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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운동가 김흥겸 (네이버블로그 "무너지는 강철제국"에서 옮김)

DoDuck 2014. 8. 10. 06:20

아래의 글들은 http://dohwasun.blog.me/80036185730 에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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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 민가 | 2006/05/22 (월) 09:39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뭍혀 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민중의 아버지 - 김흥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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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 깊은 곳에는 이 노래를 몸서리치게 떠올리는 사건 하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89년 겨울이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그야말로 병풍처럼 늘어선 성북구 돈암동... 하지만 그때는 그 꼭대기에서 수백 가구의 철거민들이 철거 투쟁을 진행하고 있었지요. 몇 번 학교에 찾아오기도 하고 두어 번 술도 같이 먹어서 그 목소리와 얼굴이 익은 철거민 대표분이 계셨습니다. 아마 고 김흥겸씨와 비슷한 연배이셨을 텐데, 어느날 갑자기 학교로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지요. 처음에는 그저 돌아가셨다고 해서 사고라도 났나.. 하고 있었는데 다음에 온 소식은 우리를 소스라치게 했습니다. 술취해 행패를 부리던 철거 깡패의 칼에 찔렸다는 겁니다. 며칠 후 돈암동 꼭대기에서는 그 분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거기에 저를 포함한 동료들은 기타와 신디사이저 매고 낑낑대면서 돈암동 꼭대기로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대로변의 상가와 고만고만한 집들을 지나니 갑자기 드넓은 마당과 높다란 벽들을 자랑하는 대갓집들이 나타납니다. 바로 윗동네에서는 사람이 칼로 찔려 죽고 한 달이 멀다 하고 철거깡패와 필사적인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아랫 동네의 으리으리한 집들은 참으로 온화한 구름에 휩싸인 것처럼 조용했습니다. 그 동네 골목을 어리둥절해서 통과하는 저희들을 보고 한 화사한 옷의 아주머니가 이렇게 뇌까리면서 지나갔습니다. "어휴 또 깽깽거리러 가네." 그 골목들을 헤치고 꼭대기에 올라서니 거긴 또 별천지였습니다. 붉은 페인트로 번호 매겨진 채 버려지거나, 번호를 붙였으되 아직은 빨래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집들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반파된 어떤 집 안에서는 밥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운 한라산 나무 분포 같다고.... 아래는 열대림 그다음 활엽수림 그리고는 침엽수림 그다음 관목들이 듬성듬성난 황량한 지역.....영정에 분향하고 노래 몇 곡 부른 다음 동네를 돌아보면서 올라오면서 보았던 반파된 집 안을 슬쩍 들여다 봤습니다. 거기선 여대생 한 명이 아이들 두 명과 놀고 있었습니다. 아니 노는 건 아니었지요. 그때 여대생은 울고 있었으니까요. 살림살이라고는 별로 없는 좁은 방안이 무너져라 뛰노는 아이들의 장난질을 어렵게 받아 주면서 철철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혀짤린 하나님 말입니다. 하나님...당신은 죽어 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눈이 시큰거려서 돌아서서 언덕을 오르려는데 사수대로 와 있던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괜시리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 여학생은 누구야? 저 애들은?" "성신여대 철거민 지원팀 학생. 그리고 돌아가신 분 아들들..." (출처:김흥겸: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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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버지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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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겸


1961년 3월 23일 서울 생 -아버지 김영윤과 어머니 탁순애의 아들로 북 아현동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이후 충북대 불문과 교수로 은퇴하고 어머니는 교사로 근무함 / 1968년(7세) 경희대 부속 사립 초등학교 입학. 야구부 입단, 강도 놓은 훈련과 또래 집단 활동을 통해 조직과 단결, 협력, 공동체 의식을 배움 / 1974년(13세) 대광중학교 입학. 김형배, 이승엽 등의 친구를 만남. 청량리 588 골목에서 창녀들의 거주 형태와 삶의 양식을 훔쳐보면서, '전과자의 형','창녀들의 아버지'로 살아가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함 / 1977년(16세) 경신고등학교 입학, 획일적인 고등학교 교육을 암흑기로 표현함. 1980년(19세) 재수, 서대문 재수 학원가에서 1980년대 서울의 봄을 목도함.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을 간접 경험하면서 실존적인 질문을 시작함. 이때부터 1985년까지 '김형'(金螢)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그렇게 불러 주기를 친구들에게 당부하곤 함. 반딧불[螢]처럼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함. 1981년(20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입학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기소개 시간에 "교도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다. 1학기 교양국어 시간에 시인 김수영의 [풀]을 발표하고, 존재론적 항거에대해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함. 당시 집에 놀러 가면 글을 써서 철사에 끼워 놓곤 함. 1982년(22세) 4월경~1983년 3월경 파주 백석교회 교육전도사. 말씀 인도와 수양회 인도. 그리고 문학회 밤 때 전체 레크레이션 등을 담당. 1983년 초겨울인지... 폭설이 내리는 교회 옆 공터에서 눈 맞으며 밤새 울부짖으며 기도함 / 1982년(22세) 가을 축제 때 '예똘' 그룹(김흥겸, 박문수, 권봉성, 김응교)을 결성하여, 제1회 전국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기독교방송국 주최)에서 대상 받음 / 1983년 5월 축제 노래 경연대회 때 연세대 대극장에서 [민중의 아버지]를 부르지만, 심사위원의 주목받지 못함 / 1983년 5월(23세) 축제 기간에 종교극회의 거리극 [누가 예수를]에서 예수 역할을 맡음. 이 극을 계기로 [민중의 아버지]가 알려지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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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를' 공연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시도였다. 그리고 겸이는 예수로 그 자리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 작품에 동원되었던가? 나는 로마군의 인솔장교로 독수리 상 앞(겟세마네)에서 연행된 예수를 끌고 다니며, 군중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문 앞에서 그를 채찍질할 때부터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왜 나는 하필 그를 채찍질하는 일을 맡았을까?) 몇몇 여학생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골고다를 향한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되고자 자원했는지, 그들을 밀쳐내느라 힘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자연스레 무리들은 시위대열로 변하고 있었고, 그대로 가면 우리는 시위의 주모자가 될 판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는 제자들처럼, 겸이를 강제하여 그곳을 빠져나왔다. - 전진택 목사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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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낙골교회 담임 교육 전도사 / 1985년 8월(24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업 전에 최형묵, 김은규, 정혁현, 박병철, 김경희 등과 민중신학을 공부하다 / 1986년 3월(25세) 낙골교회 담임 교육 전도사 사임 / 1986년 4월 ~8월 독산동 프레스공으로 일하다 해고됨 / 1986~1991년 서울시 철거민 협의회(서철협) 연대사업부 차장, 서철협 사무국장 역임, 전빈련 연대사업국 차장, 상연합회 활동 / 1989년(28세) 가을 남대문경찰서에서 최광식(서철협) 등과 함께 취조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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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협 회장단은 물론 상근자(해파리 포함) 활동비는 엄두도 못냈다. 나는 해파리가 양말 신은 걸 본적이 없다. 때로는 서철협 사무실에서 때로는 지역 현장에서, 예수가 말밥통에서 잠자듯이 난장꿀림하느라 빨아 신을 시간도 없었겠지만 무슨 수로 양말을 사 신을 수 있었으랴? 운이 좋은 날은 지역 자매 형제들이 밥을 챙겨 주었겠지만 ㅡ 해팔아! 미안허다.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따뜻한 밥 한끼라도 먹여 보내는 건데...ㅡ 그렇지 못할 때는 낙골 시절부터 굶고 개겼으니 그 몸이 성할 수 있었겠는가? 해파리는 그렇게 가난한 이웃을 대신하여, 싸우고, 굶주리고, 병을 얻어, 죽었다. 얼마 전에 세운상가 아래서 노점상하시다가 시방은 전국연합을 이끌고 계시는 노수희 형님과 소줏잔을 기울이다가 해파리 그 녀석은 먹지 못해서 병이 생겨 죽었을거라 이바구 나누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 선배 최광식(서철협) 선생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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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30세) 12일 명동 YWCA에서 한지원과 결혼식을 거행하다. 뒷풀이는 김응교 노래 진행, 민주대머리 박철민 사회로 진행 / 1991년 한달 간 돼지고기 공장에서 1일 4시간 월 40만원 받고 일함 / 1991년 10월~1993년 7월 영등포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다 / 1991년 6월 26일 연행됨, 신대방동 철거 저지 중 투옥 3개월간 옥살이 / 1992년 2월 27일(31세) 딸 김 봄 출생 / 1992년 6월호부터 12월호까지 월간[살림]에 6개월간 산문 연재 / 1991~1994년 전농과 연대 농산물 직거래 사업단 추진 / 1993년(32세) 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청년공동체 '한겨레 농산'에서 일하다 / 1993년경부터 한살림교회(친구 정혁현 목사)에 1994년까지 다님 / 1994~1995년 극단 현장 배우로 공연 / 1995년(33세) 민중가수 류금신 1집 음반 [희망] 앨범을 준비하는 중 위암 말기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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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협을 정리하고 같이 배추장사 하다가 문득 발견한 암이었다. 사당의원(아직 서철협 이름으로 외상값이 천만 원은 넘게 있을 거다) 김종구 박사의 암선고를 듣고 우리는 같이 병원을 나와 서로 다른 곳을 물끄러미 보면서 담배를 한 개씩 피워 물었다. 5월의 아지랭이와 함께 허공으로 흩날리는 담배연기만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해철이가 말했다. "에이 씨팔! 내 인생이 이렇게 좇같이 끝날 줄 알았어" - 친구 박정섭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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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발병-위암으로 수술 / 1995년 5월 19일 [병상일지.2] 집필 시작 / 1996년(35세) 재발 / 1996년 7월 4일 [병상 일지.1] 집필 시작 / 1996년 11월 오충일 목사님 인도로 세브란스 병원 채플실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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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오래 동안 인연을 맺어왔던 오충일 목사님이 “흥겸이 죽은 다음에 장례식에 모여서 아쉬워 말고, 흥겸이가 아직 살아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것은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휠체어에 몸을 담고 엷은 미소를 머금고 흥겸이는 벗들의 얼굴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힘내라, 좋아질 거야, 언제 함께 놀러가야지~” 덕담을 나누며 짧은 모임은 끝났다. 3개월 뒤, 바튼 기침 같은 모진 바람이 불던 겨울, 고단한 육신을 누이고 벗은 영영 우리 곁을 서둘러 떠났다. -김기돈 목사,[특별한 배웅],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5년 1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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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친구들을 중심으로 [김흥겸을 위한 일일찻집] 등 모금운동 시작 / 1997년(36세) 1월 21일 2년 여의 투병 생활 끝에 숨을 거두다. 서른 여섯살. 여러 편의 산문과 시. 그리고 [민중의 아버지], [노란 싹], [빈민의 함성],[전빈협 찬가], [노점 해방가], [아직은 아냐] 등 여덟 편의 노래를 남김. -출처:네이버 "민중의 아버지 / 김흥겸" 검색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