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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구원,속죄,대속에 관한 교리에 대한 반성 (naver의 지식in에서 옮김)

DoDuck 2008. 1. 17. 00:23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charlesh1 2008.01.03 15:13

답변 10| 조회 301

기독교 기본 교리중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선악과를 따먹음)에 따른 원죄와 기타 자범죄(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지른 각종 불의한 행동들)로 의인은 없다.(율법아래 100% 의로운 사람은 없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지옥불에 던져질수 밖에 없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어 우리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도록 하셨던바, 이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지요.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중 다른 것은 모두 용납을 할 수 있으나, 죄의 값은 사망이다 라는 것은 너무나 공명정대한 하나님께서 취하실 심판기준으로는 공정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인간세상에서만 보더라도, 살인과 같은 중한 죄를 진 경우, 사형에 처해지기도 하나, 요즈음 사형을 폐지하는 국가도 많고(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벌이 목적이 아니고 교화가 목적인 만큼)한데...

 

과일(선악과)하나 따먹었다고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부분이나,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죄인은 지옥불에 던진다.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연옥,지옥 등 하늘나라 감옥도 등급이 있어야 하고, 죄질에 따라 영원히 수감되는자부터 형기가 10년,50년 ,100년 등으로 나누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하나님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됨)의 태도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하여 가출하여 온갖 못된 짓하며 다 털어먹고 거지가 되어 되지를 키우며, 되지먹이를 줏어먹으며 살다가, 자기 아버지께 돌아와 용서를 빌며, 종으로라도 써달라고 했을때, 아버지께서는 전혀 아들의 허물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죽은줄 알았던 내아들이 돌아왔다고 하시며, 목욕시키고 비단옷에 반지를 채워주고,소를 잡고 잔치를 열며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품을 떠났던 우리이지만, 우리 죄를 반성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진실로 회개하고 엎드려 빌면, 기쁘게 맞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값 때문에 우리를 만나주시지도 않고 꼭 죄값을 치르도록 해야하시는지(우리가 죽던지, 독생자 아드님이라도 반드시 죽여 피를 봐야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를 사랑하지만, 죄를 묻지않고 적당히 넘길수는 없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위의 탕자의 경우는 왜 아무런 질책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환대를 하였는지요? 사랑이 풍성하시고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와 같으실 것 같지, 우리의 원죄 또는 사소한 마음속의 죄라도 문제삼아 피를 보고 죽이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이 아닐것 같습니다.이러한 교리는 꼼짝없이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해 무리하게 만들어진 측면은 없는지? 솔직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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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hei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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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5 01:26

질문자인사 바쁘신 중에도 이렇듯 자세한 답변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charlesh1님의 질문에 이틀 연속으로 답변하게 되는군요. 개인적으로 시간이 많지 않아 당분간 지식iN에 답변을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질문자님의 의문을 해소해 드릴 만한 답변이 올라오지 않는 듯하여 몇 마디 써 봅니다.


그리스도의 의미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생긴 인간 전체의 죄에 대한 대속 제물(substitutionary atonement)로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분’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대속적 기독론(Substitutionary Christology)’이라 합니다. ‘속죄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속적 기독론이 현재 한국 개신교계의 다수파인 근본주의(fundamentalism) 진영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죠. 이 교리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셨군요.


대속적 기독론에서 말하는 ‘원죄(original sin)’는 물론 창세기 2~3장에 기록된 타락 사건에 일차적으로 연유한 것이지만, 대속적 기독론과 원죄론이 기독교의 지배적 교리로 정립되는 데에는 로마서 3장 23~25절과 5장 12~21절, 그리고 히브리서 등 일부 서신서들의 내용과 마가복음 10장 45절 등이 주된 근거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원죄론은 로마서의 이 두 부분에 주로 근거하여 정립되었습니다.


원죄의 이론적 근거가 아담의 타락 사건에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원죄라는 교리는 기독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다. 원죄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성립 이후 나타난 것인데, 앞서 말씀드린 바울의 로마서 내용이 그 단초가 되기는 했으나 실제로 그러한 관념이 ‘교리’로 정립되는 데에 있어서는 초기 교부(敎父)들, 특히 서방측 교회 교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으로 불리기도 하죠)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도 인간의 죄에 관련한 개념들이 논의되기는 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 출신의 교부 펠라기우스(Pelagius)와의 인간론 논쟁 과정에서 ‘원죄’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확립했습니다.


원죄론이라는 교리의 정립 배경을 논하려면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간의, 그리고 이들의 이론을 계승한 후대 사람들 간의 논쟁 과정을 상세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인터넷상의 답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므로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는 악을 행할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아담의 불순종 행위를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범죄’가 아닌 사소한 사건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죄는 인간 본성의 산물이 아닌 의지의 산물이라 주장했으며, 죄가 후손들에게 계승된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서는 ‘원죄’나 ‘유전되는 죄책’ 등의 개념은 인정할 수 없었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강력히 논박하였습니다. 그는 인류를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하였고, 아담을 단순한 개인이 아닌 전체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행위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이 타락한 뒤 그 본성을 물려받은 모든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아담과 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선재(先在)했던 자들이며, 따라서 각 사람은 본인의 의식 여부를 떠나 아담 안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서 5장 12절을 근거로, 모든 인간은 ‘씨앗 형태로(ratione seminali)’ 아담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며 부모의 육체적 관계에 의하여 출생함으로써 죄를 물려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부모의 육체적 관계로 태어나시지 않았으므로 원죄를 갖지 않고 태어나셨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이론은 기본적으로 로마서 5장 12절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이해에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해당 구절의 그리스(헬라)어 원문 중 ‘(에프 호 판테스 헤마르톤)’라는 부분은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 영어식으로 제롬(Jerome)이라 불리기도 합니다)가 펴낸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Vulgata)역 성서에서 ‘in quo omnes peccaverunt’로 번역되었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이 구절은 ‘그(아담) 안에서 모든 자들이 범죄하였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스어의 ‘(에프 호)’는 접속사로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가타역 성서에서는 전치사+대명사 형태인 ‘in quo’로 번역되었으므로, 이것은 오역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못하여 라틴어 성서만을 읽었으므로, 이 부분이 오역된 것임을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원죄 교리를 옹호하는 후대의 신학자들도, 각 사람이 ‘간접적’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직접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보지 않습니다(일부 ‘안티’ 네티즌들은 이 점을 지적하면서 ‘원죄’라는 교리 자체가 전적으로 오역에 기인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로지 이 구절의 오역 하나 때문에 원죄라는 교리를 주장하게 된 것이 아니며 신(神)플라톤주의의 이원론에 바탕을 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로마서의 해당 구절을 언급한 것이므로 그러한 주장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론과 원죄에 대한 논쟁은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한 뒤에도 이어졌는데, 점차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진영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5세기 초에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원죄를 부정한 펠라기우스가 단죄되고 원죄 교리가 선포됨으로써 원죄론의 핵심적 이론이 일차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세기 초의 오랑주 교회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론 중 원죄론을 포함한 많은 부분이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체계가 서방측 교회 신학의 기틀이 되면서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강조하게 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개신교는 가톨릭 이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 충실하였습니다(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계승하는 수도회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동방측 교회는, 원죄라는 교리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며 인간의 타락 이전과 이후 상태의 차이를 서방측만큼 크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가 공유하고 있는 사상적 틀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궁극적이고 무한한 영의 세계’와 ‘유한하고 천한 육의 세계’ 라는 이원론(dualism)의 틀에서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한 틀 안에서 ‘태초의 완벽하고 선만이 존재했던 상태’와 ‘타락 후의 비천한 인간 운명’을 나누는 관념이 자리잡은 것이죠. 이러한 이원론적인 틀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경우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상황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영지주의(Gnosticism)적 개념을 적용하여,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영-육 이원론 구도를 주장하였습니다(이러한 관념은 로마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이원론 구도는 플라톤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바울의 입장은 간접적으로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와 무조건적으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실적으로 성서를 기록한 초기 그리스도인 중에도 어느 정도 영지주의적 개념을 수용한 사람들이 많았음이 분명합니다. 영지주의적 관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강력한 매트릭스(matrix)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영지주의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은 분명 그리스도교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척당해야 했습니다. 영지주의적 관념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 등의 해괴한 주장이 나타나기도 했죠).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잘 알려진 대로 신(神)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틀로 삼아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본래의 플라톤주의 외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스토아주의, 동방 종교 등에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플라톤이 주장한 이원론적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육체가 속하는 현상계를 비천하고 비본질적이며 유한한 것으로, 영혼이 속하는 이데아 세계를 본질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여 인간의 타락 이전과 이후의 상태는 극명히 대조되는 것이라 보았고, 한 번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신국론(De civitate Dei; ‘하나님의 도성’ 또는 ‘신의 도성’으로도 번역됩니다)’이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의 분리를 강조한 것도 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원죄와 대속적 기독론이라는 교리의 기원을 알고자 질문을 올리신 것은 물론 아닐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들은 초기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결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보편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몇 마디 쓴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원죄와 대속적 기독론이라는 교리는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계속 서방측 교회(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비(非) 근본주의 신학자들 중에서는, 후대의 신조와 교리로 채색된 ‘숭배 대상으로서의 예수’라는 관점에서 탈피하여 그가 선포한 가르침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교리체계에서 ‘대속적 기독론’과 ‘원죄’를 지나치게 강조해 온 데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신앙인들의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섭리를 인간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사상체계의 발전에 따라 그처럼 관념이 변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특정한 ‘교리’나 ‘신조’로 나타내고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경전에 담는다는 것은 불완전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대다수 근본주의 계통 교회에서는, ‘불완전하게나마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교리와 신조, 경전을 ‘진리 그 자체’와 혼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 신조, 또는 경전을 숭배하는 것이 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그런 신앙양태를 보이는 신자가 한국에는 너무도 흔한 듯합니다.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적 기반은 그들의 시대와 지역적 여건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결코 어느 문화권,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주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사고의 틀을 규정하는 매트릭스였지만 현대인들에게까지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 정립된 이후 정형화된 교리와 경전에 기반을 두고 유지됨에 따라, 어디까지나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 교리와 경전이 자체적으로 절대성을 갖는 것처럼 인식되는 폐해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사상은 계속 발전해 가고 신앙관도 그에 따라 진보할 필요가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화석화된 교리와 경전이 그 진보의 걸림돌이 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특정한 교리나 신조를 맹종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신앙은 절대적이라 해도 교리나 신조는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와 신조는 무한한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 표현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며,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죠. 파울 틸리히는 ‘궁극적 진리 자체’가 아니라 ‘궁극적 진리에 대한 상징(표상)’인 경전이나 교리 등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현상이 너무나 자주 나타남을 지적하고, 이러한 현상을 ‘악마화(demonization)'라 한 바 있습니다. 근본주의적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국의 대다수 교인들은 대속적 기독론, 즉 속죄론을 아직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있는데, 신앙생활의 본질은 특정한 교리를 절대시하고 맹종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속적 기독론’, 즉 ‘속죄론’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앙인들의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 합니다. 먼저 서강대 종교학과 길희성 명예교수님의 새길교회 2000년 7월 2일 설교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이 글을 이미 읽어 보셨을 수도 있을 듯하군요.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다가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종교전통과 기득권을 더 사랑하고 인간보다 율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이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 아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도록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계산적 하나님, 대가를 요구하는 야박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상호주의를 고집하다가 인간 측에서 도저히 그 엄청난 죄 값을 치를 방법이 없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자기 아들로 하여금 대신 형벌을 받게 하고 인류의 죄를 용서했다는 얘기인데, 이거 병 주고 약 주는 식 아닙니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런 하나님이라면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고, 그리고 차라리 “영원한 형벌을 받을지라도 나의 죄 값은 끝까지 내가 치르겠습니다”라고 오기를 부리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죄 없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잡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잔인하게까지 보이는 그런 하나님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하나님은 예수께서 믿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 전부터 그를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다 용서하고 계시던 아버지 하나님, 돌아온 탕자에게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받아주시는 예수의 아빠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결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할 수 없이 잡혀 죽으셨고, 할 수만 있으면 살려 달라고, 십자가의 쓴잔을 멀리 해달라고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울부짖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비극적 결과였지 처음부터 의도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고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그야말로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지, 우리와는 무관하게 2000년 전 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어느 한 사건 때문에 온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섬기던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생명의 뿌리이며 만물의 근원이신 은총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던 이기적 존재들이 예수를 만나 진정한 인간 사랑을 깨닫게 됨으로써,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부활의 참 생명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이것이 영생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탄생입니다.


출처 :

http://www.saegilchurch.or.kr/bbs/zboard.php?id=sermon&page=3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04>




『안병무전집』의 제2권인 『민중 신학을 말한다』에서도 일부를 인용합니다. 고(故) 안병무 선생은 1970년대에 한신대학교 신약성서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남동 교수나 현영학 교수 등과 함께 ‘민중신학’을 주창한 분입니다. 저는 민중신학의 정치적 동기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안병무 선생의 신약학자로서의 견해는 민중신학 자체에 대한 입장을 떠나 주목할 만하다고 봅니다. 『안병무전집』은 그가 후학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Q : 서구 그리스도론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리스도의 현실적인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세웠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론(贖罪論)적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또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존의 속죄론적 이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A : 우선 ‘예수(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관계 문제인데, (교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 온)그리스도론에서는 예수의 생애 즉 그의 행태와 말씀이 거의 다 빠져 있습니다. 불트만이 말한 대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는데,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설교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리스도론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속죄의 사건’으로 단정하는데, 이렇게 단정하는 배후에는 역시 그리스 및 로마의 사고 도식 - 반드시 그리스와 로마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 즉 소위 법적(法的), 제의적(祭儀的, juristisch-kultisch) 사고가 깔려 있어요. 죄를 지으면 꼭 벌을 받아야 한다, 누가 대신으로라도 꼭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법적 사고의 근저를 이루지만 제사종교에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벌을 어떻게 주느냐 하는 것과 관련하여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비단 그리스 및 로마 사회의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법적이고 제의적인 사고가 그리스도론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작용을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런 틀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온 하느님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이 하느님도 죄지은 사람은 꼭 벌을 준다는 덥니다. 남을 피 흘리게 한 사람은 꼭 피를 흘려야 하며, 남을 죽인 사람은 꼭 죽어야 한다, 특히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이렇게 복수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블로흐(E. Bloch)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신은 피에 굶주린 신이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누구라도 피를 흘려야 한다는 도그마가 예수의 십자가 해석의 핵심을 이루고 있어요.


이러한 법적, 제의적 사고가 예수의 생에 들어맞느냐? 예수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법적, 제의적 사고도식이 기존 질서를 지탱해 가는 골격이 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사고가 그리스도론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다교 성전(聖典)의 제의적 사고를 그대로 예수의 죽음과 연결지어 십자가의 죽음을 속죄 제물로 이해했어요. 이런 이해는 어느 한 측면을 설명해 줄 수는 있어도 결코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요. 기존의 그리스도론이 이런 이해를 그대로 밀고 나갔고, 이것을 기준으로 삼다시피 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법적, 제의적 신관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그대로 인정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후에 다시 얘기되겠지만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신, 그런 원리는 부정됩니다. 그것이 부정된다면 예수의 입장에서 십자가 사건도 다른 시각에서 이해돼야 하고 그리스도론도 아주 달라져야 하겠지요.



Q : 선생님께서는 법적, 제의적 사고를 부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겠습니까? 법적, 제의적 사고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사고로 그치지 않고 역사적 현실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공동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고 질서를 위해서는 강제력이 수반된다는 것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인데 이것은 민중에게도 역시 타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질문은 개신교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론으로 설명하면서도 유다교적인 속죄사상 및 응보사상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극복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희생양이 되어 모든 인류를 무조건적으로 값없이 용서해 준다는 주장,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을 형식적으로는 속죄론으로 설명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인과응보적인 사고를 극복했으며 그 죽음에서 하느님의 값없는 자유로운 은혜를 본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A : 우선 법적, 제의적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삶이 모두 설명된다면 신도, 은총도, 아니, 그리스도도 필요없게 됩니다. 법적, 제의적인 사고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교권마저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역할이 ‘이런 질서를 재확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질서에 묶여 있는 인간을 해방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속죄론에 대한 소위 복음주의적인 설명도 자가당착적인 면이 있어요. 하느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는 대신데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예수가 하느님을 대신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되면 하느님도 이 법 속에 꼼짝 못하고 매여 있어요. 다른 사람 대신에 아들이라도 죽여야 하는 그런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느님은 교리에 얽매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겐 설득력이 없습니다.



Q : 속죄론을 토대로 설교를 하려면 참 힘들어요. 그런데도 도덕적인 죄를 지었을 때 마음이 몹시 괴롭다가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가셨으니 용서받았다는 위안이 밑바닥에 깔려 있거든요.


A : 도덕적, 윤리적인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푸는 데에는 죄인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한 열쇠입니다. 법적, 제의적인 사고가 인간을 전적으로 저주하는 데 대해서 예수는 저항하고 나섰지요. 기존의 그리스도론은 그런 현실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복종이지요.


안병무, 『안병무전집 2 : 민중 신학을 말한다』(서울 : 한길사, 1993), pp.105~110에서 발췌.




특정한 교리에 대한 맹종과 신앙생활의 본질 사이의 관계에 관련해서는, 오강남 선생의 저서인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오강남 선생은 캐나다에서 활동해 온 비교종교학자이며, 근본주의가 주류파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을 것을 촉구해 온 분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예수님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믿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성, 신성, 성육신, 하느님의 아들 되심,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중보, 재림 등에 관한 복잡다단한 교리들을 금과옥조처럼 외우고 따지고 해설하고 주장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며 표준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수납하고 그대로 고백하면 그리스도인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非)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렇게 하더라도 자기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친 교리에 어김없이 바로 하지 않으면 이단, 사단이라고 판정한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를 절대화하고 그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수납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이런 교리들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하거나 이런 교리들이 모두 틀렸다고 지적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에 대한 특정 신조나 교리를 고백하는 것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세례를 위한 문답 시간에 목사님이 어느 할머니에게,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 하고 물었는데, 할머니가 얼른 대답을 못했다. 옆에 있던 며느리가 할머니 옆구리를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저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하셔요.” 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얼른 알아차렸다는 듯이 “내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할머니가 나중에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설령 말을 바꿔서 며느리 죄가 아니라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고백하게 됐다손 치더라도 그런 고백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얼마나 큰 관계가 있을까?』


『이런 교리(대속적 기독론)는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리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이런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는 신학자 한스 큉도 지적했듯이 로마 시대의 형법 사상을 기초로 성립된 이러한 특수 해석을 믿고 안 믿고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도 아닐뿐더러, 성경의 본질적 메시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 조건에 의하여 고정된 특수한 교리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역사적 문맥과 상관없이 이런 교리를 ‘덮어놓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시는 분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오강남,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서울 : 현암사, 2002.) pp. 160~162에서 발췌.



같은 책에서 한 부분만 더 인용하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특정 시기에 특정한 필요성에 따라 채택한 ‘예수님에 관한 교리’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faith of Jesus)'을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믿는 것, 예수님을 따라 믿는 것, 예수님처럼 믿는 것,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같이(Christ-like)'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도 인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삶에서 승리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를 따라가는 것, 그리하여, 그가 실존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를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자유의 세계를 향해 나가겠다는 마음이 그 핵심이라고 본다.』


오강남, 위의 책, p. 165에서 발췌



제 답변 내용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분은, 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의제기나 항의성 메일이라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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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minam9999

답변채택률 47.2%

2008.01.03 15:24

찰스피니 목사님의 "승리의 원리"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을 보시면 님의 궁금함이 많이 해소될것 같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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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ahqjatodei

답변채택률 25.8%

2008.01.03 15:31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죄질로 10년 30년 형으로 말씀하고 계시군요.

하나님앞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든 살인하든 똑같은 죄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분이기 때문에 간음을 한 것이든, 형제를 증오한 것이든 똑같은죄입니다.

죄는 죄이지 10년형 20년 형 하는 것은 인간세상의 법일 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해보지 못하신 분이라서 그런 생각을 하실수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하러 오심이아니오, 구원하러 오셨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지엄하시고 정확하신 하나님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연옥을 만드실 분이 아니며,

천국과 지옥 이면 지옥이지 연옥은 아닙니다.

100%  완벽하신 분이 지옥에 넣지 못하고 천국에 못넣을 틈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늘 인간적인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죄가 조금있으니 조금 거룩하지 못하니 연옥에 간다고요..

 

완전하신 하나님께는 그런 말도안되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어디에도 연옥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또 연옥의 언급은 외경에만 있을 뿐입니다.

 

 믿음이면 믿음이지 80%믿음 12%믿음 이런것은 없습니다.

천국이면 천국이지 50%믿음 50%안믿음 이런것은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셨고, 미지근하면 토해내리라 하셨습니다.

 

구원이면 구원이고 구원이 아니면 구원이 아닌것입니다.

믿음이면 믿음이고 믿음이 아니면 믿음이 아닌것입니다.

열매면 열매지 열매가 아닌게 아닌것입니다.

알곡이면 알곡이지 쭉정이가 반 알곡은 아닌것입니다.

가라지면 가라지지 반가라지 이런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반하나님이런것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따에 오셨을때 100%신 100%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50%신 50%인간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복음이며.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거나 초신자이거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수있습니다.)

예수님이 100%신 100%인간이신것은 미스테리입니다. 이것은 보여줘도 모르는 비밀이지요.

시크릿이 아니라. 시크릿은 감춰진 비밀이구요.

 

따라서 천국이면 천국이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 그런 곳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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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기본 교리중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선악과를 따먹음)에 따른 원죄와 기타 자범죄(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지른 각종 불의한 행동들)로 의인은 없다.(율법아래 100% 의로운 사람은 없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지옥불에 던져질수 밖에 없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어 우리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도록 하셨던바, 이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지요. 

 

이러한 기독교의 교리중 다른 것은 모두 용납을 할 수 있으나, 죄의 값은 사망이다 라는 것은 너무나 공명정대한 하나님께서 취하실 심판기준으로는 공정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인간세상에서만 보더라도, 살인과 같은 중한 죄를 진 경우, 사형에 처해지기도 하나, 요즈음 사형을 폐지하는 국가도 많고(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벌이 목적이 아니고 교화가 목적인 만큼)한데...

 

과일(선악과)하나 따먹었다고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부분이나,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죄인은 지옥불에 던진다.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연옥,지옥 등 하늘나라 감옥도 등급이 있어야 하고, 죄질에 따라 영원히 수감되는자부터 형기가 10년,50년 ,100년 등으로 나누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앞에 죄는 죄입니다. 죄의 경중은 똑같습니다. 님은 그러한 하나님을 모르시니 당연히 이해가 안될것입니다. 레위기를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이와 관련하여,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하나님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됨)의 태도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하여 가출하여 온갖 못된 짓하며 다 털어먹고 거지가 되어 되지를 키우며, 되지먹이를 줏어먹으며 살다가, 자기 아버지께 돌아와 용서를 빌며, 종으로라도 써달라고 했을때, 아버지께서는 전혀 아들의 허물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죽은줄 알았던 내아들이 돌아왔다고 하시며, 목욕시키고 비단옷에 반지를 채워주고,소를 잡고 잔치를 열며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품을 떠났던 우리이지만, 우리 죄를 반성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진실로 회개하고 엎드려 빌면, 기쁘게 맞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값 때문에 우리를 만나주시지도 않고 꼭 죄값을 치르도록 해야하시는지(우리가 죽던지, 독생자 아드님이라도 반드시 죽여 피를 봐야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를 사랑하지만, 죄를 묻지않고 적당히 넘길수는 없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위의 탕자의 경우는 왜 아무런 질책도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환대를 하였는지요? 사랑이 풍성하시고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와 같으실 것 같지, 우리의 원죄 또는 사소한 마음속의 죄라도 문제삼아 피를 보고 죽이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이 아닐것 같습니다.이러한 교리는 꼼짝없이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해 무리하게 만들어진 측면은 없는지? 솔직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을 정말 모르시는건지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아니라 아버지하나님 성부하나님입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오게 하기 위함이구요. 곧 삼위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기 위함이지 교회에 나오게 하기위함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앞(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가 두세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를 지교회라고 하고 교회당이라고도 합니다. 이곳은 예배를 위한 장소, 모임을 위한 장소이지 이곳으로 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꼼짝없이가 아니라 그 아들은 제 발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아들은 영영 자기 마음이었으면 안돌아올수도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모든것을 다 깨닫고 아버지한테 가자 고 해서 간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간것입니다. 꼼짝없이 교회나오게 하기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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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6

개신교는 탐욕의 종교입니다.

macthree

답변채택률 35.0%

2008.01.03 16:25

죄의값은 죽음이다 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생물이 있던가요?

 

다른동물은 모두 영생하는데 오직 인간만이 죽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은 죽습니다.

 

다른 생물들도 선악과를 따먹었나요?

그래서 그 죄값으로 죽는걸까요?

 

그런식이라면 육식동물은 왜 죽나요? 과일같은건 안먹는 동물들은 왜 죽나요?

 

개신교는 탐욕의 극치가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쉽게 구원받고자하는 인간의 탐욕, 악함의 극치가 모여서 종교가 되었습니다.

 

다른 공인된 종교들이 욕심을 버리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며

바르게 살기위해 노력하는것과는 다르게

 

개신교는 욕망을 더욱더 끝없이 키워나가며 지독한 독선으로 끝없이 분란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선악은 의미없다라?

법따위 윤리따위 아무 필요없는건가요?

 

법이나 윤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명예나 수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의가 없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모두가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혀 서로 죽고 죽이고 가지고 싶으면 빼았고 힘센자가 모든것을 차지하고

그렇게 살면서 야훼에게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천국 가나요?

어차피 야훼 입장에서 인간의 모든 죄는 같다면서요?

 

개신교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쓰고 파괴 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쉽게 죄사함을 받아야하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야하고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모든자들은 지옥에서 고통받기를 그들은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선악은 의미 없어야만 하고

자신은 선택 받아야만 하며 교회에 돈 바치면 더 큰 복이 자신에게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탐욕을 먹고 교회는 점점 거대해집니다.

정작 야훼는 자신에게 돈을 바치는 행위가 죄라고 했지만  탐욕으로 가득찬 그들은 쉽게 죄사함을 받고

복을 준다면 얼마든지 성경구절을 뜯어고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아사야]

 

실제로 십일조란 교회에 내는것이 아니라 불쌍한 이웃을 돕는 행위라 분명히 성경에 써져 있음에도

탐욕으로 가득찬 마음에 그딴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없이 쉽게 쉽게 복받고 죄사함받고 사람을 죽이고 사기를 쳐도 믿기만 하면

죄가 씻어지고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탐욕스럽게 살다가 천국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개신교는 존속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신을 믿는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탐욕을 충족 시키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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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4

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eagerlywait

답변채택률 12.5%

2008.01.05 04:10

칭의를 얻는 길 - 회개와 자복

-성경의 명확한 구원론 제2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영생을 잃어버리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구속의 경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죄의 값인 사망(롬 6:23)을 받게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어 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이다. 우리 모두는 사망의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짐을 받았다. 곧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요 1:12).


죄를 용서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부른다. “칭의”(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연구해 보면 그 속에는 놀라운 의미와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칭의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칭의”하면 신학자들이나 다루고 배우는 용어라고 생각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신의 영생이 달린 구원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대신 연구해 주거나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므로, “칭의”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라도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그 의미에 대하여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회개하여 칭의를 얻게 되는 과정과 그것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회개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 15).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만나 함께 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며 불의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말을 더 신뢰하여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불의하게 되므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의 범죄의 결과 때문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타락된 본성을 타고난(원죄와는 다름) 우리들은 늘 하나님의 법보다는 육신의 법을 따르기가 쉬운 존재가 되었다. 즉, 불법을 행하기가 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유일한 정의는 “불법”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하나님의 법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분의 사랑의 성품의 사본이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도록 도덕적인 십계명으로 쓰여져 있으나, 십계명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사랑”이다. 그것에 나타나 있는 사랑의 마음과 정신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인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계명에 나오는 정신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 법을 지킬 수가 없다.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과 조화되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과 어두움의 길을 버리고 선과 빛의 길을 택하여 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혀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십자가 밑으로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십자가 밑으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죄의 값을 치르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을 알게 되므로 회개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를 보고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렇게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 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그 때 그는 그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게 된다.

성령의 이끄심
때때로 죄인들은 그들의 죗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들의 나쁜 습관을 어느 정도 버리고자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옳은 일을 하고 싶은 진실한 욕망을 일으켜주고 그들의 생활을 변화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께서 죄인들을 이끄셔서 당신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며 그들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그들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만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부르짖기를 “죄가 무엇이길래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 위해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하고 외치게 될 것이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죄인이 이 성령의 이끄심과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으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인을 십자가 밑으로 끌고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받게 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다.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이다. 회개 자체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공로가 없다. 다만 잃어버린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유일한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마음을 준비시킬 따름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바라볼 때에 그가 범한 죄들이 자기 자신에게 밝히 드러나며 양심을 깨우치게 되며 정죄함을 받는다. 그의 유일의 안위와 소망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다. 그는 과감하게 허락들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 그때에 그의 영혼에게는 위로와 화평이 찾아오게 된다. 그는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멸망할 수 밖에 없으며 소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게 된다.

자복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회개에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복이다.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미워하게 되며 그 죄를 버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죄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 먹자마자 우리의 범죄를 인정하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장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것이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조건은 단순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의 사유를 받기 위하여 무슨 괴로운 일 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은총을 받기 위하여 또는 우리의 죄과를 속하기 위하여 멀고 지리한 순례나 또는 고통스러운 고행(苦行)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만일 죄인이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자복하고 맡기면 예수께서는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그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죄를 고집하고 자복하지 않으면 그는 온전히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는 회개하지 않은 어떤 죄도 덮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유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또 형제와의 사이에 잘못을 피차에 자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친구나 이웃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대는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도 그대는 하나님께로부터 사유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대가 손해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대가 그에게 손해를 입히므로 그의 창조주와 구속자에게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자복하는 일은 공중 앞에서이든 개인적으로든 충심으로 할 것이며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자복은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길을 찾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 성경에는 자복하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罐?위하여 변호하라”(사 1:16, 17).

변명은 진정한 자복이 아님
우리는 죄를 자복할 때 죄에 대한 핑계를 대면 안된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먹은 후에 그들은 수치와 공포의 느낌으로 충만하였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저의 죄를 핑계하여서 그 무서운 사망 선고를 면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께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물어 보실 때에 아담의 대답은 그 범죄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돌리고 또 일부분은 그 아내에게 돌려 말하기를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였다. 여인은 그 허물을 뱀에게 돌려 말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하였다. 왜 당신은 뱀을 지으셨습니까? 왜 당신은 그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옴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이 자기 죄를 변명하는 하와의 말 가운데 암시되어 있었고, 그것은 하와가 범죄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었다. 자기 변명의 정신은 거짓말하는 자의 아비에게서부터 시작되어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나타내었다. 이런 종류의 자복은 성신의 감동을 받아 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 죄를 속임이나 외식이 없이 자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불쌍한 세리와 같이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까닭이다.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바리”에서 지불된 대가를 이해할 것이며, 참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게 할 것이다. (www.sostv.net 살아남는 이들 79호)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

 

말조리 루이스 로이드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 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 내실 수 없으셨을까?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사시기 위하여서 다른 선물을 마련하실 수가 없으셨을까?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


예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단 마귀와 싸우는 우주적인 전쟁의 의미도 내포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다. 그 전쟁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거나 끝나지 아니했다. 십자가는 창조 이전 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생긴 이유는 사단이 하늘에서 반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 났도다” (에스겔 28:13-15).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이사야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꼬이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천사들 중 삼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 - 필자 주)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4,7-9). 여기에서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용은 말씀 그대로 사단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단이 인류를 꼬인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꾀이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챦다고 꼬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역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고소하였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기만술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불순종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 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그러므로 하나님께 두가지의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 한다.


하나님의 응전, 십자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시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십자가는 에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의미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이 세상의 타락의 모습을 통하여서 지난 수천 년간 증명되어 온 바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이 하늘의 천사들과 거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품성의 차이점을 너무도 명백하게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었다. 사단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의 주장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온 우주가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랄한 마귀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자들이 없어졌다. 십자가에서 악한 마귀의 본성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큰 대조가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서게 되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는 영원히 패배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되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사단은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한다. 그렇다고 그는 십자가를 없이 할 수가 없다. 십자가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바닥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사단의 기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선악간의 전쟁이 십자가에서 결정지어지긴 했으나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이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작전을 세운 것이다.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이 믿더라도 십자가의 참 뜻을 오해시켜 버리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묘한 작전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울지 모르는 기만술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주장에 맞게 색칠을 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원래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은 꼭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폐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꼬여 왔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인류의 조상들을 기만한 방법이 아니였던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며, 갈보리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찬송하며 설교하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나 찬송은 사단에게 조금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며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가 마치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도록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를 믿는 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권한다. 십자가를 믿는 한 죄를 계속 지어도 충분한 용서 속에 있으니 염려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믿고 살도록 격려 한다. 사단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믿게 만든다. 십자가가 마치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구원을 준 것으로 믿게 만들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자유케 해 주신 양으로 생각케 하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로 만들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 9:14).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율법을 그렇게 쉽게 폐해 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쉽게 율법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 사도 바울이 설명한 예수께서 십자가로 폐하셨다는 것은(골로새서 2:14-16 참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문의 율법 곧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세의 율법 즉, 절기들이나 종교 의식적인 절차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찬송하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감사하자!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목적을 잊지 말도록 하자.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범람하고 있다. 그것은 마귀가 뿌린 씨들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착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죄인들을 변화시키어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살 수 있기에 안전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서 구원하신 것이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죄를 짓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겠다. (www.sostv.net 살아남는 이들 78호)

 

지옥설은 불교 이교사상이 교회로 가지고 들어온 오류 중의 오류입니다. 지옥설은 하나님을 괴물내지는 독재자로 몰고 있는 사탄의 기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원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지옥으로 번역된 원어는 무덤 혹은 힌놈의 골짜기를 일컫습니다.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8-29)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  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15:51-53)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4:16-18) 죽은 다음 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면 왜 부활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바로 알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동기를 되찾아야 하며 진정한 부활신앙을 되찾아야 합니다. www.sostv.net

 

지옥불은 영원히 계속 타나요?


사람들의 지옥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중에서 한가지 공통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지옥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서 뱀이나 구렁이에 감긴 채 영원토록 고통당하게 된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이생에서 악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죽어서 귀신이 되어 영원히 허공을 방황하게 된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악인은 죽는 순간에 지옥불에 떨어져서 영원토록 유황불 속에서 지글지글 타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옥에 관한 각기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불교나 각종 토속신앙에서 말하는 지옥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지옥불은 영원히 탄다고 믿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에는 악인들을 벌하기 위한 '꺼지지 않는 불'이 나오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탄다는 말이 아닌가요?" 정말 그것이 무슨 뜻일까? 사단과 악인들을 불사르기 위해, 즉 악인들의 형벌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불은 과연 영원히 불타는 것일까? 그 지옥의 불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듯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은 이에 대해 ゾ昰繭箚?말하고 있는가?

먼저 성경 말씀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지옥불"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절들을 찾아 연구해 보자.

"영원한 멸망의 형벌" 의 의미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데살로니가후서 1:8,9.

여기에 쓰인 "영원한 멸망의 형벌" 이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결과가 영원토록 유지되어서 악인의 생명이 영원토록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형벌의 결과로서 영원한 멸망, 즉 영원히 멸망되어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부활이나 생명에 관한 희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세세토록, 영원토록"의 의미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0.

아마 가장 쉽게 오해 할 수 있는 지옥에 관한 표현은, "세세토록"(forever and ever)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기록한 사도 요한의 표현일 것이다. 사실상, 성경에 나타난 이런 성경절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한다면,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표현들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진정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조사해보면, "영원, 또는 세세토록"이란 말이 57번이나 나오는데, 이 말이 언제나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도록 하자.

실례 1. 그 노예는 영영히 살았는가?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노예법에는, 노예가 평생토록 주인을 섬기도록 규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한 법을 이야기 하면서, "송곳으로 귀를 뚫고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출애굽기 5:6). 그러나 노예가 영원토록 주인을 섬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가 그의 주인을 섬길 수 있는가? 물론, 죽을 때까지 밖에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영영히" (forever)란 말은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의 생명이 마쳐질 때까지 주인을 섬기라는 뜻이다.

실례 2.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영원히 살았는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나는 그녀의 아들인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영영히 있게"하였다(사무엘상 1:22). 그러나 이어지는 28절에서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린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영원" 이란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한정한 시간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사건이 완전히 마쳐질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고래 배속에 한동안 머물렀던 요나조차도 자신이 머물렀던 기간을 "오래도록" 즉, 영어로는 "forever"(영원토록) 으로 묘사하였던 것이다(요나서 2:6).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할 지도 모른다. "하늘에 간 의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하늘에 간 의인들의 생명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물론, "영원토록" 이라는 동일한 표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사용되었다. 그러나 두 부류가 처해 있는 상황 사이에는 한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의인들은 불멸의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처럼 영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은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이란 말이 의인들에게 적용되었을 경우에는 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해석해야 되지만, 그것이 불멸의 생명을 받지 못한 악인들에 적용되었을 경우에는, 그것은 형벌의 불 가운데서 타서 없어질 그들의 육체와 생명이 살아 있는 동안(기간)만을 의미한다. 결코, 의인과 악인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점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실례 3. 예루살렘 성은 현재 꺼지지 않는 불로 타고 있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순종치 아니함으로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이 꺼지지 않을 불로 삼킴을 당할 것을 예언하였으며(예레미아 17:27), 그 성이 타서 재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역대하 36:19-21). 이 문제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는, 성경에서 "꺼지지 않는다" 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결코 꺼지지 않고 영원토록 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불은 아무도 끌 수 없으며, 그 불이 태우는 대상들이 완전히 재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탄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17:27에 있는 말씀을 보자.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예루살렘 궁전이 불에 타고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전소시킬 때까지 불이 탈 것이라는 뜻이다. 지옥불은 아무도 끌 수 없는 불이며, 한번 불붙으면 마귀와 악인들을 완전히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불을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는 "영원" 이란 말과 "영원토록 지속할" 이란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성경 가운데서 그 말의 정의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나 표현들이 이스라엘의 신, 구약 시대 당시에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현대적인 감각에 맞추어서 그것들의 정의를 내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뿌리 깊은 번역상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불이란 결코 꺼지지 않을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례 4. 소돔과 고모라는 아직도 영원한 불로 타고 있는가?

유다서 7절에는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만일 소돔성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고 있다면, 지금도 소돔성은 불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중동 땅에 있는 소돔성이 오늘날까지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소돔성이 "영원한 불로" 태워졌다는 말의 의미와 그것이 주는 교훈이 베드로후서 2장에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베드로후서 2:6. 바로 이것이 그 의미이다. "영원한 불"의 의미는 영원토록 타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소돔성을 재가 되게 했던 그 "영원한 불"은 악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가해질 하나의 표본(샘플)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는 영원히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것과 똑같은 종류의 불이 악인들을 화염으로 태우게 될 것인데, 바로 그것이 영원한 불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악인들을 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나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 4:1,3.

어떤 다른 언어로도 지옥불을 이렇게 분명하고도 힘있게 설명할 수는 없다. 지옥불은 영원히 타는 것이 아니다. 지옥의 불은 영원히 존속될 결과를 남길 때까지 타게 될 것이다. 즉 모든 악의 뿌리인 사단과 그를 추종하던 모든 악인들이 완전히 타서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질 때까지 탈 것이다.


그대는 정말,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마련해 놓으셨다고 그동안 믿어 왔었는가? 그래서 그분을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영영히 타는 지옥불에 인간들을 쳐 넣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고 마음 속으로 고민해 왔는가? 하나님은 그런분이 아니시다. 비록 악인들이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거절하여 자기 스스로 죽음의 결과를 거둬 멸망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겔 33:11 참조)

우리가 지옥을 묘사할 때, 앞에서 지금까지 배운,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서 지옥불의 광경을 묘사한다면, 얼마나 일관성있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옥불에 대해서 말할 때에, 성경에 없는 단어와 표현을 사용해서 묘사한다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을 말하게 되기가 쉽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상식과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편견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태워 재로 만들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보면서도, 여전히 악인들은 영원토록 살아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고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를 함께 연구한 독자들은 진리와 편견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영영히 불타는 지옥을 만들지 않으신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하자! (www.sostv.net)

 

지옥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옥은 어디에 있을까? 우주의 저편 어디쯤에 있는 불구덩이일까? 아니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유황불의 바다일까?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지옥에 대하여 상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에 대하여 그렇게 막연하게 상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지옥의 위치와, 악인들이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지옥불에 던져지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지옥의 위치
성경의 저자 중에서 사도 요한처럼 지옥(유황불)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분명하게 기록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사도 요한은 천년기(millennium)가 끝날 때에 일어날 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요한계시록 20:7~9. 요한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악인들)를 소멸"한다고 하였는데, 악인들은 어디서 이 유황불을 받는가? 성경은 악인들이 지구의 표면에서 유황불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희(악인들)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계 20:9. 그런데 성경은 악인들이 당하게 되는 "둘째 사망"과 "불 못"을 연관시켜서 함께 언급하고 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요한계시록 20:14. 이렇게 요한은 악인들이 "불못"에서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불못은 이 땅 즉, 이 지구에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말하는 지옥의 위치
베드로는 성경에 사도 요한이 말한 "불못"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후서 3:7. 베드로는 활활 타오르는 불로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사르게 될 하나님의 날이 이 지구에서 펼쳐질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는 이 지구가, 악인에게 가해질 최후의 심판과 멸망을 위해서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사야가 말하는 지옥의 위치
이사야 선지자도 악인들에 대한 형벌이 이 땅 위에서 있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복하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이사야 34: 8, 9. 선지자는 화염 속에 쌓여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시냇물과 티끌이 역청과 유황의 산화물로 폭발하는 모습을 말하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보복이" 라고 말하였다.

다윗이 말하는 지옥
다윗도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 증거를 더 확실히 하고 있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시편 11;6.  위의 글들을 보아 다윗이나 이사야 선지자도 요한이나 베드로가 악인의 운명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거의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형벌의 장소(땅 위)와 형벌의 도구(불)에 관해서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의 최후 심판의 날에 유황불의 화염 속에 휩싸이는 지구가 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옥에 대한 확실한 진리이다. (www.sostv.net

 

지옥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나요?


지금까지 지옥의 위치는 어디이며, 악인은 죽는 순간 형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후에 있을 심판 날까지 죽은 채로 무덤에 그냥 남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지옥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며, 세상 끝에 있을 심판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며, 악인의 형벌은 언제 어떻게 있게 되는 것일까? 지옥이 생기는 시기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예수의 재림과 세상 끝, 그리고 천년기에 대하여 연구해야만 한다. 이제부터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보기로 하자.

예수 재림과 세상 끝

성경에서 세상 끝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말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 가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남겨 주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신 후에 준비된 백성들을 데리러 다시 오신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은 끝이 난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와 그 때에 구원받을 의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예수 재림과 지구의 황폐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 관하여 이미 구약시대에 선지자 다니엘은 예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며(단 2:35),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도 이 세상에 칠 재앙이 내릴 때에 "만국의 성들이 무너지"고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다고 기록하였다(계 16:19,20). 예수께서 재강림 하실 때에 지구는 참혹한 폐허가 되는데, 이 때 모든 의인들은 공중으로 이끌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지만, 무덤 속에 있던 죽은 악인들은 의인들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덤 속에 있을 것이며, 예수 재림의 광경을 살아서 지켜보는 살아 있는 악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황폐된 이 땅위에는 악인들의 시체들만이 뒹굴게 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과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7~10).


사도 요한도 재림 시에 있을 악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계시의 장면을 보았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계 14:19,20). 그러므로 예수께서 의인들을 데리시고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신 후에 죽은 악인들의 시체만 지상에 남게 되는데, 이러한 황폐한 지구의 모습을 요한계시록은 새들이 죽은 악인의 시체들을 뜯어 먹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과 종들이나 무론대소 하고 모든 자들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계 19:17,18).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천년기
요한 계시록 20장에는 천년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지옥이 생겨나는 시기를 알려면 반드시 천년기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천년기의 언급과 함께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는 일과 둘째 사망과 불못에 던지우는 사건이 연관되어져서 나오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 본 예수 재림 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기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하자.

"천년"(millennium)이라는 표현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오직 요한계시록 20장 1~7절에만 6번 언급되고 있는 특이하면서도 범위가 국한되어 있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천년기에 대해서 공부할 때에는 이 성경 구절들의 앞뒤 문맥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가장 안전한 해석 방법이다. 특히,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내용임이 확실하므로,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 윤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추측과 선입관을 버리고 본문을 주의깊게 읽어 보자.


요한계시록 19장 후반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장면과(11~16절), 재림 시에 악인들이 멸망당하는 장면이 나오며(17~18절), 계속해서 이어지는 20장 초반에는 천년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에는 천년기를 전후로 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순서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부터 천년이 지난 후에 악인들이 부활하여 유황불로 심판받게 되는 전과정이 순서적으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보다 정확한 해석을 위하여 한글로 번역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여 공부해 보자;

1. 천년기는 언제 시작되는가? (계 20:1~3절)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 그가 그 용을 잡으니 곧 마귀요 사탄인 옛 뱀이라. 그를 천년 동안 묶어두니." 1절.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한다. 그와 동시에,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어디로 내려오는가? 지구로 내려온다는 것을 문맥에서 알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사단이 천년 동안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결박함으로써, 천년기(millennium)가 시작된다.

2. 의인들의 천년왕국은 어디서 실현되는가? (계 20:4)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 그들은 그 짐승에게나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를 그들의 이마 위나 손에도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살면서 왕노릇하더라." 4절.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의인들은 승천하여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살면서 통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구에서 복천년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엄청난 재난에 의해서 황폐되었고, 수많은 악인들의 시체가 뒹구는 지구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있던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기록한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라(살전 4:17). 의인들은 승천하여 어디에서 주와 함께 있는다고 하였는가?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라.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2절에서 "내 아버지 집"이라고 밝혀 주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3). 또한 천년기가 지난 후에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씀(계 21:2)을 보아서도, 여기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로 승천했던 성도들이 천년 동안 하늘에서 왕노릇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성경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도 요한은 예수 재강림 시에 있는 의인들의 부활을 가리켜서, 천년기 끝에 있는 악인들의 부활과 대조하여 "첫번째 부활"이라고 불렀다(6절).

3. 악인들은 천년기를 어디서 보내는가? (계 20:5)


"그러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 나머지는 천년이 끝날 때까지 다시 살지 못하더라" (5절). 4절에 이어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 나머지"는 누구인가? 예수 재강림 시에 죽었던 의인들은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는데, 이 때에 지구에 남아 있게 되는 모든 악인들을 가리켜서,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 가운데 그 나머지"로 표현하였다. 지구 역사에 존재하였던 모든 의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여 천년 동안 하늘에서 왕노릇 하는 동안에, 모든 악인들은 죽음의 상태로 지상에 있는 무덤 속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즉, 사단이 지구에서 천년 동안 결박당하고, 악인들의 시체가 천년 동안 지구에서 뒹구는 동안, 하늘로 승천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하게 된다.

4. 지옥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가? (계 20:7~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0장 초반부에서 "그(사단)를 끝없이 깊은 구렁(무저갱)에 던져서 가두고 그 위에 봉인하여 천년이 찰 때까지는 나라들을 다시는 미혹하지 못하게 하더라 그 후에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게 되리라" 고 말함으로써, 사단이 천년기의 끝에 잠시 동안 풀려날 것에 대한 힌트를 준 다음에(3절), 요한계시록 20장 후반부에 가서는 천년기(millennium)가 끝날 때에 사단이 잠깐 동안 풀려나면서 생기는 극적인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 천년이 끝나면 사단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 (7~9절).


천년기가 끝나면서 마귀가 천사의 결박으로부터 다시 풀려나는데, 바로 이 때 모든 악인들이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나온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5절). 이 때, 사단은 부활한 악인들을 한곳으로 끌어 모은 다음,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여 최후의 반격을 가한다. 사단을 선두로 해서 모든 악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려고 할 때 드디어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게 되는데(9절), 바로 이것이 부활한 악인들에게 죄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최후의 유황불 형벌이며 이것이 지옥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때 모든 죄의 원흉인 사단 역시 유황불의 형벌 속에서 불타게 된다.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10절).

자, 이제 지옥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적인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옥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가? 지옥은 예수 재림 사건으로부터 천년이 지나간 후에 지구에서 형성되는데, 사단과 악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려고 할 때에 하늘로부터 유황불이 떨어짐으로써 지상은 불구덩이로 변하는데, 이것이 지옥이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은 어떻게 다른가요?
첫째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었던 의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다시 살아 나는 것을 말하며, 둘째 부활은 죽었던 악인들이 천년기 이후에 형벌을 받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은 어떻게 다른가요?
세상에 태어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 죽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첫번째 사망이라고 하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잠 자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요 11; 11절 참조) 둘째 사망이란 천년기 이후 다시 살아난 악인들이 유황불의 형벌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는 것을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범한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치르는 죽음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기 위해서 죽으셨던 죽음은 바로 이 "둘째 사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를 의지하여 그분께 나오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악인들이 당하게 되는 두려운 둘째 사망의 고통을 치르셔야만 했습니다. 죄의 대가는 "둘째 사망 곧 불못"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 6:23에 기록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에 나오는 "사망" 은 "둘째 사망"을 뜻합니다. (www.sos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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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1

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comicom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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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5 02:09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창조되었는데 이 법에서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 안에 있는 길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씀 안에 있는 것, 즉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시는 언약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이 언약을 어긴 것이었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잃은 것이며 하나님이 아닌 사단의 말을 좆았으므로 사단에게 속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안에서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죄 안에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사망의 권세 잡은 자인 사단에게 속하였고 자범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완전하시므로 말씀을 취소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에게 언약으로 주신 말씀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남자의 씨, 곧 죄의 씨를 갖지 않은 인간입니다.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므로 죄의 씨를 갖지 않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 속에 직접 만드신 인간이어야 하고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죄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죽어야 할 인간이 죽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원죄와 자범죄가 없으시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 속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생명을 얻고 사단에게 속했던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지 행위의 선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생명 가진 자만이 생명이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뿌리 뽑힌 나무가 많은 열매를 매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행위의 선악을 따져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자, 없는 자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자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질문으로 탕자의 비유에 관해서는 탕자가 불신자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을 아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으로 돌아다닌 사람도 하나님께선 기쁨으로 맞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의 것들을 풍성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지 않는 자라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치러야 할 댓가가 예수님이 피 흘려 죽어야 할 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기에 고통 받으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가지만 생명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헛된 일입니다. 세상 살면서 깨닫게 될 때 누군가 전해 준 복음이 생명이 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어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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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juda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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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17:58

1. 죄의 값은 사망이다. 

공명정대한 하나님께서 취하실 심판기준으로는 공정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벌이 목적이 아니고 교화가 목적인 만큼)한데...

당연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번에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러번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렘 25: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2. 정녕 죽으리라.

(연옥,지옥 등 하늘나라 감옥도 등급이 있어야 하고, 죄질에 따라 나누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일반이라. 하나를 범한 자가 모든것을 범한 것이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는 죄는 죄라는 뜻이고 다만 그 의나 죄의 다소와 경중에 따라 달리 보응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후의 세계는(심판 전에라도) 그 등급(장소)이 다릅니다. 그 몇가지를 성경말씀으로 대변해 보겠습니다.

상계 : 낙원, 하나님의 제단 아래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계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지성소라고도 말함)

중계 : 음부 

시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전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하계 : 무저갱, 지옥

눅 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3.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하나님을 비유)의 태도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전혀 아들의 허물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죽은줄 알았던 내아들이 돌아왔다고 하시며, 목욕시키고 비단옷에 반지를 채워주고,소를 잡고 잔치를 열며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무조건 심판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공의로 심판을 하시는 이가 어찌 듣지도 못한 이를 그대로 심판을 하시겠습니까,

듣고도 불순종한 옥에 있는 영들에게라도 다시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벧전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4. 지은 죄값 때문에 우리를 만나주시지도 않고 꼭 죄값을 치르도록 해야하시는지?

이러한 교리는 꼼짝없이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해 무리하게 만들어진 측면은 없는지?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만나 주시지도 않는다고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다음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모든 죄를 사하시고 또 그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사 40:1-2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전심으로 찾고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만나야 합니다.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0:9-11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산이나 들이나 바다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교회나 골방이나 어디에서든지 사람의 계명과 교훈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깨닫고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요 4:19-2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 내용이 너무 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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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noch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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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17:36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절단 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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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gnos3832

답변채택률 28.1%

2008.01.03 15:57

문제를 장술하니 답변도 장술하는 군요.

 

욕심이 죄를 부르며 죄가 장성하니 사망에 이른 다는 말입니다.

 

죄는 속히 없에야지 어둠에 지하 공간에서 술과 담배연기와

여자 까지 있으니 몸은 쇄약해지며 몸이 성하지 못하니

아편까지 접하게되여 결국 죽음에 이른 다는 말입니다.

 

속히 예수님의 4복음서를 읽어

예수님의 본과 가르침으로 죄를 회개하여

새사람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진리가 내 안에

내가 예수님안에 거하며 살때

 

아편이 없어도 내가 기쁘고 평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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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교 교리 중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점에 관하여

hopeidinput

답변채택률 38.0%

2008.01.03 23:16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죄를 저지르면 죽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죄를 저지르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그러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아닙니다.

 

천국에 못간다는 것을 보통 죄를 저질러서 못간다고 종교적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죽기때문에 못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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