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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몸의 영성 / 김진 박사

DoDuck 2014. 2. 5. 16:52

몸의 영성



1. 몸 이해와 영성- 몸의 영성적 현상학


서구 문명사를 되돌아 볼 때 ‘몸’이라는 실재만큼 우리의 인식과 현실에서 억압받고 탄압 받은 실체도 드물 것이다. 이러한 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결국 인간을 이해의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즉 몸의 왜곡은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보이는 요소(몸)와 보이지 않는 영역(영혼, 마음, 감성 등등)간의 하나의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게 함으로 인간을 단면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것이다.

영성과 관련해서 볼 때도 영성에 대한 많은 오해는 바로 ‘몸’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의 가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영성을 왜곡 또는 협소화 시키거나 비현실화 시키는데 일조했고, 그 결과 영성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이나 몸에 있어서 영성의 중요성이 간과되었다. 몸과 영성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결코 만날 수 없는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영성에 대해 깊은 이해와 그 영성을 심화시키는 다양한 영성수련이 현실의 신앙생활에 뿌리 내리기 원한다면 몸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인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영성에 대한 왜곡의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실천은 결국 영성에 대한 기존이해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몸에 대한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영혼 개념이 발전할 수 있으며, 영적인 생활의 통일성을 깨닫지 못할 때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1)이다. 이런 의미에서 점에서 몸 이해의 지평은 영성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몸은 관계체이다


몸이 지닌 영성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몸에 대한 코페르니크스적인 이해 변화가 요청된다. 그 새로운 이해 중의 하나는 내가 지닌 이 몸은 하나의 관계체(關係體)라는 사실이다. 내 ‘몸’은 나 개인의 소유물 자체로서 타인과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관계 그물망 속에 연결되어 있는 의미 덩어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몸은 개체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관계적 실재이다.

이러한 이해의 단적인 예를 창세기 인간 타락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 타락설화를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열매를 따먹은 이후 이들의 첫 번째 행동은 자신들의 ‘몸’이 부끄러워 큰 나무 잎을 가지고 각자의 몸을 가리는 것이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서로가 몸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는데 죄를 짓은 이후에 서로가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이 설화내용에서 성서가 말하는 몸에 대한 이해의 단면을 읽게된다. 서로의 몸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상호 완전하고 자유로웠던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을 시사한다.

그 관계의 상실이 서로의 몸에 대한 태도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몸이라는 실체가 단지 인간이 지닌 개체적인 ‘물질’이라 아니라 모든 실재들 사이에서 의미로 연결된 관계체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은 비단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주만물(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실체인 것이다.


몸은 영성체이다


몸에 대해 우리가 변화해야 될 또 하나의 인식은 몸은 하나의 영성체(靈聖體)라는 사실이다. 몸은 흔히 생각하기 쉬운 대로 물질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형체가 아니다. 우리가 만지고 움직이는 몸은 이미 인간을 존재시키는 모든 요소들이 모아져 있는 영적인 실재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상응관계의 밀접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 몸과 영혼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구조로 엮어져 있어서 몸 그 자체가 하나의 영성체임을 주장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영성은 -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고 표출되는 - 몸의 현상이다. 우리의 영성이 신비한 영적인 체험의 축적을 통해 성숙하고나 체험된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은 몸 외부에서 발생하는 몸과 유리된 ‘순수한’ 영적 체험이 아니며 그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몸의 현상이다. 영성은 몸에서, 몸을 통해 형성되고 몸으로 발현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제는 ‘몸과 영성’(Mom and Spirituality)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 ‘몸의 영성’(Spirituality of Mom)을 이야기 할 때이다. 전자는 몸과 영성을 먼저 분리해 놓고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태도가 농후하다.

이러한 이해는 양자가 상호 아무리 유기적인 관계임을 역설한다고 하더라고 우리의 사고(思考)의 관습상 두 관계의 긴밀함은 쉽게 지나치기 쉽고, 그 인식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그것을 적용하기란 결코 쉽지 않음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몸과 영성이 서로 나눌 수 없는 요소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영성이 몸에 출발하고 몸에서 모아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제 ‘몸과 영성의 관계’를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몸의 영성’을 이야기함이 적합하다.


몸의 영성


몸의 영성은 우선 몸이 지닌 ‘몸의 영성적 의미’를 회복시킨다. 이것은 영성수련을 몸의 수련이나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지어 사고하고 실천해 오고 있는 인도의 요가수련에서도 그 단면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몸의 영성에 관심 할 때 그 영성은 그 몸의 일상적인 움직임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또 표출된다는 사실도 명확해 진다.

몸의 영성을 논할 때 비로소 각종 사이비적이고, 탈 현세적인, 그리고 비일상적인 영역에서 난무하는 각종 사이비적인 영성수련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동안 기독교가 영성을 강조한다는 미명 아래 사람의 몸을 억압하거나 등한시했던 시도는 결국 영성의 가장 큰 토대를 무시한 우매한 처사였다. 몸의 쓰임을 절제하지 못하는 목회활동이나 신앙생활은 그래서 결코 열매를 얻을 수 없다.

다른 한편 지나친 금욕이나 몸에 대한 자학적인 행위를 통해서 영성의 깊이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몸의 현상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그 몸이 지닌 의미를 추적해 보는 적극적인 몸명상이 요구된다. 몸에 대한 명상은 몸의 본래적 의미와 가치실현의 통로이다.2) 몸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본래가치를 회복시키는 ‘몸명상’이 영성수련의 가장 기초수련이다. 나의 구체적인 몸이 나의 영성을 꼴짓는다.

몸 안에 영이 있을 뿐 아니라 영(성령) 안에 몸이 있다. 내 몸을 둘러친 영(성령)속에서 움직이는 이 몸에 따라 내 영이 드러나고, 영 따라 몸이 움직인다. 이것은 마치 물 속에서 수영하는 내 몸에 따라 물이 움직이고, 물의 흐름에 따라 내 몸이 영향 받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몸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없이 몸의 영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2. 몸은 우주(宇宙)다.


몸의 영성이 지닌 내용을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몸이 우주라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몸은 우주다’라는 표현은 단지 상징적인 표현이나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다. 몸이 우주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세 가지 차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이 몸과 우주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뜻하는 것이고, 둘째는 본래 ‘우주’(宇宙)로서의 몸은 우주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담지 한다는 의미이며, 셋째로 실체적으로 몸 그 자체가 바깥 우주와 같이 하나의 질서를 지닌 하나의 우주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몸과 우주와의 관계


우리가 알다시피 동양에서는 몸과 우주와의 긴밀함을 ‘몸 자체가 우주의 소산물’이라는 주장으로 극명하게 표현해 왔다. 동양적인 사고에 의하면 몸은 천지 기운의 흩어짐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체이다. 여기서 ‘몸’이라는 우리말의 어원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몸이라는 단어는 ‘모이다’에서 ‘모음’으로, 그리고 ‘모음’에서 ‘몸’으로 발전된 것으로 본다. 즉 우리가 지니는 이 몸은 분산되어져 있던 많은 기운들이 모여서 형성된 실체이며 그것을 바로 동양에서는 천지 기운의 모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란 기의 聚散(모임과 흩어짐) 과정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떠한 개방적 유기체적 당위이다.”3) 이처럼 몸은 보이지 않는 기(氣)를 통해 이 우주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실체이다. 그것의 단적인 예는 이 우주 변화에 인간의 몸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주와 몸은 상호교감 한다. 그리고 상호 교감은 상호 주체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몸이 우주를, 우주가 몸을 일방적으로 조정하거나 다스릴 수 없도록 형성되어 있다.

만약 이 몸과 우주의 상호 교감체계가 무너지거나 둔감해졌을 때 몸은 몸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것은 영성의 죽음을 의미한다. 몸은 우주에 상응하는 존재로서 그 우주에 속한 부분으로 보이지만 그 부분은 전체를 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몸은 피동적인 반응체가 아니라 우주와 교감을 나누는 적극적인 존재이다.

몸의 영성은 몸과 우주와의 자연스러운 교감을 중요시한다. 우주의 살아있는 기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는 호흡훈련의 기초이다. 바깥 기운을 나 몸의 기운으로 전환하는 이 영성수련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도의 요가는 기본적으로 호흡제어의 수행을 통해 생명을 기운을 가라앉힘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행에서 발전했다.4) 몸의 영성은 우주와 다양한 교감을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우주의 시.공간성을 담지한 몸


몸은 그 어떤 몸이든지 이 우주와 세계 속에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담지 한다. 하나의 실체로 이 몸이 나타나기까지 이 몸은 수 십 억 년의 시간성이 응집되어 있다. 이러한 몸의 시간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나이로 치부될 수 없다. 그 몸 안에는 태초와 영원의 시간을 담고 있는 우주의 시간이 함께 하고 있다.

몸은 우주의 공간성에 참여한다. 몸이 공간성을 담지 한다는 것은 몸이 정적인 실재가 아니라 동적인 실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몸의 움직임은 바로 몸의 자기 표현이다. 나의 몸은 “독자적인 공간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나의 여러 가지 움직임은 서로서로 ‘곁에’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간에 들러 싸여져 있는 것 같다.”5) 몸이 자기 공간성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 바로 자유획득의 과정이요 그 몸의 공간성 확보는 몸의 자유로운 표현으로 이어진다.

우주의 시공간을 담지한다는 말은 한편에서 ‘기억체로서의 몸’, 다른 한편에서는 ‘몸의 운동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경험의 정확한 기억처가 바로 몸이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할 때 잠시 다른 생각에 젖어 있다가 그 생각에서 벗어나면 자신이 계속 운전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몸의 기억 스스로 운전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심겨진 기억보다 몸의 기억은 더 오래 지속된다. 이 몸에 배어있는 기억이나 습관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영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몸의 영성은 우리 몸에 베어있는 갖가지 잘못된 습(習)들을 거부하고, 몸의 작은 움직임에조차 관심을 기우린다. 몸의 영성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고, 그 몸의 움직임이 나의 영성에 영향을 민친다.


몸 그 자체가 무한한 우주이다


몸과 우주의 긴밀한 관계성이나 우주의 시공간성의 담지는 결국 몸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는 말로 귀결된다. 몸은 이 자연우주 현상만큼이나 다양함과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우주이다. 만약 세포의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실체적으로도 우리의 몸이 이 우주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에 경이로운 탄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물론 몸이 그 외부에 존재하는 우주와 다르지만 몸은 이미 이 우주가 지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몸은 천지 사이의 만물 가운데 하나의 물에 불과하지만 천지의 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6) 우주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몸은 “이 우주의 모든 경험의 과정이 축적되어 있는 체계이다. 즉 나의 몸 속에는 이 우주의 전과정(entire process of the universe)이 축약되어 있다. 즉 이러한 축약된 상태는 전 우주의 진화과정의 생성성 다시 말해서 역동적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7)

우주로서의 몸은 자연우주처럼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세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몸은 계속 창조되고 있고 파괴, 소멸되고 있다. 몸의 영성은 이 창조와 파괴 중 그 어느 한쪽을 무시하거나 인위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세포의 변화나 몸 기관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관심 한다. 육체의 병은 이 질서와 순환의 막힘을 의미한다. 몸이 아플 때는 우주로서의 몸의 운행이 잘못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임으로 몸을 쉬게 해야 한다. 병은 몸은 몸의 영성조차 시들게 만들 수 있다.

몸이 우주라는 사실을 체험하고 인정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성의 깊이와 넓이는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또한 몸을 우주로 바라 바라봄으로서 몸이 드러내는 그 놀라운 현상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몸의 한 놀림 놀림이 우리 영성생활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몸이 우주’라는 주장은 기독교 신학이 관심하고 있는 실재들의 관계, 즉 ‘우주(자연)와 하느님과 인간’의 삼중적 관계성인 ‘우주-신-인론적 관계’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킨다. 즉 몸이 우주라는 화두로 인해 인간과 우주, 인간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갖는 상호 주체적이고 다중심적이라는 주장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이 우주의 운행과 질서에 이질적인 존재양식이 아니라 우주와 한 몸을 이루어 현존해 가는 우주적 존재이다. 우주로서의 몸이 자연우주를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우주와 상관하는 존재가 된다. 이 몸은 또한 하느님을 품고 있는 실체이다. 하느님이 몸을 부리고 몸이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움직이게 한다.

몸이 우주와 하느님과 다중심적으로 상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기독교 주장하는 구원의 총체성이 획득된다. 즉 기독교가 추구하는 인간의 구원은 내세적이고 미래적인 것, 혹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만이 아닌, 현세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며 몸을 포함한 총체적인 구원임을 인식하게 된다.

몸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대체적으로 몸이 구원을 위한 방편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구원을 방해하는 장애물인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 왔다. 즉 몸의 현상을 단순히 ‘욕망’의 범주에 묶어 놓은 채 몸을 금욕해야할 대상인지 아니면 욕망분출의 주체인지의 관점에서 종교적 구원과의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다. 몸을 부정(否定)하는 입장에 서서 금욕적 수행을 옹호하는 종교들의 주장이나 혹은 몸을 긍정(肯定)의 입장에서 욕망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분출이 신과의 합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 모두 ‘몸은 욕망의 사다리냐 아니면 구원의 사다리냐’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에 기인한다.8)

그러나 ‘우주로서의 몸’은 이러한 가름을 넘어서게 한다. 우주로서의 몸 인식은 몸 그 자체가 구원의 대상임과 동시에 구원의 기준이며 척도라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몸이 자신의 구원됨을 드러낸다. 그래서 성서의 치유사건에 볼 수 있는 것처럼 몸의 치유는 곧바로 궁극적인 구원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몸이 우주로서 우주와 상관할 때 인간은 같은 우주로서의 몸 바깥의 우주에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다른 형태의 우주이지만 이 ‘몸-우주’가 존재하려면 저 ‘자연-우주’와 공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서로 보이지 않는 의미관계로 상보, 상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몸은 더 이상 이 우주 속에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몸이 지니는 우주적 차원을 상실한 채 펼쳐지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순히 인간과 세계에 대한 도덕 윤리적 교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몸이 우주라는 뜻이 담고 있는 인간존재의 심연과 광할함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담론은 규정적이고 실체적인 사물에 대한 이해로 치부되기 쉽다. 인간 영혼의 가시성(可視性) 혹은 비가시성(非可視性)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확장성(擴張性) 또는 만연성(蔓延性)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또한 우주로서 몸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몸과 영혼의 관계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존재양식이라는 주장이 그 현상에 대한 판단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양자 교류의 장(場)인 우주영역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자연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차적 존재양식”9)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 확장적 존재양식이다. 의미론적으로 표현하면 몸으로서 우주가 확장되어 감으로서 바깥 우주 또한 확장된다.


3. 몸이 지닌 신학적 의미


몸은 하느님 인식(神認識)의 주체이다.


우리는 하느님 혹은 계시(啓示)를 무엇으로 인식하는가? 우리가 얻은 깨달음이란 인간의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현상인가? 우리의 인식 그 자체는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인식작용은 의식작용의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에 몸은 인식 활동에서 소외된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을 정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오류에서 비롯되고 이 오류는 우리의 경험을 체험(體驗)으로서가 아닌 지성의 단계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나 인식이 몸으로 전달되어 체화(體化)된 인식이 될 때 비로소 그 인식은 살아있는 깨달음이 된다. 그 깨달음은 지식적인 이해나 인식 너머의 세계로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세계에로의 침투이다. 이 진정한 깨달음 세계로의 침투는 온 몸으로만 가능하다. 몸이 인식된 지각에 의미를 부여한다.10) 몸이야말로 지각의 ‘생생한 장소’다.11) 하느님의 계시인식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 몸이라는 매체를 통해 하느님 알아감(Knowing God)에 참여할 수 있다.

계시의 나툼은 인간의 몸을 통한 수용의 과정 없이는 무의미하다. 메를로 퐁띠는 “순수한 관념성은 그 자체가 살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지평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관념성은 비록 그것이 다른 살이나 다른 지평의 문제라 하더라도 살과 지평으로서 살아간다.”라고 말한다.12) 신학에서 ‘순수한 관념성’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계시는 결국 이 몸을 통해 육화(肉化) 될 때 의미 있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아들의 화육사건은 바로 계시의 화육사건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살 또는 육화로서 몸의 개념은 현상학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육화란 여기서 정신과 몸의 분리불가능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지각하는 주체 혹은 더 좋게 표현하면, <동의하는> 주체로서의 몸을 긍정한다. <나는 나의 몸이기 I am my body> 때문에 나의 몸은 <소유>의 객관적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주체적 방식이다. 따라서 몸은 단순히 대상들 중의 대상이 아니다. 몸은 은유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어떤 형식이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기계가 아니다. 몸은 살아있는 주체인 것이다.”13)

몸이 계시인식의 주체라는 주장이 지니는 영성적 의미는 ‘몸’이 머무는 역사나 사회나 일상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몸을 통한 계시인식이 가능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하늘의 뜻이 종교 활동, 즉 각종 제의나 기도, 혹은 제의 장소인 성전(聖殿)에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시공간, 역사적 현장이 바로 계시의 장소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몸이 계시인식의 주체라면 계시하는 계시의 주체는 그 몸이 있는 곳`이 그 어디든지 자신의 계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계시인식의 주체라는 주장은 또한 기독교 내에서 몸의 해방을 위한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정통신학은 몸과 영혼의 이분법적 분리에 기초한 계시이해로 인간의 몸을 계시와는 상관없는 영역으로 치부했고, 이러한 계시이해는 ‘계시독점’을 통한 기독교 지배자들의 권력장악이나 체제유지를 위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계시로부터 소외가 빚어내는 몸의 억압은 성전중심주의, 제의 중심주의를 낳았고 이것은 사제직의 권위와 권력강화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계시의 주체적 인식체인 몸에 대한 인식론적 억압을 해체시켜 다시금 몸을 계시인식의 주체로 회복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질적 변화 중요한 출발선이다.


몸으로서의 신앙공동체


기독교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에 신앙이나 신념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앙공동체는 그 기독교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신앙공동체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또 자신의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해 간다. 신앙공동체 없는 기독교는 오래 지탱될 수 없다.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유지는 단순히 신앙의 대상에 대한 동질적인 신념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현재 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삶이 나눠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 교육, 봉사, 친교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삶의 교제에 기반을 두지 않는 채 진행되고 있다. 신앙인들의 삶의 경험이 베어있는 ‘몸과 몸’이 만나지지 않고, 어떤 문제에 대한 의견과 생각만이 오가고 그것도 ‘말과 말의 교류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뜻한 악수와 포옹의 깊은 사귐이 없으며 성서에서 말하는 ‘거룩한 입맞춤’은 더욱 더 요원한 일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몸 상태에 대해서도 민감하지 않다. 그들의 몸의 변화가 눈에 띄게 변화되지 않은 이상 몸에 대해 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 이것은 외모에 신경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몸에 나오는 기운들에 따라 그 사람의 지금의 삶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공동체 구성원이 지니는 현실 삶의 다양한 영역이 무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지극히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고 종교적 가치나 관심 이외는 상호 교류되지 않는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성서적 증언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라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의 영성체인 몸에 관심을 기우려한다. 보이는 현실의 ‘몸’에도 둔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하며 그 의미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이 신앙공동체의 교제(코이노니아)의 중심고리에 ‘몸’이 연결된다면 사뭇 그 공동체의 질(質)과 내용과 결속력은 달라질 것이다.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의 몸이라면 그 몸과 몸이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영적인 교류처럼 보이는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은 타인,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함께 세계 안에 창조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며 “사회성의 관념에서 보면 몸은 정신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되고, “몸은 실체라기보다는 관련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혹은 인간관계라 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체 관계적이어서 몸의 죽음은 사회적인 것 자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14)

몸 그 자체가 사회적이다. 몸은 단순한 하나의 관련체일 뿐 아니라 “사회적 효과(pragmata)의 결합체”이기에 몸의 사회성이 교류되지 않는 공동체는 사회에서 도태되기 마련이다. “몸은 사회적인 것으로 향하는 탯줄이다. 사회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호 신체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일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다른 이의 몸에, 그리고 다른 이의 정신에 연결시킬 수 있다. 몸은 이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위치이다.”15)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의 의미 속에 이미 그 안에 존재하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몸의 결합'이라는 뜻이 담겨 있듯이 사실 신앙공동체의 일원들은 자신들이 만나는 이들의 몸을 통해 또 하나의 사회적 관련체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 공동체는 타인을 주체로 여기는 ‘타자론적 몸철학’에 기반에서 형성되어 갈 수 있다. 즉 “몸으로 등장하는 타인의 존재는 반성을 통해 자기 속으로 초월해 가는 나의 정신적 자아 영역을 깨트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의 몸인 나의 주체를 반성하게 함으로써 함께 공동체적인 주체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16) 이 말을 쉽게 풀어 보면 이웃의 몸을 통해 나의 몸이 처한 나의 삶을 반성하게 됨 서로의 삶의 질을 높힐 수 있다는 것이다. 몸과의 만남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는 바로 남의 몸을 주체로 세우면서 자신의 몸도 주체가 되는 상호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하나의 총체적인 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력, 지식, 부(富) 등을 만난다면 그것들이 표출하는 사회적 역량에 따라 관계가 형성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관계는 어느 한쪽에 종속되는 형태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내 앞에 있는 몸보다 사회적 신분이나 힘이 우선시 되는 경우 상호 주체적인 관계는 요원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결코 평등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상징하면서 공동체의 몸성을 강조한다. 이 성서의 말씀을 교회 구성원로서의 유기적이고 기능적인 결합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거대한 사회적 실체인 몸과 몸이 만나는 삶의 결합체로서 몸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몸의 ‘상호 신체성’이 동반되지 않거나 회복되지 않는 공동체는 이미 죽은 공동체이다.

우리가 영적인 몸을 지닌 사람으로 상대방과 대화한다면 사뭇 그 대화의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몸과 전혀 상관없는 피상적인 대화는 사라질 것이다. 또한 보이는 몸 상태를 민감하게 인지하면서 그 사람의 삶의 변화나 어려움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신앙 공동체는 이렇듯 몸과 몸이 만나 서로의 기운과 삶을 나눔으로서 든든하게 형성되어 간다.


예배행위의 주체로서의 몸


예배는 신앙인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숭고한 신앙인 자기고백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와 결단을 표현한다. 예배는 신앙인의 신앙을 생명력 있게 하는 동력이다. 그런데 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이다. 이 때의 몸은 한낱 예배의 ‘객체으로서 몸’이 아니라 예배행위의 주체이며 중심이다.

성서는 예배에 있어서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장 1절) 즉 진정한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예배라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닌 몸이 예배적 행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곧 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이 드려지는 예배를 의미함과 동시에 실제로 예배를 행할 때 인간의 이성, 혹은 감성, 영혼 등등 어느 한 요소가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예배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배 형식이나 내용 혹은 예배 집례자의 인식 전환이 요청된다. 만약 몸이 예배행위의 주체라면 예배에서 강론이나 설교가 중심이 될 수 없다. 예배시 움직이는 모든 몸의 활동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앉고, 일어섬, 노래하고 기도하는 모든 몸 동작 그 자체가 예배행위이기 때문이다.

몸이 예배행위 주체라는 말은 다른 한편 예배적 행위와 일상적 행위의 경계를 무너트린다. 예배에 참석하는 몸은 사회적 삶 속에서의 바로 그 몸이며, 그 몸은 성속(聖俗)의 판단에 나눠질 수 없는 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형성된 몸짓, 혹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위배된 가치에 휘둘려 다닌 몸을 예배라는 행위 속에서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회개’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회개는 앞에서 말한 잘못된 몸의 기억을 씻어내는 행위이며 새로운 가치에 다시 한번 새롭게 몸을 짓게하는(embodied) 실천행위이다. 몸 속에 베인 기억의 교정없이 ‘삶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몸이 예배행위의 주체로 설 때 성직자 중심주의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된다. 지금 한국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성직자 중심주의는 그 기독교를 구성하는 대다수 몸들을 무시하고 영혼이나 진리 혹은 등등을 기독교의 중심에 놓고 이를 독점함으로 몸을 지배하는 기독교의 지배논리의 결과다. 그러므로 예배행위에서 몸의 주체화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종교적 경험을 존중하며 그들의 몸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는 몸해방의 종교적 실현이다.

예배는 몸 스스로 말하게 하고(고백), 몸으로 느끼고(계시인식), 몸으로 표현하게 하는(헌신)의 시간(카이로스)이다. 그러므로 몸의 표현은 바로 실존(實存)의 표출이다. 다시 말하건대 예배시간에 일어서고 앉고, 노래하고, 표현하고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예배이고 예배이어야 한다. 그럴때 비로소 우리는 예배 임재하는 하느님, 그리스도, 성령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5. 몸의 영성을 향한 실천적 방안


몸을 사랑하라!


ꡔ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ꡕ(마가 12장 31절)


몸의 영성이 우리 안에서 구체화되기 위한 첫 단계는 하나의 영성체인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예수의 말씀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그렇게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선적으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신의 몸조차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이웃사랑의 계명은 그 힘을 잃게되거나 구체성이 결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때의 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외연적 육체가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의미가 회복된 영성체로서의 몸이다. 이 몸에 관심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것과 비례해서 우리는 ‘육체’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게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미명하에 무리한 성형수술이나 불필요한 다이어트를 서슴치 않는다.

그러한 행동은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학대하는 것이다. 육체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에 있다. 불행한 사고로 인한 육체의 부조화나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음로 빚어진 비만 혹은 병든 몸 등 비정상적인 육체를 제외하고는 태어나 성장한 현재의 그 몸의 모습을 하느님이 주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정해야 한다. 못생김, 잘생김, 키의 크고 작음 등등의 외형적인 모습이 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매체나 잡지 혹은 자본주의적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미적 감각에 얽매여 스스로 비관하여 몸을 학대하거나 혹은 무리하게 변형시키는 것은 결코 몸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몸의 영성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말은 현재의 몸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하고 그 몸이 진정 원하는 것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의 현상은 정직하기 때문에 자칫 잃기 쉬운 삶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방치했을 때 몸에는 이상이 생기고 병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병이 왔을 때 몸은 단지 몸의 쉼을 요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몸을 사랑한다면 몸의 외침에 귀기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육체를 한탄 살덩이가 아니라 하나의 몸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건강지상주의에 빠져 먹을 것 못 먹을 것 가리지 않고 먹어되는 보신주의자(補身主義者)의 행태와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에 몸에 불필요한 음식을 과식, 과용하는 것은 몸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상업주의에 오도되고 있는 몸에 대한 각종 이데올로기에 해방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키가 작다고, 못 생겼다고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이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것인가?


몸이 성전(聖殿)임을 깨달아라!


ꡔ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ꡕ(고전 6장 19절)


그리스도인으로 몸을 사랑해야 될 이유가 이 말씀에서 보다 명백해 진다. 우리 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을 나 자신이 함부로 다룰 권한이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더욱이 그 안에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데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위 말씀은 당시 헬라의 사고방식으로는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당시 육체를 폄하하던 사상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던 사회에서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주장은 마치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선포한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주장과 같은 획기적인 선포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재이며, 상징이 아니라 현실이다.

몸이 성전이라는 말은 몸이 거룩한 실체임과 그것이-앞에서 말한대로-하나의 영적인 실재임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말이다. 이것이 육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종교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기독교는 살덩이인 육체가 아닌 물질적이면서 영적인 실재로서 몸에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그래서 몸의 움직임은 우리의 영성을 그대로 표현해 준다. 몸을 가볍게 여기고 행동하는 사람의 영성은 굳이 관찰해보지 않아도 금방 느껴진다. 몸의 언어가 경박한 사람은 그 영성도 거기서 멀지 않다. 우리 몸 안에 하느님을 모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우리 몸에 대한 태도는 확연하게 달라질 것이다.


주님은 몸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시다!


ꡔ 몸은 음행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몸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ꡕ(고전 6장 13절)


이 말씀 속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주님 섬김이 이성이나 지식이나 말이 아니라 몸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몸으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선교하고 봉사한다. 이 신체만 와있고 마음이 없는 것도 문제며 어떤 일에 몸이 따르지 않고 마음은 있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이다. 마음과 몸은 함께 있고 그 몸이 몸 자체의 진정성이 담보했다면 마음없는 몸, 몸 없는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이 말씀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혜안은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돌바주실 뿐 아니라 몸을 돌보아 주신다는 고백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적인 문란한 행위의 팽배나 혹은 그리스 사상에 기초한 육체 혐오적인 사상을 배격하고 오히려 몸 자체를 주님이 보호하는 실체로 여긴 것은 우리 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한다.


몸에 예수의 흔적을 심어라!


ꡔ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ꡕ(갈 6장 17절)


몸의 영성은 몸에 베인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흔적(낙인)이 찍혀진 모습이다. 우리가 보는 이 ‘육체’ 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을 거슬리는 ‘육체’와는 달리 영성체인 몸은 인간의 온 존재를 다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 때의 몸은 육체의 상(像)이나 한계를 극복한 몸이며 영혼이 담지한 몸이다. 그 몸에 바로 예수의 흔적(낙인)이 남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보이는 육체에 예수의 흔적은 남길 수 없다. 단순한 육체가 아닌 이 몸, 영적인 이 실재에 예수의 흔적이 남겨져 있을 수 있다.

몸의 부활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이 때 몸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육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노인과 어린아이 혹은 성별에 따라 여자 남자에 따라는 부활을 상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부활은 예수조차도 거부했다.

몸의 부활은 육체성과 비육체성의 이분법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총체성을 담보한다. 이런 몸의 부활은 당시 바리새파의 부활사상과 구별된 부활사상이었다. 우리 예수가 말한 몸의 부활을 신앙한다면 그 때의 몸은 단순히 육체를 의하는 것이 아닌 육체까지 포함한 실재로서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몸에 예수의 삶이 베어날 수 있다.

몸의 영성은 우리 몸에 찍힌 예수의 흔적을 드러내 준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된다는 것은 우리 몸에 찍혀 있는 그 낙인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의 사랑함, 그의 희생과 고난, 죽음의 거부, 생명의 드러냄이 우리 몸을 통해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몸의 영성이다.


6. 몸의 영성을 향하여


몸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영성를 향한 원초적인 매개체이자 접촉점이다. 또한 몸은 영성의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들어 가는 힘이다.

몸의 영성을 정리해 보면 첫째로, 몸의 영성은 ‘화육의 영성’을 드러내 준다. 하느님의 말씀이 몸이 된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이 화육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에 ‘뼈와 살’을 입혀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도록 촉구 한다. 즉 모든 영성은 바로 ‘몸’을 입고, 몸을 통해 실천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몸의 영성은 바로 우리의 영성이 추상화된 영성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형성되고 표현되는 구체적인 화육의 영성임을 되새겨 준다.

몸의 영성은 또한 모든 영성이 ‘공동체 영성’임을 되새기게 한다. 즉 너와 나의 삶이 만나지는 ‘몸 만남’을 통해 그 속에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깨닫게 된다. 몸의 영성은 몸과 몸이 만나는 공동체에서 몸과 몸을 통해 상호 깊이 영향받으며 자라난다. 몸의 영성은 모든 영성이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 영성의 창조적 교류를 통해 형성됨을 통해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몸의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을 드러내는 ‘성만찬의 영성’을 복돋는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몸’을 나눠주심을 통해 그와 연합함의 신비의 은총을 보여주심은 바로 오늘날 몸의 영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시켜 준다. 몸의 영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성만찬의 영성을 더욱 더 강렬하게 체험하게 한다.

이제 나의 몸에 관심 해야 한다. 몸의 반응, 몸의 움직임, 몸의 언어, 몸의 기억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몸에 대한 감수성 회복은 ‘몸 명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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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 반 퍼슨, 『몸, 영혼, 정신』, 서광사 1985, p.202

2)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몸에 대한 통찰어린 명상과 반성은 몸 명상의 의미를 더욱 돋우어 준다. “(...) 한몸 지탱 못해, 푸들푸들 떨면서도 미친 계집의 맘 같이 들떠 갈데 못갈 데를 가리지 않고 요리조리 헤매는 발목/제로라 호통치고 싶어 되사리고 앉으면서도 정작에 싸울 언덕 미쳐선 쭈구린 바위를 보고도 겁이 나 덜덜 떠는 파리한 이 무릎/(중략)/ 이 코, 천만 가지 냄새 가린다면서 세상 냄새는 모르고 하늘바람 마시면 단숨에 기가 차진다 손으로 막고 수건으로 가리며 제 구멍같이 답답한 좁은 방 구멍에 움추리고 드러누워 이불을 쓰는 뼈 없이 주저 않는 납작한 코, 그러면서도 높기는 혼자 높다고, 세기는 혼자 세다고 쳐들고 우겨대는 답답한 코(하략)” 참고, 함석헌의 시(詩) “불이 붙어지이다”, 『수평선 너머』, 한길사 1985, p.143-148

3) 김용옥, 『아름다움과 추함』, 통나무 1989, p.63

4) 아서 오즈번 엮음, ꡔ라마나 마하르쉬 저작 전집ꡕ, 탐구사, 2001, p.85

5) 리차드 M. 자너, 『신체의 현상학』, 인간사랑, 1993, p.256

6) Ibid., p.117

7) 김용옥, 『아름다움과 추함』, 통나무 1989, p.68

8) 이거룡, “인도철학에서 본 몸의 의미”, 이거룡 외 지음『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한길사, 1999 p.33-64

9) 정화열, 『몸의 정치』, 열화당, p.243

10) 리차드 M. 자너, 『신체의 현상학』, 인간사랑, 1993, p. 239

11) 정화열, 『몸의 정치』, p.244

12) 재인용, 김형효, “메를로 -뽕띠의 철학을 통해서 본 몸의 현대적 의미”,『몸의 이해』, p. 176

13) 정화열, 『몸의 정치』p.267

14) 정화열, 『몸의 정치』, p.267

15) 정화열, “비코와 몸의 정치의 비평적 계보”,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p.114

16) 조광제,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길”,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p.160 
    

출처 : 예수님이 주인된 교회를 꿈꾸며
글쓴이 : 조슈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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