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서, 그 엄중한 단어
성경의 핵심 단어는 뭘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역시 '사랑'이 아닐까 한다. 기독교가 아예 '사랑의 종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예수님의 수많은 말씀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상적인 대목도 아마 이것일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데, 그 사랑의 핵심은 또 무엇일까?
사랑의 핵심은 역시 '용서'일 것이다. 하나님을 등진 죄 많은 인간들을 예수 십자가를 통해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이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롬 5:8), 이 용서의 사랑이 우리를 세상이 아닌 예수 안에서 살도록 추동하니 말이다.
사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되, 용서 없는 사랑이란 불가능하고 또한 무가치하다. 조금도 용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존재치도 않거니와, 매사 전적으로 마음에 들고 좋기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런 감정일 뿐, 하나님을 근원으로 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원수인 우리를 위해 그리하셨듯, 용서할 수 없는 원수를 십자가 부여잡고 몸부림치며 용서할 때, 비로소 하잘 것 없는 뭇 인간들의 영혼에서도 예수의 향기가 조금이나마 흩날릴 수 있을 게다. 반대로 용서를 거부하는 자에겐, 예수님이 '만 달란트 빚진 종' 이야기를 통해 경고하셨듯, 그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미치지 못함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2. 용서의 두 얼굴
그런데 이 글의 주제는 조건 없는 용서가 주는 감동이 아니다. 과연 성경이 이런 무조건적인 용서만을 말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만드신 예수님이 과연 '원수도 사랑하는' 무제한의 용서만을 보여 주셨나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온다. 21~22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490번이 아니라 무한정 용서하라는, 조건 없고 끝없는 용서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관념을 초월하는 용서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바로 위에 쓰인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장 15~17절 예수님은 죄를 지은 형제에게 충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단 세 번.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려서 확정 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마 18:21~22 새번역)
기회(?)는 단 세 번뿐이다. 세 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는 자는, 더 이상 충고할 필요도 없으며 아예 교회 공동체 바깥의 신앙 없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해 버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예수님의 '용서 정신'과 거리가 멀다. 매우 단호하다 못 해 무정하게까지 들린다. (누가복음 17장에선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되, '형제의 회개를 전제로' 용서하라 하셨다고 기록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히 완전수 7로 상징되는 무한정의 용서를 말씀하신 분이니, 마치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처럼 보인대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용서의 두 얼굴' 또는 '용서의 두 차원'이야말로 용서의 진면목이다.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를 지셨으나, 회개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그 용서가 빛을 발하듯이,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용서만이 용서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기엔 그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용서는 싸구려가 아니다.
용서는 모든 '죄'를 무력하게 만들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단죄'를 무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예수님 또한 그러하셨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죄로 범벅된 인류,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며 용서를 베푸셨지만, 결코 단죄를 포기하지는 않으셨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도 뜨겁게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구약을 끝내 버리셨다. 하나님보다 훨씬 자비롭고 너그러워 보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한없는 포용과 자비와 함께 추상같은 호통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와 함께 회개와 심판에 대한 날 선 메시지들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도, 늘 용서하되 현명해야 한다. 전도자가 되뇌듯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 3:1~8 中) 무조건 용서, 그리고 회개와 단죄를 전제하는 용서, 이 두 용서를 때와 장소와 경우와 대상에 따라 성령님께 의지하여 적절하게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침'은 없는가? 하나님이, 또 예수님이 그저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용서와 단죄를 무작위로 내리신 걸까? 우리가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원칙'이 있지 않을까?
3. 예수님은 누구를 단죄하시는가
성경에서 '우선 용서'와 '우선 단죄'를 가르는 원칙을 찾을 수 있다. 때와 규모와 방법, 그리고 사람에 대한 원칙이다. 더 세밀하게 원칙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에 대한 원칙을, 이 땅에서 몸소 일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거칠게나마 짚어 본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에겐 매우 너그러우셨으나 어떤 이들에겐 심히 엄격하셨다. 어떻게 나뉘는가?
(1) 유대인 VS. 이방인
우선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에게 더 엄격하셨다.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극찬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심도 있게 전수하시면서도, 유대인들에겐 많은 질책을 가하셨다. 그것도 하필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비교하면서. 강도당한 자를 도와주는 선한 사람의 예표로도 굳이 사마리아인을 드셨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대-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을 격퇴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유대-이스라엘 백성, 즉 '자기 백성'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식'에게 더 엄격하셨다. 하나님은 결국 스스로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위험을 감수하며, 유대-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만들어 버리셨다.
지금 개신교인들은 거꾸로, 같은 교인들에겐 지나치게 관대한 반면 비신자들에겐 쉽게 정죄를 가한다. 툭하면 비신자나 타 종교인을 사탄이라며 손가락질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이방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법도를 철저히 따르며 공동체 내부의 악은 뿌리부터 뽑도록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인들을 학살하고 그 피를 자기들 제물에 섞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때조차 빌라도가 아닌 유대인들을 질책하고 권고하셨다. 예수님이 딱 한 번 사람에게 "사탄아!"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대상은 학살자 빌라도도 사마리아인도 그 어떤 이방 종교인도 아닌, 유대인이자 심지어 '자기 제자'인 베드로였다.
그렇기에 그 정신을 이어받은 서신서도 언제나 신자들, 즉 공동체 내부의 삶과 신앙을 권고하고 질책하기에 바쁘다. 무종교인이 흔한 현대와 달리 종교가 삶의 필수인 시대였으며, 로마의 지배하에 각종 타 종교의 압박을 받던 시대였음에도, 그들을 온통 둘러싼 타 종교인에 대한 적개심이나 비난은 예수님의 언행에서나 서신서의 기록에서나 찾아보기 힘들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아테네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격분'한다. 하지만 그가 한국의 '열성' 개신교인처럼 그 우상들을 도끼로 찍어버리는가? 목을 부수어 버리는가? 고작(?) 한다는 게 '토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의 정신을 잘 반영하는, 그러나 우리가 철저히 무시해 버린 지 오래인 고린도전서의 이 충고를 새겨들어야만 한다.
"내 편지에서 음행하는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음행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약탈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사귀지 말라고 쓰는 것은 신도라 하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술 취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해야 할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쫓으십시오." (고전 5:9~13)
(2) 강자 VS. 약자
예수님은 늘 약자와 빈자와 함께 하셨다. 그러나 강자와 부자를 '부당하게' 대하신 것은 아니다. 비록 제자로 선뜻 받지 않고 중한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예수님은 부자요 관리인 청년을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제자들도, 갈릴리 어부들이 아닌 부자 요셉과 바리새인 니고데모였다. 예수님은 각별한 관계이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 말고도 두 명의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묘하게도 하나는 지역 유지였을 회당장의 딸이었고, 또 하나는 당시 약자의 대명사격인 과부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예수님은 부유하건 가난하건 살리실 자를 살리신다.
그러나 역시 예수님은 강자와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엄격하셨다. 부자이긴 하였으나 확고한 죄인으로 낙인찍혀 천대받던 세리인 마태, 또 세리장인 삭개오, 간음 현장에서 홀로(!) 잡혀 온 여자….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신다. 아예 '죄인'이 이름이 되어 버린 자들과 한상에서 먹고 마시며 사귀는 것이 그분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넉넉한 포용력의 소유자인 예수님이, 권력자이자 성전 관리 책임자인 제사장들이 이권으로 오염시켜 놓은 성전에선 직접 그 두 손으로 장사판을 둘러 엎으셨다. 존경받고 대접받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겐 벼락같은 호통과 간담이 서늘한 독설을 퍼부으신다.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신 10:18) 하나님을 믿으며 가르친다는 자들이,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켜서" (막 12:39~40), 어느 과부의 수중엔 동전 한 푼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막 12:41~42) 방치하니, 어찌 책망받지 않겠는가. 어찌 예수님의 특별한(?) 정죄를 피하겠는가.
강자들에겐 약자들의 삶이 추락하고 훼손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강함을 나눠 줄 책무가 있다. 이 책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되길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 권세의 주인인 사탄과 자본주의의 탈을 쓴 맘몬의 자녀 되길 자처하는 짓이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시길" (잠 30:8) 구하는 대신 부자를 극진히 대접하고,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땐 높은 자리 대신 차라리 끝자리에 앉으려" (눅 14:8~10) 하는 대신 국회의원 당선이나 고위직 임명을 열렬히 자축하며, 이 강자들의 죄는 결코 묻지 않는 대신 약자들은 버려두고 그들의 죄에는 가혹한 지금의 한국교회가, 이 무거운 진실을 어찌 감당하리오 마는.
(3) 당당한 자 VS. 부끄러움을 아는 자
이는 예수님의 명징한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당당한 바리새인이 아닌,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 자칭하는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단정하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눅 18:14)
예수님인들 모르시겠는가. 바리새인은 율법적 도덕적으로 살려 애쓰고, 세리는 죄로 뒤범벅된 삶을 산다는 것을. 그럼에도 예수님의 초점은 그들의 자세에 맞춰져 있다. 결국 그 어떤 죄보다도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죄가 더 심대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언제나 유독 격노하신 게 무엇인가. 율법학자나 바리새인 같은 자들의 '위선(외식)'이 아니었는가. 마태복음 23장 전체가 그런 예수님의 분노로 가득 차 있을 정도이다. 반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애원하는 자들은 내치시지 않고 돌보셨다. 구약에도 극적인 예가 있다. 아합 왕과 므낫세 왕이라면, 왕정 시대에 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왕들이다. 그들이 줄기차게 악행을 저질러놓고도 말년에 하나님 앞에 반성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은 너무도 간단하게(?) 제한적이나마 용서를 베푸신다. (왕상 21장, 대하 33장)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 9:41)
스스로 죄 있다 느낀다면 물론 속히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죄 없다 느낄 때에 더욱 조심할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교만과 자기의가, 하나님이 우리를 엄히 단죄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므로.
(4) 공동체와 약자를 해치는 자 VS. 나를 해치는 자
예수님이 이 땅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처형으로 마감하시던 날, 팔다리에 구멍이 뚫리고 나무에 못 박힌 채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눅 23:34)
비록 후대에 추가했다는 구절이지만, 재판과 처형 과정 전반에 보인 예수님의 태도를 볼 때, 저리 말씀하신 것이 틀리지 않으리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용서와 단죄, 포용과 분노, 복음과 심판을 두루 전하신 예수님이지만 그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용서'인 것이다.
이 용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대상들을 향해 베푸신 뜨겁고 감동적인 용서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이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들에 대한 용서임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굴 위해서 용서를 비셨는가? 아주 넓게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온 인류라고 할 수도 없지 않겠지만, 직접적으로는 자신의 팔에 못질을 하는 자들과 둘러서서 구경하며 조롱하는 자들 아닌가?
그러나 자기 자신이 아닌 교회 공동체를 해치거나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은 예수님의 불호령을 피할 수 없었다. 위에서 여러모로 쓴 것처럼 복음서에서 줄곧 보여 주신 모습이 그러할 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의 죄를 '미워한다'고까지 표현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이다.
바울 또한 자신에게 시기심과 경쟁심을 품은 자들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빌 1:18)이라며 관대하게 대한다. 그러나 복음이 훼손되거나 교회가 훼방 받는 것은 참지 못하고 불법자, 멸망의 자식, 사탄을 운운하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거나 피해를 보는 것은 참지 못하지만, 약자들이 고통당하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에는 무심하다.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강자들이 약자들을 내리누르고 공동체의 선한 결속을 파괴하는 그 현장으로 향하고 있는가?
4. 용서냐, 단죄냐
최근에 드러난 어느 유명 목사의 성범죄 사건을 생각해 보자. 이 목사는 너그럽게 용서받아야 하는가, 엄한 단죄부터 받아야 하는가?
그는 어떤 사람인가? (1) 예수를 믿는다는 자이고, (2) 교회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담임목사인데다 유명인인 강자이며, (3) 부끄러워하는 대신 아무 일 없는 듯 태연자약 하는 자이고, (4) 약자인 여성 신자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가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상처 입히고 근심하게 만든 자이다. 그렇다면 답은 너무나 선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교회는 단죄를 거부함으로써, 예수의 길과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역했다. 공식적으로는 안식년이라 광고하고 내부적으로만 조용히 설교 3개월 금지를 결정한 것도 단죄라고 만약 주장한다면,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이라 칭하셨던 위선자들을 따르는 죄를 보태는 행위일 뿐이다.
정말 답답한 것은 이것이 한국교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술·담배에도 기겁을 하는 한국교회가, 교회 내부의 담임목사, 권력자, 유명인 등 강자의 죄는 묻어두기에 급급하여, 회칠한 무덤만 셀 수 없도록 쌓아 왔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훤히 알고 낄낄대며 손가락질하는 여러 목사들의 죄를, 정작 교회 안에서만 어찌 그리도 몰라본단 말인가? 호되게 지탄받는 부패한 권력자들을 교회에서 앞장서서 단죄하긴커녕 어찌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죄악 앞에서 함부로 용서와 회복부터 떠들지 말 일이다. 용서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분별없는 용서는 죄에 죄를 더하는 짓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허울 좋은 용서가 아니다. 교회를 '조금'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즉사시키셨던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엎드리는 두려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