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또는 일기, 편지/나의 신앙고백

어느 종교다원주의자의 신앙고백(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고찰) ②

DoDuck 2006. 2. 6. 03:30
   상대방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확인된 경우 나는 상대방의 생각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느라 골몰할 수도 있고, 내 생각에 어디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곰곰이 되새겨볼 수도 있다. “너는 너대로 생각해라 나는 나대로 생각한다”는 식으로 더 이상의 대화를 중단할 수도 있다. 앞의 두 가지는 보다 더 옳은 생각을 찾아 나가고자 노력하는 경우다. 그러나 뒤의 한 가지는 대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설득과 반성과 대화의 포기, 이 셋 중에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나는 반성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오랜 동안 설득의 자세를 먼저 취해 왔다. 물론 가장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대화의 포기이다.

  그러나 대화의 포기가 최악의 선택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화를 포기하기까지는 상당 기간 앞의 두 가지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보다 더 옳은 생각을 찾아나가려 이모저모 생각을 굴리다가 한계에 부딪칠 때, 상대방에 대한 설득도 안 되고 내 생각도 바꾸고 싶지 않을 때, 대화를 포기하는 순서로 발전하는 것이다. 대화를 포기하는 것은 많은 대화를 거치고 난 후의 일일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 대화의 포기가 차라리 더 훌륭한 선택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대화의 포기보다 더 나쁜 선택은 전쟁이다. 강압이다. 설득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설득이 아닌 강제로 진행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성적인 설득 능력이 부족해지면 곧잘 엉뚱한 권위에 의존하여 상대방을 핍박하게 된다. 다수의 권위, 연륜의 권위, 사회적 지위의 권위 등등이 자주 동원된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 또는 상대방도 비슷한 권위를 가지고 맞서게 되면, 이제 그 대화는 토론이 아닌 논쟁으로 발전하고, 논쟁은 말 그대로 싸움이 되기도 한다.

  내가 종교다원주의자를 자처하게 된 까닭은 종교상의 차이로 인해 이런 싸움을 자주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국제적으로 종교분쟁을 겪고 있는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으로도 가히 종교백화점이라고 할 만한 가족사를 겪으면서 차라리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식의 해결방법에 안주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종교다원주의적인 태도가 종교간의 대화를 포기하고자 하는 태도는 아니다. 오히려 종교간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를 높이고 자신의 신앙을 한 차원 더 높이 승화시켜가고자 노력한다. 내가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은 분쟁보다는 차라리 서로 상관하지 않고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것뿐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를 경우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반성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잘못된 점은 없는가 부터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설득이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나는 불변이면서 상대방의 변화만을 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인가?

  나는 한 때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교직을 선택하였고, 같은 생각을 가진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갈망하다 전교조활동도 열심히 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정작 변해야 할 사람은 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고,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이치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근 어느 목사님이 전해 준 묵상자료에 들어있던 다음 이야기를 읽으며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까 놀란 적이 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었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켜야겠다고 꿈꿨다. 좀더 나이가 들고 조그만 지혜를 얻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 나라를 변화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들을 변화시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러나 내 가족 중 아무도 달라진 사람은 없었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내 나라도 좀더 좋은 나라로 바뀔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또 누가 아는가, 이 세상까지도 더 좋은 세상으로 변했을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의 한 신부 묘지에 적혀 있는 글이라는데, 나는 그분보다 약간 더 일찍 깨달았으니 다행이랄까. 하지만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가끔 한심함을 느낀다.


  생각이 다를 경우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반성이지만 실제로는 설득을 하려고 골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쩌면 지금 이 글도 나의 고백, 나의 반성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사실상 누군가를 향한 설득의 냄새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절대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 거의 맹신에 가까운 신앙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골몰할 뿐, 다른 종교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의 신앙을 반성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자이며 예수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으니 다른 종교를 백안시할 수밖에.

  그러나 절대자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누가 가르쳐주었는가? 하나님은 무엇이고, 여호와는 무엇인가? 하느님이 옳은가, 하나님이 옳은가? 이 글의 부제로 삼은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은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분의 이름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다른 종교인들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종교적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진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인들에게 나의 기독교 신앙을 자랑하고 설득하고 싶다. 전도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흔히 원시신앙이라고 알려진 수준의 종교적 관념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가르칠 것인가? 중국 사람들에게 성경을 번역하여 전해줄 때에 하느님을 어떤 말로 설명하고,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나갈 때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나는 무신론자인 나의 형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득의 말을 쏟아놓고자 한다. 형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실 설득이란 애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설득이 대화의 포기보다 나은 점은 이것이다. 안타까움과 실망과 분노의 감정이 쌓여나가더라도 오래 참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설득해 나갈 수 있는 힘은 교리상의 강요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지만,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원수지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원수처럼 보이는 그 사람도 사실은 내가 사랑해야 할 한 형제자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때 원한이 사라지고 내 마음에 사랑을 채울 수 있다.

  아무튼 이제 무신론자를 향한 설득에 들어가도록 하자. 절대로 무신론을 수용할 수 없는 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