 이화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그는 다시 교수 사역을 감당했고, 어둡고 춥고 무겁던 이 땅에 복음의 빛이 스며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 아펜셀러가 그토록 정열을 기울여 이룩하고자 했던 교육사업이 이 사회를 이만큼 밝게 열어 이토록 초롱초롱한 한국 정신의 눈동자를 볼 수 있게 하셨다 ……. 그는 감사와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우러러보며 뜨거운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설교를 다 마치기 전에 강대상 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50년 2월 20일 … 아침 … 하나님께서는 그 딸에게 넉 달 후에 쏟아질 불지옥같은 6.25를 치르게 하지 않으셨다. 그의 육신은 양화진 강언덕에 평화롭게 묻혔으나 그의 영혼은 이 땅의 고난을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서 이 땅과 이 민족을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했을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한국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녀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1885년 11월 9일 서울
1950년 2월 20일 서울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세요 …….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세요 … 미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헨리 다지 아펜셀러의 유언이다. 왜 그들은 평안한 삶을 놔두고 조선땅에서 한 줌의 흙이 되었을까.? 호주에서 온 데이비스는 남도를 전도여행 하기로 결심하고 누이를 한성에 남겨둔 채 조선어 선생 한 명과 또 한사람의 조선인 친구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충청도를 거쳐 경상남?북도를 골고루 돌아 부산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부산에 일찌감치 도착한 게일은 여유 있게 선교의 여건을 두루 살피고 있었다. 4월도 초순을 지나 중순을 바라보는 어느 비오는 날 오후 누가 게일을 찾아 왔다. 서양양반의 심부름입니다 ……. 데이비스가 보낸 쪽지였다. ‘빨리 와주세요 J H Davis’ 누더기를 덮어쓰고 있던 데이비스가 구세주를 만난 듯 눈을 번쩍 뜨며 반겼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데이비스 선교사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어떻게 아픈지 모르겠어요 그저 일어날 수가 없을 뿐이에요 무엇보다도 우선 품삯을 처리할 일이…….” 게일은 품삯을 해결하고 쓰러지는 데이비스를 안고 자기 숙소로 옮겼다. 일본인 의사를 불러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천연두라고 진단을 내렸다. 거기에다 폐렴까지 악화되고 ……. 데이비스는 조선땅에서 숨을 거뒀다. 1890년 4월 15일 … 그는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산기슭까지 운구를 했다. 그리고 산골마을 주민 두어 사람을 얻어 매장을 끝냈다. 헤론과 펜윅이 부산에 내려와 게일 선교사와 함께 남부 상황을 알아보고 5월 초순 한성에 도착했다. 선교사 가족들이 여름 날 곳을 찾아보려고 게일과 헤론은 남한산성을 돌아보았다. 조선이 말하는 삼복더위는 정말 지독한 더위가 아니던가? 한성의 공기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서 마음놓고 부글부글 썩는 것만 같았다. 온갖 병균이 나돌고 이 한여름을 피해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지혜로웠다. 스크랜톤 가족, 아펜셀러 가족, 헤론 가족, 언더우드 가족, 벙커 가족, 독신인 선교사들까지 함께 움직였다. 어렵게 남한산성에 도착한 그 다음 아침 헤론은 약속한 환자가 있다고 그 어려운 길을 다시 갔단다. 부인 헤티가 만류했지만 헤론은 사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결의가 처음부터 굳게 서 있는 사람이었다. 헤론은 남한산성과 병원을 몇 번이고 오갔다. 헤론이 쓰러졌다는 연락이 남한산성에 들렸다 .급히 스크래톤 박사가 휴가를 앞당겨 병원에 도착했다. 헤론은 쓰러져 있었다. 헤론은 자기가 이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책임감으로 무리를 했던 것이다. 스크랜톤 박사는 게일에게 남한산성에서 헤론의 가족을 대려오라고 했다. “오 그러면, … 스크랜톤 박사님 헤론의 나이 이제 서른 셋입니다. 오, 박사님 … 이건 안되는 일입니다. 이건 … 이렇게는 …….” 게일은 눈물을 흘리면서 헤론의 가족을 데리러 떠났다. “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부인을 꼭 모시고 와야 합니다. 시간이 급합니다.” 데이비스의 죽음을 3개월 전에 지켜봤던 게일 … 헤론의 부인을 데리고 한성에 도착하여 그는 또 한 분의 선교사님의 운명을 지켜봐야 했다. 헤론은 헤티의 손을 잡고 … 조선사람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복음을 전하고 눈을 감았다. 1890년 7월 26일 날씨는 가차없이 모든 것을 푹푹 썩게 했다. 조선땅에서 사망한 외국인은 제물포 근처에 묵게되어 있었다. 도성 안에 송장을 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교부에서는 조정에다 간절히 청원을 하였다. 그러나 너무 먼 장소에다 갈 수가 없어 그를 집 뒤에 뜰에 물으려고 하자 조선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고 알렌의 노력으로 지금의 양화진을 얻어 낼 수가 있었다. 헤론은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선교사로 흘러가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안장되었다.

윌리암 홀 : 부인 로제타를 서울에 둔 채 일주일 걸려 여행하는 평양길을 여려 번 오가며 평양에 집을 사고 평양 선교를 앞장서 나갔다. 밤낮으로 평양에서 환자를 돌보며 지냈다. 사랑하는 아들의 돌이 돌아왔어도 한성에 갈 수가 없었다. 부상자와 환자들이 몰려오는데 놔두고 갈 수가 없었다. 홀을 13명으로 시작했던 광성학교를 다시 열었다. 이 민족이 외세를 막아내고 제 갈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신앙 안에서 지혜를 얻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사역의 나날을 보내던 중 그는 쓰러졌다. 고열을 일으키며 앓기 시작한 것이다. 모페트 목사와 리 목사는 홀을 부축하고 대동강에서 배를 탔다. 일본 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배로 제물포까지 갈 예정이었다. 세 사람의 서양 선교사들이 옮겨 탄 배는 6백여 명의 병든 일본군인이 실려 있는 환자수송배였다. 이질 학질 장티푸스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일본군인들이었다. 겨우 제물포를 거쳐 한성에 돌아왔지만 홀은 더 심했다. 로제타는 임신 중이었다 “로제타 내가 평양에 간 것을 원망하지 마세요. 나는 평양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 로 …… 제 …… 타 …… 당신을 사랑하오 …….” 윌리엄 제임스 홀은 아내에게 두손을 맡긴 채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제임스 홀은 먼저 떠난 헤론의 무덤 옆에 묻혔다. 홀의 관위에 흙을 얹으며 몇몇 사람은 심중에다 깊은 약속을 했다. “친구여 먼저 가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을 위하여 살다가 나도 친구를 따라 가리이다.”

Henry Dodge Appenzeller (헨리 다지 아펜셀러) : 1889년 11월 6일 한양 정동에서 태어나 이 땅을 고향으로 삼은 선교사의 아들이 되었다. 1900년 열 살까지 한성땅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따라갔다. 그 길로 부모와 헤어져 고국에서 계속 교육을 받기로 하고 어린 나이에 혼자 미국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와 그렇게 해어진 아들, 헨리 다지는 아펜셀러는 2년 후 목포 앞바다에서 조난 끝에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소년 헨리 다지는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외로운 질문을 했다. “왜 44세의 젊은 나이의 아버지를 제게서 그렇게 빼앗아 가셨습니까?” 그는 더욱더 조선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조선땅을 생각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소년 아펜셀러에게 지워지지 않은 숙명이 되었다. 1907년 프랭클린 마샬 아카데미를 졸업 … 1915년 드루 신학교, 1916년 뉴욕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심으로 학문을 닦았다. 뜻을 세웠던 학업을 마치자마자, 다음해인 1917년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그 길로 아버지의 영혼이 머물러 있는 조선땅에 들어왔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인천지역에서 선교에 전념하다가 1920년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배재학교 제 4대 교장이 되었다. 그 무렵, 일본 제국주의의 기독교 탄압은 날로 기승을 부렸으나 헨리 다지 교장은 학교 발전을 위해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는 20년 동안 배재를 위하여 그의 젊음을 다 바치고 1941년 오노롤루 제일 감리교회 목사로 임명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고국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7년뿐이었다. 1948년 다시 돌아온 그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6.25를 겪으면서 기독교 세계 구제회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던 중 다음해 가을 건강이 악화되어 뉴욕 감리병원에 입원했으나 그해 1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운명하기 전에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는 한국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시오”

그는 비록 이 땅의 사람들과는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풍속이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조선땅이었고 그의 이상과 신앙과 젊음을 바친 곳이 한국이었기에 그는 코리아의 흙에 묻혀 코리아의 흙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유언을 따라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졌고 그는 양화진에 묻혔다. 코리아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나 시신조차 없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며 아펜셀러라는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세우게 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배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부부 그리고 미국회중교회 선교본부의 테일러 박사와 스쿠터 박사 등 선교사를 태운 배는 1885년 4월 2일 부산항에 이르러 하루를 정박했다. “잠깐 하선하여 조선의 땅을 밟아 보시지 않으시겠소?” 언더우드는 아내를 돌보고 있는 아펜셀러에게 조심스럽게 제의를 했다. 아펜셀러의 아내 Mary Ella 메리 엘라는 회임 중이었고 뱃멀미에 지쳐 누워 있었다. 선교사가 선교지로 파송될 때 배우자와 함께 가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홀몸이 더 유리한가에 대하여 논의될 때 선교사가 가정과 함께 파송되는 것이 나은 길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고는 하였으나 이런 경우는 참으로 민망하고 딱하다는 생각을 하며 언더우드도 아펜셀러와 함께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분 함께 다녀오세요.” 아펜셀러의 젊은 아내는 미안해하며 두사람의 하선을 권했다. 두 사람은 배에서 내렸다. 조선땅을 밟고 그들은 기도했다. 4월 3일 부산항을 떠난 배는 밤새워 뱃길을 달리고 다음날도 쉬지 않고 하루종일 조선반도의 서해안을 거쳐서 제물포를 향해 갔다. 그리고 서해안에서 다시 하룻밤 뱃길을 달린 뒤 새 아침을 맞이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 하셨네
세상 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권세 이겼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권세 이겼네”


4월 5일 부활주일인 오후 3시에 제물포 항구에 닻을 내린 것이다. 알렌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가 한 배를 타고 같은 날, 그것도 부활 주일에 조선땅에 도착한 것을 감격스럽게 생각하며 세 사람을 맞이했다. 그러나 아펜셀러 부부는 그들과 함께 한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맥클레이 박사는 감리교 선교사의 조선입국에 대하여 처음부터 미국공사관에다 도움을 요청했었고 공사관과 연락을 취하던 맥클레이 박사는 외교통로를 통하여 입국하는 것이 보장을 받는 길이라고 믿어서 장로교측 사람들, 이를테면 알렌 박사의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전임 미국 공사였던 프트의 뒤를 이어 조지 폴크가 공사가 된 후 조선은 갑신정변의 소용돌이가 아직 남아 있었고 자기 자신도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어 지레 조선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아펜셀러 부부 입국을 거절한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와 알렌은 한성을 향해 떠나고 아펜셀러 부부는 맥클레이 박사가 길을 열기로 한 공사관의 반대로 제물포에 남아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뒤를 스크랜톤이 4월에 입국 어머니와 부인을 일본에서 조선에 두고 그들을 입국시키기 위해 답사를 하게 되었고, 1885년 6월 20일 ! … 아펜셀러 목사와 부인, 스크렌톤 목사와 부인과 어머니 또한 조선에 제일 먼저 꿈을 꾸고 있었던 선교사 존 헬렌 부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조선땅에서 1885년 6월 25일 오후 8시 알렌의 집에서 첫 정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1885년 11월 9일 조선 땅세 최초로 백인이 출생한다. 최초의 선교사 자녀가 출생한 것이다. 아펜셀러의 첫 딸 ……. 그 후 스크랜톤 목사도 딸을 낳았다. 1886년 4월 25일 조선땅에서 최초로 유아세례가 있었다.

사역의 시작

* 병원 사역 : … 광혜원 병원사역은 알렌과 언더우드, 헤론, 엘러즈 여의사를 맞이하여 진료와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표가 되고 있었다.

* 이화여대 첫 학생 : 메리 스크랜톤 여사는 믿음으로 사는 여성이었다. 50이 넘어 조선땅에 선교사로 온 그녀는 남은 생애를 보람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남들 보다 더 동분서주 움직였다. 조정의 눈치보다는 사역이 중요하게 여겨져 일을 만들어 갔다. 학교를 시작 한 것이다. 큰 집을 구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학생모집은 되지 않았다. 첫 학생으로 여남은 살 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끼니가 없어 굶다가 먹여 살릴 수가 없어 보내진 아이였다.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함께 기거했다. 이 아이가 이화여대 첫 학생이다.

* 언더우드 목사는 병원에서 의사 일을 돌보며 또한 조선학생들에게 의학을 가르치는 일, 고아원 운영, 사전 편집 … (후배들을 위한 조선어 사전) 언더우드 목사는 열심히 노력하여 선교사님들 중 가장 조선말을 잘하게 되었다. 아펜셀러 선교사와 함께 북부를 전도여행 하며 황해도 솔내에 있는 교회를 둘러보고 믿는 자들을 만나기도 하며 의주, 평양에 들어간다. 1887년 9월 27일 집 사랑채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 14면 참석 선교사들과 선교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였다. 서상륜과 백홍준이 그 교회 첫 장로가 된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서상륜과도 끊이지 않고 연결하여 그를 통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 지속적으로 연결을 한다. 1888년 11월에 전도여행에서는 조선인 그리스도인을 뽑아 지방책임자로 맡겨놓았다. 평양, 의주, 장연 ……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책자도 팔면서 선교의 터를 닦아 놓았다. 학교운영 (연세 대학) 총각 선교사로 와서 후에 조선 선교사로 온 자기보다 연상인과 결혼하게 된다. 28세의 나이로 36세의 릴리아스 호튼과 결혼하여 사역의 활기를 더하게 된다. 그는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해서 북부로 떠난다. 가는 곳마다 구경 인파 ……. 그가 의주에 머물러 있을 때 세례를 받겠다고 몰려온 사람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조선엔 포교가 금지가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세례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때 34명이 세례를 받았다. 헤론과 함께 조선 예수교 문서회를 조직하여 문서선교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 아펜셀러 목사는 영어학교를 설립하여 생도들 모집했고 … 이 학교가 후에 배재학당이 되었다. 매서인(賣書人)을 두어 시골로 다니며 성경 복음서를 팔러 다니게 했고 그렇게 다니면서 전도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지고 있었다. 정동에 있는 자기 거처에서 신자들을 모아놓고 기도회를 하기 시작했다. 1887년 10월 9일 벧엘교회가 세워졌다 (후에 정동교회로 바뀜)

* 엘러즈 선생도 다섯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동여학교의 분신이 되었다.

* 서상륜 : 그는 선교사들 보다 더 많은 회심자를 만들었다. 선교사 보다 몇 배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교는 한사람의 헌신된 일군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한 번은 언더우드에게 찾아와 존 로스 목사의 소개장을 내어놓으면서 호소를 하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전도하여 입교자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목사님이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간절히 세례를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부끄럽게 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그들의 앞날을 위해 묵묵히 복음과는 상관없는 병원 사역이나 학교사업만 하고 있었다.

조선으로 …… ! 땅끝으로 …… !

조선 조성은 국립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1883년 헬리팩스를 교사로 취임시키면서 학교의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유능한 미국 청년 세 사람을 더 추천해 주기를 바랬다. 선정된 세 사람은 프린스톤 졸업생인 길모어, 벙커는 유니온신학교 졸업, 헐버트는 신학교 재학 중에 오게되었다. 조선으로 입국하게 될 때 그들은 엘러즈를 만나게 된다. 처녀 선교사의 몸으로 조선을 향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두달간의 긴 여행.....벙커는 엘러즈에게 프로포즈를 하게되고 둘은 결혼하여 한국을 위해 사역을 하게된다. 1887년 10월 31일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메타 하워드는 감리교 여선교부가 경영하게 될 부인과 병원의 여의사로 조선땅을 밟았다. 로스 와일러도 함께 들어왔다. 민비는 부인과 병원을 크게 환영하여 직접 이름을 명명하기까지 했다 … 보구여관…

James Scarth Gale :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우 출생.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온 장로였다. 터론토 대학 졸업을 한 후 YMCA를 통해 선교사로 입국한다. 그이 나이 25세 때 1888년 12월 15일 그는 전국을 다니며 코리안 스케치를 하였다.

J Henry Davis 와 그의 누님 데이비스 : 오스트레일리아 빅토이아 성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초대 조선 선교사, 32세의 젊은 선교사, … 멜버른에서 출생(1857년) 멜버른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법학공부를 더하다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졸업후 바로 누나가 선교사로 가있던 인도로가 일년반 일하는 도중 건강을 잃고 고국에 와서 초급학교를 설립하여 학교일에 열중하던 중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호소문을 읽고 조선을 향하여 떨쳐 일어난 것이다. 교단이 어려워 파송이 좌절되기도 했지만 교회 청년들이 연합하여 그를 파송한다.

Malcolm C. Fenwick : 캐나다에서 단독으로 선교를 결심하고 조선땅을 밟은 용감한 선교사 … 그는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한국땅에 들어왔다.

Samuel Austin Moffet : 1864년 인디애나 주 메디슨에서 출생한 젊은 목사는 만 26세에 조선땅을 밟았다 1890년 1월 25일 한성에 도착했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신학박사였다.

머거리트 벵겔 스크렌톤이 시작한 여성전용 병원일을 맡아보기 위하여 여의사로 조선에 입국한다.

Rosetta Sherwood : 1865년 9월 19일 뉴욕 설리번 카운티의 리버티 출생, 노멀스쿨에서 고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 1886 인도의 여의사였던 토번 선교사가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선교 도전을 받고 의과를 지망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 의료시료원을 찾아 간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William James Hall 의사를 만난다. 그는 빈민가를 찾아다니며 병이 들었어도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못하는 사람을 치료해주며 알콜 중독으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둘러메고 오기도 했다. 로제타가 메디슨 가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달 남짓하여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로제타는 상관 홀로부터 정주한 초대를 받게 되고 단 둘이 되었을 때 홀은 로제타에게 청혼을 한다. 로제타는 병이 많다고 거절하지만 홀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 로제타를 제게 허락해 주세요. 로제타를 허락해 주세요.” 그 당시 로제타는 조선의 선교사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 이유로 그녀는 청혼을 거부한다. 홀은 당시 캐나다 감리교 선교위원회에서 중국 파견을 결장했다고 연락이 온 상태였다. 그러나 홀은 끝까지 로제타를 원했다. 그녀도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는 무엇으로도 가룰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혼인을 약속하고 로제타는 조선을 향하여 들어온다. 그 후로 홀은 선교지를 로제타가 있는 조선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한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그도 조선으로 선교사로 파송 받아왔다. 그들은 결혼과 함께 평양의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MeComick., L. B. Tate., W. D. Reynolds, W. H. Junkin 는 언더우드가 잠시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왔을 때 남장로교에서 조선선교에 관해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도전을 받고 조선을 향해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교단에서는 그들을 파송할 제정이 없어서 거절했고 그들은 매일 오후 3시에 모여 기도하면서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연사로 대도시 교회를 찾아다니며 강연으로 호소하고 여러 교회 신문에다 조선선교에 관한 글을 계속 발표했다. 드디어 뉴욕에 살고 있던 언더우드 형인 존 T. 언더우드가 2만 5천 달러의 거금을 헌금했다. 선교사업 비용으로 헌금을 한 것이다. 남장로교회 외지선교위원회에서도 그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선선교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1892년 조선개척 선교사 7명을 임명했다. 테이트 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Mattie S. Tate, Lannie Davis, 레이놀즈 부부 그리고 정킨 부부였다.

* 라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어머니 …… 어머니 ……

라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조선에 도착한 지 아흐레만에 홀어머니가 별세 하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러나 눈물의 기도로 어머니를 전송했을 뿐 그 어머니를 위하여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이 어머니는 일찍 남편이 돌아가시면서 과부로서 라니를 데리고 어려운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라니도 처음엔 멕시코 선교사로 작정하고 있었지만 거긴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고 해서 라니가 조선 선교를 택하게 된 것이다. 라니가 미국을 떠나게 될 때 위독한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지체하지 말고 가거라. 그 길이 네가 갈 길인데 한시도 지체치 말아라. 떠밀다시피 하며 보낸 어머니 ……. 어머니……. 그날 조선을 향해 흘러가는 기선의 갑판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들은 양화진에 부부 합장하여 묻혀있다.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 라는 간략한 묘비와 함께 ……. 헐버트의 묘도 그 옆에 역시 나란히 …….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라는 조선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