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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84년 9월 29일 북한 수해 지원 물자 오다.

DoDuck 2012. 12. 12. 10:49

1984년 9월 29일 북한 수해 지원 물자 오다.

망원동이라는 지명은 망원정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합니다. 효령대군이 처음 짓고 세종 대왕이 거기에 들렀을 때 반가운 단비가 내려서 ‘희우정’이라고 이름했다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한강변을 멀리 내다본다는 뜻의 ‘망원정’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수백 년을 이어 내려왔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그만 정자 전체가 쓸려 내려가 버리지요. 후에 다시 짓긴 ...

하지만 한때 1천명이 동시에 앉니 마니 했다는 거대한 정자가 떠내려 갈 정도면 이 동네 홍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시죠?

1984년 9월에도 이 망원동 일대에 집중호우가 쏟아집니다 3일 동안 3백밀리미터가 넘었죠. 망원동은 상습 침수 구역이라 10년 전 서울시는 평소에는 모인 물을 모아 한강으로 흘려보내고 호우 등으로 인해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수문을 닫아 강이 범람하는 것을 막는 유수지를 설치해 두었지요. 그런데 이 수문을 다른 곳에 새로이 설치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문이 불어나는 물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린 겁니다. 수문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주민들이 시에 신고했지만 시는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지 못했으며 결국 5천 가구가 물폭탄을 맞게 됩니다. 그저 비가 오면 하늘을 원망하던 것이 상례였지만 이때 망원동 주민들은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끈질기기는 쇠심줄 같고 정의감은 대한민국 전체에서 서열을 매겨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 유능한 변호사 조영래가 그들과 함께 했지요. 이들은 천재 아닌 인재로서 서울시와 시공사에 손해배상 소송을 냅니다. 서울시는 소송에 직면하자 수문을 파괴하여 증거를 인멸하려다가 망신살을 사기도 했는데 장장 5년 10개월의 소송 끝에 주민들은 승소하여 집단 소송의 효시를 이룹니다.

이 망원동 대홍수는 홍대 앞을 예술의 거리로 만드는데 한몫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망원동 합정동 일대와 옛 청기와 예식장 주변에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작업실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이 깡그리 물바다에 잠겨 버리면서 작가들은 보다 지대가 높은 홍익대학교 쪽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고 그게 홍대 앞 분위기를 선도하게 된 겁니다. 뭐 요즘은 또 전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서도 말이죠.

이 망원동 홍수를 비롯해서 1984년 9월 대한민국 곳곳은 집중호우의 피해로 몸살을 앓았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어쩌면 집단 소송보다도 홍대 앞 변화보다도 우리 역사에 의미가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북한 적십자사가 9월 8일 “쌀 5만석 ,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기타 의약품 등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이걸 대한적십자사가 (라고 쓰고 전두환 정부라고 읽어야겠죠) 덜컥 받아 버린 겁니다. “이미 국민 모두의 단합된 노력으로 단기간에 복구를 끝내 국제 적십자사의 수해 지원도 거절”했음을 누누히 강조하면서 “상부상조의 길을 트고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하여” 북한 물건을 받겠다고 어깨에 힘을 준 건 좀 구차해 보였지만요. 허긴 북한도 8월 20일 전두환의 물자 지원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서 자신들도 당연히 거부당하리라 믿고 제스처를 취해 본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한은 그걸 받았습니다.

북한은 나름 최선을 다해서 물건들을 준비해 보냈다고 합니다. 이남 동포들에게 보낼 쌀이라고 일일이 쌀에서 돌을 골라내고 흠 있는 물건들은 배제하고 보냈다는 증언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취한 행동을 보면 훗날의 남한이 생색내는 모습과 그린 듯 닮았습니다. 수재물자에 대한 ‘인도식’을 거행하고 북측 요원들이 직접 수해 현장을 방문해 이재민을 위로하겠다고 나선 거죠. 난항 끝에 북한은 남한의 요구대로 북평, 인천, 그리고 판문점을 통해 물자를 부려놓게 됩니다. 1984년 9월 29일의 일입니다.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박정희 뒤에는 대통령 호칭을 대개 붙이는 편이지만 전두환에 대해서는 일절 붙이지 않습니다. 박정희는 그래도 직접 선거라도 치렀지만 전두환은 철저하게 정권을 탈취해서 제멋대로 누렸던 군부 독재자이자 광주항쟁의 학살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남북 관계에 관한한 그는 최소한 이번 정권 같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1984년 9월 29일이라면 그가 버마 아웅산에서 죽을 뻔했던 날로부터 1년이 채워지지 않은 날입니다. 북한의 특수 요원이 제3국에까지 와서 한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고, 정부의 핵심 인사들의 목숨을 대신 앗아갔던 사건이 바로 1년 전에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 원수들과의 끈을 어떻게든 잡고자 했습니다.

아웅산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고 ‘보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득한 똘마니 장군들은 명령만 내리시면 김일성 목을 따오겠다며 출동 준비까지 완료했었다는 소문이 분분했지요. 그때 전두환은 전방을 순시하면서 “내 명령 없는 어떠한 행동도 반역으로 간주한다.”고 방방 뜨는 군인들의 어깨를 눌러앉혔다고 합니다. 적 아니면 아군이요 수틀리면 초전박살 싹슬이를 체화하고 살았던 살인마도 분단 국가의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책임을 방기해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유일한 점수를 줍니다. 수해물자가 오고 간 이후에는 사람도 오고 갔습니다. 장세동이 가고 박철언이 갔고 허담이 왔었지요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다음 해 1985년이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쌀 주고 뺨 맞았다고 힐난하는 사람들은 작년에 폭탄 맞고 올해는 쌀 받아먹었던 전두환을 어떻게 볼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이었지만 삽으로 퍼내서 어디로 던져 버리지 않는 한, 서로 교감할 수 밖에 없고 견제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존재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두 분단 국가가 공멸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 온 노력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포기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양측의 삽질로 도로아미타불이 된 적도 많았지만 말이죠. 1984년 9월 29일 전두환은 북한 수해 물자를 받음으로써 북한과 마주앉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2012년의 우리 정부는 뭘 하고 있죠?


 


출처 : 필리핀 바기오의 모든 것
글쓴이 : 유노바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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