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버 교실/07 영화 감상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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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Duck 2010. 5. 7. 00:00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Pay It Forward, 2000) 서양영화(80년이후)

2009/03/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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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멜로/애정/로맨스 | 2001.02.17 | 122분 | 미국 | 12세 관람가

감독 : 미미 레더

출연 : 케빈 스페이시, 헬렌 헌트, 할리 조엘 오스먼트, 제이 모어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영화.

트레버 역의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눈빛...

아마 영화에서 말하는 세상이 오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이 많이 사라져가는 요즘같은 시대에

꼭 필요한 좋은 영화이다.

어렸을적 화상을 당해 괴사한 피부 때문에

이성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는 유진(케빈 스페이시)과

그런 그 사람을 사랑하는 알린(헬렌 헌트)의 착한 사랑도 참 좋다.

하지만 영화의 앤딩은 너무나도 안타깝게 끝난다.

 

 

1. 인간성 상실의 시대..

 

산업 혁명을 계기로 이룩된 물질문명이 인류의 생활에 편리를 가져오는데 이바지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지만 과연 이런 발전이 우리를 보다 나은 사회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개발과 발전의 뒤안길에는 우리가 얻는 것 만큼 잃는 것도 많다..
눈부신 과학의 발달은 대량 살상 무기를 출현시켰고 자연의 훼손 뿐 아니라, 각종 공해를 낳아 인류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또한 합리적, 실용적 사고방식 명분아래 초유의 스킬(Skill)을 보급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을 대할 때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고를 성행시킨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사회의 가치 평가가 생산과 부를 표준으로 삼기에 이르면서 현대 사회는 물질만능주의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결과 나타난 것이 인간 경시의 현실이며, 이것이 심화되어 인간소외의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물질과 부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고 인간마저도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교체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작업의 성과나, 일의 수행능력에 의해 평가 받게 되었으며, 인격이나 그 외에 다른 정신적인 부분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덕분에 스스로를 상품화하는게 당연시하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나보다 못한 자들을 밟고 일어서는 것이 "성공의 방법"이라고 착각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인간 소외, 인간성 상실"의 시대란 말은 모두 물질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인간에 대한 관심을 상대적으로 소홀히한데서 나타나는 윤리적인 병폐현상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불신이 사랑 대신 증오를 낳고, 세상에 대한 환상 대신 환멸을 품게 만든다..
더군다나 세상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정보화 시대의 진입으로 변화의 속도와 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세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 하거나 체념해 버린다.

그리곤 시대의 낙오자로, 아니면 인생의 실패자로 전락하고 만다
주위에 절망하고, 소외받는 사람이 있어도 그들을 위로하거나 챙겨줄만한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무관심이 만연하고, 냉소주의가 판을 친다..
또한 TV와 컴퓨터의 등장은 우리를 집안에 가두고, 사고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렸다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까지 빼앗고 말았다..

<불신의 시대>,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이라도 "세상의 변화"를 바라지만, 누가?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현실적 배경에서, 12살 꼬마 트레버(할리 조엘 오스먼트 분)의 기발한 제안은 우리에게 많은 부끄러움과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유쾌한 음모"는 이런 모순 투성이의 인간 세상 속에서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2. 트레버의 제안

 

 

 

사람들은 너무 겁을 많이 먹는 것 같아요..

어떤 변화에 대해서...

세상이 항상 그렇게 엿같진 않은 것 같아요

처지가 아무리 나빠도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바꾸기가 힘든가봐요

그래서 결국은 포기하고 자신한테 지는거죠..

 

 

 

한 사람이 2~3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그들은 또 각각 2~3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이처럼 꾸준히 인적 연결고리를 확대하면 기하급수적으로 그 수가 늘어난다. 그리고 처음 회원을 확보한 사람은 자기 아래로 주렁주렁 연결된 모든 사람을 관리하면서 그들 판매액의 일정부분을 수익으로 챙긴다.

우리나라에서 서민들의 피해가 심각했던, (흔히 피라미드라고 부르는) 다단계 판매 또는 네트워크마케팅이라고 부르는 판매방식이다. 3명만 확보하면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판매액의 일정부분을 수익으로 얻을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자신의 재산은 물론, 가까운 친지나 친구들에게까지도 금전적 피해를 입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던 문제 많은 마케팅 전략이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트레버는 이 이론에 <물건의 강매>가 아닌 <사랑>을 치환시킨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찾아 내가 도움을 주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다른 세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의 도움을 베풀라고 제안한 것이다....

참고로 한 명이 세 명에게 선행을 베푸는 이 운동을 전개할 때, 처음엔 3, 그 다음엔 9, 또 그 다음엔 27..

이런 식으로 16차례를 거칠 정도면 우리 나라 인구 4천만 명에게 도움의 손길이 닿는다는 어마어마한 이론적 수치가 나온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제안도 제안이거니와 발상의 이면에 숨겨진 "세상에 대한 희망" 을 들여다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세상에 대하여 불평만 쏟아내던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는지?

또 귀찮다는 이유로 도움의 손길을 주기보다 무관심으로 일관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정치적 구호가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다....

나 아닌, 타인을 위한 작은 실천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불씨가 되는 것이다..

트레버의 제안이 유독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위한다건 당연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까닭이다..

 

 

3. 실화같은 허구...

 

이 실화와 같은 훈훈한 이야기는 사실, 캐서린 라이언 하이디의 소설 <Pay It Forward>가 원작으로 일찌기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이후,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영화, 연극, 뮤지컬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미국 내에서 곧바로 "Pay It Forward" 재단이 설립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Pay It Forward> 운동은, 미국 전역에서 사회 운동으로 확대되어 현재 캘리포니아, 노바토의 <힐 미들 스쿨>등 미국 전역의 초중고 학교뿐 아니라 <샌터바바라 사회재단>등 많은 사회 단체에서도 <Pay It Forward>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단편 소설작가 <캐서린 라이언 하이디>는 20년의 사유 끝에  <Pay It Forward>를 낳았다.

20년 전, 그녀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그 이후 그녀는 삶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고 이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의 구상에 들어갔다..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Pay It Forward>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트레버>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트레버가 숨쉬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더 따뜻한 곳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12세 소년이 살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지해 있는 듯 보이지만, 결코 정지해 있지 않다..

숨가쁜 움직임에 가려져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겹겹의 수많은 갈피를 가진 끝없는 소통의 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빈곳을 더듬는 삶의 치유제가 된다..

비록 지금은 미미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그것만이 <불신의 시대>를 종식하고 새로은 삶의 풍경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4.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등장 인물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단연 오이진 시모넷(케빈 스페이시 분)...

다름아닌 그가 트레버의 담임 선생이자, 학생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실천"을 주문한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세상을 바꿀만한 어떤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는 마음의 문을 닫고 그 누구와도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일그러진 얼굴에 대한 절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강한 현실에 대한 체념의 정서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식에 대한 탐욕도 따지고보면 주위의 따가운 눈총에 대한 반발이거나 혹은 도피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그의 지식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채, 권태로운 일상과 나른한 정신 분열증적 언어들만 내뱉는 사적인 영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은 모순된 현실에 저항하고 개입할 의지를 포기한 우리들의 모습이나 다름없다...

단지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기계적인 질서에 연연할 따름이다...

수업에 한번도 늦은 적이 없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믿는 그의 방어적 신념에 불우한 과거의 터널을 통과한 한 개인의 황폐한 정신을, 몸을 웅크리며 고독하게 삶에 천착하는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누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싫고, 또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서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상의 변화>를 절감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선과 악, 기쁜과 슬픔의 감각 자체가 마비되어 현실에 대한 참여 의식 자체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하루 하루가 덧없고, 또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된다...

피해 의식(혹은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불행했던 과거의 굴레를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에 의한 시모넷의 화상은 각박한 현실에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가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름다운공식’을 실천에 옮기는 그 과정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등장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치 자신의 일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5.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영화에서 시모넷 선생의 얼굴은 아버지의 광기에 의해 화상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소설에서는 베트남 참전에서 상처를 입은 것으로 그려진다..

또, 트레버가 도움을 준 최초의 3명도 시모넷, 부랑자는 같지만, 소설에서는 엄마 대신 편의점 주인 그린버그 부인을 도와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달라진 내용이 감동을 덜어낼만큼은 아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진솔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물론 "트레버의 죽음"이나 "촛불 추모" 등  다소 작위적인 내용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헐리우드 실력파 배우 헬렌 헌트(엄마 역)와 케빈 스페이시(이오진 시모넷 역)의 출중한 연기력이 그 단점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준다...

아역 배우면서 왠만한 기성 배우보다 더 유명한 <식스센스>의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열연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마지막 인터뷰 장면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의 표정 연기를 보다보면  그가 왜 "헐리우드의 신동"이라 불리는지 저절로 알게된다.....

엄마와 할머니의 "용서와 화해"도 결코 빼뜨릴 수 없는 부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가장 근원적이고 기초적인 단계가 바로 "인간에 대한 증오"나 "미움"부터 걷어내는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결국 자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생각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아닌, 타인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느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자신이 걸어온 길을 꼼꼼히 되돌아보고, 사회 속에 속해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와 해야할 일에 대하여 겸허히 수용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