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정보, 세상 소식/스크랩(신앙)

[스크랩] 기독교인은 자비심을 가지면 안됩니까? 김영호박사의 이야기신학

DoDuck 2006. 3. 15. 22:15

-종교교육학 박사이신 김영호목사님의 글입니다. 산돌학교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연세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였습니다. 불교 절에서 저를 불러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가르쳐 달라고 했었지요. 그 절은 요즘 라디오코리아 토요일 밤 프로그램에서 설법을 하는 법륜 스님이 있던 곳이었지요. 그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타종교에 대해 입만 뻥끗하면 목사직 박탈은 물론이고 출교까지 당하던 그런 때였답니다. 그래도 절에서 예수를 배우겠다는데, 나까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 싶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허락을 했습니다. 불자들의 청법가를 듣고, 강의를 시작하면서, “여기 교회 다니다가 절에 옮긴 사람들 손 들어 보십시오” 라고 했더니, 어른들 가운데 절반이나 손을 들었었지요. 예배당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디로 가나 했더니, 절간에 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세 주간에 걸쳐서, ‘동양의 예수, 서양의 기독교,’ ‘예수의 근본 가르침.’ ‘내가 만난 예수’를 강의했었지요. 강의를 다 끝내고, 거기 법사님과 불자들이 한 수 배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떤 보살(여자 불자)이 “예수가 이리 좋은 줄 알았으면, 예배당에 그대로 있을걸...”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답니다. 그런데 어떤 거사(남자 불자)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예수는 사랑을 가르치고, 부처는 자비를 가르쳤는데, 자비가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니까, 부처가 더 위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되물었지요. “자비가 어떻게 해서 더 큰사랑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거사가, “자비(慈悲)의 자(慈)는 사랑할 자이고, 비(悲)는 슬퍼할 비이니, 사랑하는 사랑과 슬퍼하는 사랑이 합쳐 있는 불교의 자비가 기독교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과연 그 불자의 말이 맞지요. 자비라는 말은 영어로 ‘compassion’ 인데, com 은 together 라는 뜻이고, passion 은 love 또는 suffering 이라는 뜻이니까, ‘함께 사랑’(together-love), ‘함께 고난’(together-suffering)이 합쳐진 말이지요.

저는 그 불자에게, “예수도 그 큰사랑을 가르쳤답니다” 하고는, 산상보훈에 있는 말씀을 읽어 주었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다음해에 또 그 절에 강의하러 갔었는데, 지난해에 저의 강의를 들었던 여자 불자들이 그 자리에 있어서 이렇게 물어보았지요? “예수께서 자비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까? 안 가르치셨습니까?” 그랬더니 모두들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예수께서는 자비를 가르치셨습니다” 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의 참 제자들이 여기 절간에도 있군요” 하고 말해 주었더니, 모두들 좋아했답니다.

사실, 부처가 ‘자비’에 대하여 가르치기는 했지만, 중국, 한국, 일본의 대승불교에서는 그 자비에 대한 모범을 ‘보살’(菩薩, Bodhisattva)에게서 찾고 있답니다. ‘보살’은 부처처럼 깨달음에 이르렀던 자로서, 곧바로 극락의 열반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으나, 고통 속에 머물러 있는 중생들을 바라보고서는, 혼자 극락에 들어가기보다는, 가련한 중생들과 함께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노라고 하고, 여기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는 분을 가리킨답니다. 이 얼마나 큰사랑을 보여준 보살입니까? 그래서 절에서는 이 보살의 ‘자비심’을 본받으려고 애쓰고 있지요. 여자 불자들을 “보살님” 하고 부르면서 말입니다.

저의 박사 논문에, 관음보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지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어디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산꼭대기에 작은 관음불당 하나가 있었다. 그 마을에는 한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내 되는 사람은 처녀 때부터 온갖 정성을 다하여 관음을 믿어 왔던 사람이었다. 집안 일들을 다 끝낸 후, 그녀는 매일 밤 그 불당을 찾아가 불상 앞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나가는 이유를 몰랐었는데, 매일 밤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아내에게 의심을 품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결국 그의 아내에 대한 인내심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길가의 어두운 숲 속에 숨어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여느 때와 같은 그 시간에 아내가 돌아오고 있었다. 남편은 그녀가 가까이 오기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녀의 어깨를 정확하게 겨냥하여, 단숨에 칼을 내리쳤다. 그 순간 그 아내는 온몸의 피가 갑자기 차가워짐을 느꼈다.
그 남편은 칼에 묻은 피를 닦고는 칼을 칼집에 도로 넣었다. 그는 집에 당도하자, 칼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한 그의 아내가 집에 있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그는 경이롭게 생각하고는, 칼로 아내를 내리쳤던 그곳으로 다시 가 보았다. 그런데 그 땅바닥에는 핏자국들이 아주 선명하게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 집에까지 온 그는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러 저러한 장소에서 이러 저러한 시각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았소?’ 그러자 그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무엇인가가 내 피를 차갑게 만드는 것을 느끼었소’ 하고 대답했다. 그 남편은 일어났던 모든 일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일찍 일어나서, 그의 집 대문에서부터 꼭대기에 있는 불당에까지 핏자국이 계속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와 했다. 그가 관음불상을 쳐다보았을 때,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는데, 전날 밤 그의 아내에게 내리쳤던 바로 그 어깨와 동일한 관음불상의 어깨에 칼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전설이지만, 감동적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께서도 이러한 자비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아는지요?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마태 9:36) 영어성경에는 “He had compassion for them.”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심을 가지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 번역한 천주교 성경에는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라고 했습니다. ‘자비심’은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랍니다.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믿음만’을 가져야 하니까, ‘자비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까? ‘자비심’은 불교신자들이나 가지는 것이니까, 우리들이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배부른 큰 교회 목사님들은 오늘도 굶고 있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을 모른척하는 겁니까? 그래서 부자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가난한 기독교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까? ‘자비심’을 가지셨던 예수께서는 더 이상 한국교회에는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2006. 3. 13 / 김영호박사

출처 : 평화를 만드는 교회
글쓴이 : 김동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