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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묵상]141010「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자」

DoDuck 2014. 10. 10. 03:50

[날마다 묵상]141010「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자」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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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이해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뒤를 생략하고 이 말씀만 잘라다가 이렇게 바꾸고 있지 않는지요?

"가난한 자들은 으레 있기 마련이고, 몇 푼 적선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지. 난 더욱 중요한 일을 해야 해!"

하나님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이 줄곧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희년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도 실천된 적이 거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만, 희년의 정신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예수님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당신을 동일시하셨을까요?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 적선하는 것으로 우리의 할 일을 다한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욕망은 끊임없이 빈부의 격차를 만들어 내겠지만, 우리는 주기적으로 희년의 실천을 통해서 다시 균등한 출발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가난해져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고통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아니라 누가복음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진정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받기를 소원했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려 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아시스의 성자 프란치스코처럼.
하늘나라의 목표는 경제성장이나 향락이 아니라 복지와 정의, 곧 평화(平和:고루 나누어 먹는 일, 아무도 소외되지 않은 잔치)에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당신의 죽음을 깊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하소연이었다는 것을 깊이 마음에 새깁니다. 
주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깊이 묵상하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주님 이후 순교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분들의 고통, 이 시대 또 다시 죄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주검위에 지금껏 모아 온 향유를 들이붓습니다.
세월호 304명의 주검 위에 향유를 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