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아버지
詩: 김흥겸 (1961-1997)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Father of the Lowly
- By Kim Hung-Gyum
Respond to us, O God whose tongue is cut,
Hear our prayers, O God whose ears are stopped,
God, you turn away your burned face from us,
And yet you are my only one, my dear old father.
O God, are you dead?
O God, are you in the dark weeping under a back street shadow?
Or are you thrown away like refuse in a dump?
Oh, my poor God.
God, you turn away your burned face from us,
And yet you are my only God, father of the lowly.
(영역- 주낙현 신부)
민중의 아버지- 김흥겸 시와 곡, 안치환 노래
민중의 아버지 - 정세현(범능 스님) 노래
늙으신 아버지
- 김 흥 겸
학장이 오라고 했다.
그래, 차라리 해프닝이라고 하자. 그 기도 해프닝 이후 연세대 신과대학 예배 시간에 3학년들이 학번 순서로 대표 기도를 하던 관례는 없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학번 순이 아니라 학점 순에 따라서, 또 그 중에서도 기도하는 법을 알 만한 학생을 학생과에서 선정해서 결정했다.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로 끝나는 <군중의 함성>을 부른 후, 그는 계속해서 노래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그 해는 1983년이었다. 이 노래에서 나오는 노래들은 1980년에 광주 민중을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악의 무리들이 제5공화국의 흡혈귀 같은 얼굴을 드러내고, 수백 명의 사복 경찰과 페퍼포그를 캠퍼스 잔디 위에 깔아놓고 학원에서마저 압제의 아성을 드높인,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한 줄 한줄 풀어져 나온 것이다.
땀 흘리시며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노동하신 건강한 아버지, 울부짖는 히브리 민중들과 함께 히브리 민중 해방과 민족 해방을 위해 이집트 제국주의와 직접 열 가지 재앙이란 폭력 투쟁을 전개하며 지도하신 아버지, 예언자들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반민중적, 반민족적 무리들에 대한 과감한 선전, 선동 활동을 펼치도록 명하신 아버지, 그랬던 아버지는 늙으셨다. 아주 늙어 버리셨다.
대답 없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 야훼는 이미 당신의 모든 뜻을 기록했던 성서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자신의 뜻을 밝히고, 또 밝히셨다. 성서를 읽다 보면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고, 반복하셨다. 그렇다. 늙으신 아버지를 우리가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며 그 뜻을 실현해 가야 한다.
그렇게 모든 신학생을 대표하여 올린 기도 이후로 더욱 늙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가깝게 다가왔다. '해달라, 해주세요, 뭐했냐?' 라는 어린아이 같은 기도는 큰 의미가 없어졌다.
"주의 성령이 임하사 우리를 부르시어
감히 <주기도문>이라 제목을 붙였다. 이 노래를, 이 고백을 읊조리며 울대 높여 부르면서 이제 그 신학생은 신학생이 아니었고, 낙골 공동체의 꾸부정한 전도사가 아니었다. 오늘도 새벽이면 일어나 아들을 주님의 종으로 써 달라고 기도하시는 한 어머니에게 그 아들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만 같다.
너무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수고하시다
『살림』47호(1992. 10)
출처 :길벗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영원한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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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버지
- 1980년대 절망과 탄식의 역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1
"하느님, 이제는 당신이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그랬다. 1983년 어느 날 연세대 신과대 채플에서 기도를 맡았던 그 친구의 일성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민중의 아버지'로 알려진 노래를 만들었던 친구 김흥겸은 그 거룩한 신학생들만의 예배시간에 그렇게 기도문을 열었다. 위엄을 갖춘 선생님들과 순진한 학생들은 모두 경악을 했고, 그 날 예배 설교는 기억 못해도 그 기도만큼은 기억하게 되었다. 10년쯤 지난 훗날 그 친구는 그 때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기도를 재현해놓았다(『살림』1992.10). 세월이 지나 제법 다듬어져 있는데 그 때 그 충격을 다시 회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 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냐고요? 학교를 보세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은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 것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 우리를 시키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보라니까요.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의 실패작인 우리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당신, 바로 당신 야훼 하느님입니다. ...
그래요 우리는 사실 당신의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 예수처럼 살다 그렇게 죽기 위해 있는 게 아니예요. 사실은 이렇게 예수의 처참한 죽음을 예배드리며 팔아먹기 위해, 또 예수의 그 고통스런 삶과 당신의 이야기를 강의하며 팔아먹고 살기 위한 무리들이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신앙을, 신학을 선택한 것뿐이라고요. 그래도 고맙지요. 당신과 예수가 있어서 그것으로 여러 사람이 2천년 동안 먹고 살게 해주시니. ...
불쌍한 하느님, 우리 같은 것을 앞세워 하느님나라를 만들겠다는 하느님, 당신이 그래도 절 사랑한다면 이 길을 가다가 변절하기 직전에 죽여주소서. 당신에게 간구하는 당신의 사람은 이 길을 가다 지쳐 쓰러져 돌아서려 할 때, 그 직전에 죽여주는 잔인한 축복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사랑하셔서 당신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는 분명히 "아멘"을 했지만, 회중 사이에서는 그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다음부터 연세대 신과대 예배에서는 3학년 학생 가운데서 이름 순서대로 기도를 맡는 일이 사라졌다. 대신에 '착한' 학생들만이 선발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젊은이로 1980년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무슨 구구한 해명이 필요할까? 그의 기도는 그 가혹하고 잔인한 시대에 대한 항변이자, 그 상황 가운데서 한없이 절망했던 이들의 탄식이었다. 1980년 '광주' 직후 시대의 아픔을 절감하고 울분을 토로했던 이들이 그뿐이었을까마는,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그 친구는 그렇게 사고를 쳤다.
그 기도 탓이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빈민운동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살던 그 친구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7년 1월 서른 여섯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혼돈의 1990년대 그렇게 변절의 위기를 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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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입학을 해서 처음 그 친구를 만났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다. 큰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때로는 기괴한 인상을 풍기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인상이 주목을 끌었으나, 점차 알고 보니 이 친구 아주 물건이었다. 풍기는 인상만큼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갖고 있었다. 낙서인지 시인지 종이만 있으면 끄적거리기를 즐겼고, 악기들도 제법 다루고 혼자서 자주 흥얼거리기도 했다. 소곤소곤 말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포효를 할 때도 있었다. 철없이 해해거리기도 하고 하늘을 끌어내릴 것 같은 기세로 무겁게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 내 한 몸 추스리기에 급급했던 나로서는 견적을 내기가 어려운 인간이었다.
그처럼 기괴하지는 않지만 재기 발랄한 친구들끼리 어울렸다. 지금 가톨릭의 평신도 신학자 박문수, 와세다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시인 김응교, 영화에 빠진 목사 정혁현 등과 어울리며 신과대 안의 서클 종교극회 활동을 했다. 당시 나 같은 '정통파'가 보기에는 '리버럴한 딴따라'들이었지만, 그 친구들을 만나면 비로소 숨을 쉬는 같아 함께 절친하게 어울렸다. 그 가운데 김흥겸 김응교 박문수 셋은 주말만 되면 파주의 작은 교회에 함께 나다녔다. 가난한 동네 작은 교회에 세 신학생들이 봉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김흥겸은 그 교회를 그만두고 신림동 난곡의 낙골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1980년대 초반 대학가는 아주 치열했다. 공부하고 싸우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울고 웃고... 신학생이었던 우리들은 한 가지 더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그 자리에서 어깨 걸고 울부짖듯 기도까지 했다. 그 때 우리들만의 노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지금 '민중의 아버지'로 알져진 그 노래였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민중의] 아버지 //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김흥겸이 파주의 가난한 동네를 오가면서부터 혼자서 흥얼거렸던 노래였다. 혼자서 흥얼거리던 그 노래가 어느 순간 우리들의 노래가 되었다. 한동안은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노래였다.
그 노래가 만천하에 알려질 기회가 생겼다. 1982년 학교 축제의 창작노래경연대회였다. 흥겸이는 학교 대강당에서 그 긴 다리로 서서 혼자 피아노 반주를 하며 그 노래를 불렀다. 결과는 참담했다. 입상권에 전혀 근접하지 못했다. 의미심장한 노랫말에도 불구하고 김흥겸의 가창력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잊혀질 뻔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다시 알려질 기회가 있었다. 바로 그 5월 축제 대미를 장식할 대단한 이벤트가 하나 예정되어 있었다. 급진적이고 재기 발랄한 친구들이 와글거리던 종교극회는, 얌전하고 교양있는 공연 대신에 놀랄 만한 기획을 하였다. 작은 실내 극장을 벗어나 온 캠퍼스를 무대로 하는 공연을 준비했다. "누가 예수를?" 김흥겸이 주인공을 맡고 신과대 학생 태반이 출연하는 가운데 예수의 체포와 재판과정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온 캠퍼스를 무대로 재연해내기로 했다. 그렇게 재연된 무대는 그야말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1세기의 예루살렘과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1982년 5월 서울이 겹쳐 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가죽 장갑을 낀 사복경찰에게 체포되어 검은 승용차에 실려간 예수는 도서관 앞 유대법정을 지나 교문 앞 로마법정에 이르렀다. 그것은 의도된 연출이었다. 극중 배역상 로마군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짜' 로마군인들의 출동을 의도했고 그 의도는 적중했다. 로마의 '서대문 군단'(서대문경찰서 시위진압 경찰)이 총출동해 갑옷과 투구를 입고 예수의 재판장에서 무력시위를 했다. 수천 명의 군중이 예수의 행렬을 따랐고 로마법정에서는 군중들도 흥분했다. "로마총독 물러가라!" "학살원흉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가 외쳐지는 가운데 재판이 진행되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 예수의 행렬은 대운동장 옆 언덕 골고다로 향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시종일관 행렬을 따르던 합창단은 해가 넘어가자 횃불을 들었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는 순간 합창단은 한 목소리로 낯선 노래를 불렀다. 바로 '민중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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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장관을 다들 기억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 노래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노래는 처음부터 악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종 노래 책에 구전가요로 전해진 사연도 그 때문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흥얼거리던 그 친구는 악보를 만드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는데도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익혀지는 대로 불렀다. 그렇게 김흥겸이 혼자 부르던 노래에서 우리들의 노래로 불려지면서 노래에 간단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가사의 한 대목이 바뀌었다. 전편을 부르고 되돌아가 앞의 두 소절을 다시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이 노래 가사의 마지막 구절은 '늙으신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김흥겸이 처음에 그 노래에 붙인 제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울산에서 씩씩하게 노동운동을 하는 1년 후배 이종호가 그 대목을 다시 부르면서 마무리할 때 '민중의 아버지'라고 고쳐 부르자고 한 것이다. 김흥겸은 그 순간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제주도서 올라왔다는 후배, 광주 항쟁과 학살보다 먼저인 4.3 제주 민중 항쟁의 뿌리를 곱씹으며, 누가 보아도 기독인이 아니고 신학생도 아닌 그 무지막지한 녀석의 한마디에 맥없이 동의했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변모 이후에도 그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만 더디게 퍼져나갔다. 악보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만천하가 알다시피 나는 거의 음치에 가깝지만, 그 노래만큼은 비교적 잘 불렀다. 물론 그 잘 불렀다는 것은 화성학적으로 격을 갖추었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노래만큼은 우리들의 노래라고 생각했고 그 절절한 탄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불렀다는 점에서 그렇다. 형편없는 노래 솜씨지만 내 입도 그 노래의 전파에 한 몫을 했다. 1983년 여름 그 노래를 전국적으로 퍼뜨릴 기회가 생겼다. 기독교장로회 청년대회(기청대회)였다. 요즘에는 청년들이 모이는 것이 신통치 않지만 그 때는 모였다 하면 천 명이었다. 그때는 각 교단별로 청년대회를 열었는데, 단연 기청이 가장 활발했다. 전국 각처 교회에서 모인 청년학생들의 축제였던 기청대회는 학생운동의 주요 이슈와 청년문화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대회에 그 노래를 잘 부르는 두 신학생이 참여했다. 나, 그리고 비교적 노래를 잘 부르는 1년 후배 김보한이었다. 이 대회를 통해 그 노래를 제법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꼭 그 덕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고 얼마 후에 나는 처음으로 그 노래 악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노래책을 지금 찾아보니 안 보여 애석하지만, 고려대 노래팀에서 발간한 노래책으로 기억한다. 그 노래 책에 '구전가요'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후에 여러 노래책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책마다 제목이 제 각각이었다. '혀짤린 하나님', '늙으신 아버지',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민중의 아버지' 등 제 각각이었다. 노래를 만든 이에 대한 표기도 '구전' '작자 미상' 등으로 전해지다, 소문에 소문이 이어진 탓인지 어느 순간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름도 두 가지였다. 김흥겸이 빈민운동을 하면서 김해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던 탓이었다. '철거민 해방'을 뜻한다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노래가 '민중의 아버지'로, 그리고 그 작자가 '김흥겸'으로 확인되었을 즈음에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종종 부른다. 술집이나 거리가 아닌 교회에서 80년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교우들과 함께 부른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옛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교우들과 함께 『욥기』를 공부하면서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의 아버지'는 영락없는 욥기의 압축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1980년대 한국판 욥기인 셈이다. 성서연구에 열심히 참여하는 한 교우가 어느 날 욥 노래를 발견했다며 음반을 가져 왔다. 유명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음반에 실린 '욥'(Job)이었다. 로드리게스의 독특한 창법으로 전해지는 욥의 절절한 심정을 느끼며 그 노래도 심심치않게 듣는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그 포르투갈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 가사를 번역해준다면 '민중의 아버지'와 한번 비교를 해보고 싶다.* (050724)
고광헌의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이라는 시를 읽어 보자.
더러는 일당을 손에 쥐고
더러는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빈 손 가득
솟구치는 노여움 퍼쥐고 돌아오는 밤
더 이상 뿌리 내릴 곳 없어
막막한 그리움
낮게 엉겨 붙은 산비탈 무허가 모퉁이
무성하게 널려 자란 잡초밭 위에
어쩌다 궂은비라도 쏟아지는 밤이면
눈물겨운 사람들
튕겨 오르는 흙탕물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비포장도로 양 옆
값싼 우산의 행렬로
값비싼 마음들을 기다리는
끈끈한 사랑의 도열을 보았는가
팍팍한 가슴
시퍼렇게 타오르는 칸델라 불빛 밑에
가난처럼 설익은 과일 몇 알,
단칸방 여섯 식구의 누런 웃음을 담아
못난 마누라
마른버짐 가득한 꿈꾸는 눈동자를 찾는
못난 시대 풋풋한 희망을 보았는가
젖어가는 세상
늦은 저녁 빗줄기 사이로
저 아래 평지의 불빛 몸살 나게 반짝이고,
그렇다
바라는 건 다만
하루하루의 일자리나 더 이상 쫓겨 갈 수 없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아니라
그대의 질긴 노동의 불빛이
몸살 나 뒤척이는 땅
정직하게 갈아 뉘는 것이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 관악구 신림 7동. 이곳은 몇 해 전만 해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이곳의 본래 지명은 낙골이다. 공동묘지를 밀어 버린 시유지에, 1960년대 말 청계천 주변에서 철거된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이 마을이 만들어졌다. 이주민들은 미처 수습하지 못한 뼈들이 굴러다니는 이곳에 청소차에 실려 쓰레기처럼 내던져졌는데, 그렇게 내던져진 삶을 빗대어 낙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낙골에는 낙골교회가 있었고, 이 교회에는 김흥겸이라는 전도사가 있었다. 김흥겸은 다정다감하고 다재다능한 대학 1년 후배였다. 180cm 가량의 헌칠한 키에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 갸름한 얼굴에 생각이 많은 듯한 눈빛, 검은색 외투로 감싼 호리호리한 몸매로 기억되는 친구이다. 그는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마다 늘 눈에 띄었고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시위가 있던 어느 날 저녁, 지금은 이름을 잊었지만 신촌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던 막걸리집에서 술자리를 함께 했던 기억이 있다.
5월 대동제 때 예수님의 생애에 빗대 군사 정권을 풍자하는 거리 상황극이 있었다. 교문 앞에서 진압 경찰들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재판하였다. 닫힌 교문 밖에는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교문 안에는 로마 군사들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방패를 든 것은 로마 군사나 진압 경찰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로마 군사들은 창을 들고 경찰들은 최루탄 발사기를 든 게 달랐다. 재판이 끝난 뒤 교문을 등지고 예수님이 로마 군사들의 채찍을 맞으며 백양로를 맨 발로 한 발짝 두 발짝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십자가를 진 채 햇살이 기울어 가는 하늘을 우러르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고난 받는 민중의 비통함'을 보았다.
대운동장 둔덕을 올랐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고, 햇불(엄밀하게 말하면 기름 먹인 솜방망이)을 밝힌 가운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리고 십자가에 높이 매달린 예수님을 에워싼 군중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5월 광주 피의 학살을 기억하자!><학살 원흉 처단하자!> 이런 거친 구호들과 함께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고통 없이 어떻게 헤치고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던 것도 같다. (이 노래는 <오월의 노래>이고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라는 긴 부제가 달려 있다.) 그런 노래를 목 터져라 부를 때에는 진짜 가슴에 붉은 피가 솟구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짭새와 학생들이 뒤엉켜 몸싸움과 난투극이 벌어졌고 사과탄, 최루탄이 터지고 고함과 흐느낌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그때 예수님 역할을 맡았던 이가 김흥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정말 그랬는지 않은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빈민 운동가로 헌신하다가 서른여섯 나이로 죽은 김흥겸의 삶 때문에 그렇게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김흥겸은 우리 곁에 와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간 작은 예수님이었다. 김흥겸이 작사 작곡하여 부른 노래가 있다. <혀 짤린 하나님>이라는 노래이다. 거리 상황극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처음 불려진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어떤 자리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술자리였는지 집회였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김흥겸이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숨 죽인 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이 노래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고 그래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절박하게 가슴을 찌르는 것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감이다. 1980년대 전반기에 대학을 다닌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은 지금도 내 몸에 새겨져 있다. 그런 전율은 <눈보라 몰아치는 저 산하에 떨리는 비명소리는 누구의 원한이랴. 죽음의 저 산.>으로 시작되는 노래, 안치환이 짓고 부른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수천 군중들이 일제히 주먹을 치켜 세우면서, 가슴으로 또는 온몸으로 부를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김흥겸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빈민 운동에 뛰어들었고, 낙골교회 전도사로, 또 노점상으로 살아가면서 빈민운동 현장을 흔들림 없이 끝까지 지켰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 그를 본 적이 없다. 간간이 그의 근황을 뒤늦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1997년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역시 뒤늦게 듣게 된다. 1995년에 위암 선고를 받고 2년 동안 병마와 싸웠다는 이야기도 그때 비로소 듣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아끼는 자를 먼저 데려간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은 먼저 가는 것 같다.
김흥겸은 병상에서 사위어져 가는 호흡을 힘들게 가다듬으며 <낙골 연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고 한다. 그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미안함과 위로, 그리고 고마움을 전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남은 자들에게 전하는 사랑과 축복의 기도라는 느낌이 든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곳으로
먼저 돌아가는 자가 드리는
미안함과 위로
그리고 미처 다 못한 사랑의 고백을
미처 다 못한 감사의 고백을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왔는지
김흥겸은 내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상처’이다. 나는 ‘광주’를 잊은 지 오래이고 1980년대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 그런데 그는 1980년대를 되돌아보게 하고 '광주'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그를 떠올릴 때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가슴속의 ‘상처’가 덧난다. 그때 비겁했던 것은 아닌지 자책하게 된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여 블로그에 들어가 ‘삶 노동 통일의 노래’ 방에 들어가면 정성스레 모은 다양한 좋은 노래들과 함께 안치환이 부른 ‘민중의 아버지’를 들을 수 있다.
http://blog.daum.net/jesong21/6760275
(이 블로그는 정말 대단합니다. 보물창고지요. 주인장 김승규 씨는 엄청난 괴력을 지녔어요. 민중의 시각에서 본 글, 페러디, 노래, 그림, 동영상 뭐 없는 게 없어요. 하나 하나 내용도 대단하구요. 노래만 해도 200개 넘게 사연과 사진과 함께 실려 있네요. 민중의 하나님도 부용산도 다 있어요.)
김흥겸이 살아온 길
1961년 3월 23일 서울 생.
아버지 김영윤과 어머니 탁순애의 아들로 북아현동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이후 충북대 불문과 교수로 은퇴하고, 어머니는 교사로 근무함.
1968년(7세) 경희대 부속 사립 초등학교 입학.
야구부 입단, 강도 놓은 훈련과 또래 집단 활동을 통해 조직과 단결,
협력, 공동체 의식을 배움.
1974년(13세) 대광중학교 입학. 김형배, 이승엽 등의 친구를 만남.
청량리 588 골목에서 창녀들의 거주 형태와 삶의 양식을 훔쳐보면서,
'전과자의 형','창녀들의 아버지'로 살아가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함,
1977년(16세) 경신고등학교 입학.
획일적인 고등학교 교육을 암흑기로 표현함.
1980년(19세) 재수, 서대문 재수 학원가에서 1980년대 서울의 봄을 목도함.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을 간접 경험하면서 실존적인 질문을 시작함.
이때부터 1985년까지 '김형'(金螢)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그렇게 불러 주기를 친구들에게 당부하곤 함.
반딧불[螢]처럼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함.
1981년(20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입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기소개 시간에 "교도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다.
1학기 교양국어 시간에 시인 김수영의 [풀]을 발표하고, 존재론적 항거에
대해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함.
당시 집에 놀러 가면 글을 써서 철사에 끼워 놓곤 함.
1982년(22세) 4월경~1983년 3월경 파주 백석교회 교육전도사.
말씀 인도와 수양회 인도. 그리고 문학회 밤 때 전체 레크레이션 등을 담당.
1983년 초겨울인지... 폭설이 내리는 교회 옆 공터에서 눈 맞으며 밤새
울부짖으며 기도함.
1982년(22세) 가을 축제 때 '예똘' 그룹(김흥겸, 박문수, 권봉성, 김응교)을 결성하여,
제1회 전국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기독교방송국 주최)에서 대상 받음.
1983년 5월 축제 노래 경연대회 때 연세대 대극장에서 [민중의 아버지]를 부르지만,
심사위원의 주목받지 못함.
1983년 5월(23세) 축제 기간에 종교극회의 거리극 [누가 예수를]에서 예수 역할을 맡음.
이 극을 계기로 [민중의 아버지]가 알려지기 시작함.
'누가 예수를' 공연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시도였다. 그리고 겸이는 예수로 그 자리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 작품에 동원되었던가? 나는 로마군의 인솔장교로 독수리 상 앞(겟세마네)에서 연행된 예수를 끌고 다니며, 군중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문 앞에서 그를 채찍질할 때부터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왜 나는 하필 그를 채찍질하는 일을 맡았을까?) 몇몇 여학생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골고다를 향한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되고자 자원했는지, 그들을 밀쳐내느라 힘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자연스레 무리들은 시위대열로 변하고 있었고, 그대로 가면 우리는 시위의 주모자가 될 판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는 제자들처럼, 겸이를 강제하여 그곳을 빠져나왔다.
- 전진택 목사의 글에서
1983년 6월 낙골교회 담임 교육 전도사
1985년 8월(24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졸업 전에 최형묵, 김은규, 정혁현, 박병철, 김경희 등과 민중신학을 공부하다.
1986년 3월(25세) 낙골교회 담임 교육 전도사 사임.
1986년 4월 ~8월 독산동 프레스공으로 일하다 해고됨.
1986~1991년 서울시 철거민 협의회(서철협) 연대사업부 차장,
서철협 사무국장 역임, 전빈련 연대사업국 차장
노점상연합회 활동
1989년(28세) 가을 남대문경찰서에서 최광식(서철협) 등과 함께 취조 받음.
서철협 회장단은 물론 상근자(해파리 포함) 활동비는 엄두도 못냈다. 나는 해파리가 양말 신은 걸 본적이 없다. 때로는 서철협 사무실에서 때로는 지역 현장에서, 예수가 말밥통에서 잠자듯이 난장꿀림하느라 빨아 신을 시간도 없었겠지만 무슨 수로 양말을 사 신을 수 있었으랴? 운이 좋은 날은 지역 자매 형제들이 밥을 챙겨 주었겠지만 ㅡ 해팔아! 미안허다.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따뜻한 밥 한끼라도 먹여 보내는 건데...ㅡ 그렇지 못할 때는 낙골 시절부터 굶고 개겼으니 그 몸이 성할 수 있었겠는가? 해파리는 그렇게 가난한 이웃을 대신하여, 싸우고, 굶주리고, 병을 얻어, 죽었다.
얼마 전에 세운상가 아래서 노점상하시다가 시방은 전국연합을 이끌고 계시는 노수희 형님과 소줏잔을 기울이다가 해파리 그 녀석은 먹지 못해서 병이 생겨 죽었을거라 이바구 나누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 선배 최광식(서철협) 선생의 회상
1991년 1월(30세) 12일 명동 YWCA에서 한지원과 결혼식을 거행하다.
뒷풀이는 김응교 노래 진행, 민주대머리 박철민 사회로 진행.
1991년 한달 간 돼지고기 공장에서 1일 4시간 월 40만원 받고 일함.
1991년 10월~1993년 7월 영등포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다.
1991년 6월 26일 연행됨, 신대방동 철거 저지 중 투옥 3개월간 옥살이
1992년 2월 27일(31세) 딸 김 봄 출생
1992년 6월호부터 12월호까지 월간[살림]에 6개월간 산문 연재.
1991~1994년 전농과 연대 농산물 직거래 사업단 추진
1993년(32세) 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청년공동체 '한겨레 농산'에서 일하다.
1993년경부터 한살림교회(친구 정혁현 목사)에 1994년까지 다님.
1994~1995년 극단 현장 배우로 공연
1995년(33세) 민중가수 류금신 1집 음반 [희망] 앨범을 준비하는 중 위암 말기 진단
서철협을 정리하고 같이 배추장사 하다가 문득 발견한 암이었다. 사당의원(아직 서철협 이름으로 외상값이 천만 원은 넘게 있을 거다) 김종구 박사의 암선고를 듣고 우리는 같이 병원을 나와 서로 다른 곳을 물끄러미 보면서 담배를 한 개씩 피워 물었다. 5월의 아지랭이와 함께 허공으로 흩날리는 담배연기만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해철이가 말했다. "에이 씨팔! 내 인생이 이렇게 좇같이 끝날 줄 알았어"
- 친구 박정섭의 회상
1995년 발병-위암으로 수술.
1995년 5월 19일 [병상일지.2] 집필 시작
1996년(35세) 재발
1996년 7월 4일 [병상 일지.1] 집필 시작.
1996년 11월 오충일 목사님 인도로 세브란스 병원 채플실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드림.
1996년 11월, 오래 동안 인연을 맺어왔던 오충일 목사님이 “흥겸이 죽은 다음에 장례식에 모여서 아쉬워 말고, 흥겸이가 아직 살아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것은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휠체어에 몸을 담고 엷은 미소를 머금고 흥겸이는 벗들의 얼굴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힘내라, 좋아질 거야, 언제 함께 놀러가야지~” 덕담을 나누며 짧은 모임은 끝났다. 3개월 뒤, 바튼 기침 같은 모진 바람이 불던 겨울, 고단한 육신을 누이고 벗은 영영 우리 곁을 서둘러 떠났다.
-김기돈 목사,[특별한 배웅],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5년 11월호)에서
1996년 12월 친구들을 중심으로 [김흥겸을 위한 일일찻집] 등 모금운동 시작.
1997년(36세) 1월 21일 2년 여의 투병 생활 끝에 숨을 거두다. 서른 여섯살.
여러 편의 산문과 시. 그리고 [민중의 아버지], [노란 싹], [빈민의 함성],[전빈협 찬가], [노점 해방가], [아직은 아냐] 등 여덟 편의 노래를 남김.
다시 살아나는 김흥겸
1997년 6월 10일 유고 산문집 [낙골 연가](바다출판사) 출판.
책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네이버에 들어가 구입할 수 있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88673&menu=compare#middle_tab
10주기를 기해 증보판이 출판되리라 기대합니다.
새민족교회 제1청년회에서 <화장터 길의 예수>라는 제목으로 김흥겸을 주인공으로 연극공연
1998~2006년 1월 낙골교회 모임(김기돈 목사) 한 해도 빠짐없이 추모예배 진행.
2006년 2월 11일 DAUM에 [김흥겸과 벗들] 개설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카페에 들어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2006년 3월 16일 연세대 신학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9주기 추모예배.
2006년 3월 18일 파주 백석교회 신앙회 9주기 추모예배.
2006년 3월 안치환 자신의 8집 앨범에 김흥겸의 [민중의 아버지] 녹음 수록.
현재 10주기 기념 모임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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