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한마디/따온 글

프란치스코 교황의 람페두사 강론(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서)

DoDuck 2014. 8. 14. 19:58

교황 람페두사 강론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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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착좌 뒤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 섬을 찾았다.

람페두사 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이다.

교황은 지난 8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주에 속한 람페두사를 방문해 ‘불법이민자 수용소’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강론을 통해 이민자들에 대한 국제적 무관심을 비판하고 양심의 각성과 형제애를 촉구했다.

람페두사는 튀니지로부터는 불과 120㎞ 거리에 있어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곳인데, 유엔 난민기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8,400여 명의 이민자가 이 섬으로 피신했고, 교황이 방문한 당일에도 166명의 불법 이민자들이 배를 타고 이 섬으로 밀항해 왔다.

이민자들은 대개 구명조끼 등 기본적인 안전장비도 없이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리며 정원을 넘어선 배를 타고 밀항을 시도하는 만큼 사고의 위험도 높다.

2012년 9월에는 튀니지 이민자 136명이 타고 가던 배가 람페두사 섬 인근에서 전복돼 50여 명만 구조됐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년 7월 15일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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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람페두사 섬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바다에 꽃다발을 바치고 있다.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람페두사에서 한 강론 내용이다. 아프리카 난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지만, 세월호 가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질책하는 목소리로도 들린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강론 내용을 문규현 신부의 동의를 받아 싣는다.

'이주자들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다. 희망의 배가 죽음의 배가 되고 있다.'

... 수 주 전 이 비극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이런 비극이 빈번하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줄곧 심장이 가시로 찔리는 듯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기도하고,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양심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제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나 저는 먼저 여러분들, 람페두사와 리노사의 사람들, 여러 연대단체들, 봉사자들과 안전요원들 등,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항해하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소수입니다만, 연대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중략)

우리 현대인들은 이웃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신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에 빠져버렸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형제를 보면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가련한 영혼이여!" 그리곤 그냥 가던 길을 가버리는 겁니다.

안락을 추구하는 문화는 오직 우리 자신만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사랑스럽지만 허상 가득한 비누거품 속에 살도록 합니다. 그것들은 이웃에게 무관심하게 만드는 덧없고 공허한 망상에 빠져들게 합니다. 참으로 ‘무관심의 세계화’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화 된 세상에서 세계화된 무관심으로 타락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영향 없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건 내 일이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듭니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중략)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 (중략)

헤로데는 자신만의 안락함을 보호하려고 죽음의 문화를 뿌렸습니다. 그 자신의 비누거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숨어있는 헤로데를 없애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당신의 물음을 듣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네 형제의 피는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