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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침(1) - 뉴스앤조이 연재 이창돈목사님 글 -

DoDuck 2011. 5. 3. 22:24

예수의 가르침 (1)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 마태
입력 : 2011년 05월 03일 (화) 10:58:22 [조회수 : 120] 이창돈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 가르침의 80% 이상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생활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의미하며, 새 가죽 부대는 그러한 하늘의 가르침을 담을 수 있는 예수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유대인입니까? 모슬렘입니까? 기독교도들입니까? 아닙니다.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혈통적 기준도 아니고, 종교적 기준도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한 가죽 부대, 가르침의 그릇, 성령의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오셨으나, 결코 유대주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탈유대적이며, 초유대적이며, 보편적인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기 전, 유대의 권력자였다면, 바리새인들은 성전 멸망 후 형성된 랍비 유대교의 실권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유대 중심적인 배타적 실력자들을 구시대의 눈먼 소경이라고 하면서 공격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마 15:13~14)."

예수 그리스도의 비판은 단순히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비판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 실권자들처럼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이고 보편적 진리를 무시하는 모든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유대교적 기독교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유대교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주체성은 있었으나, 보편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중심주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주적 구원의 디딤돌이 되라고 선택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현대 주류 기독교도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보통명사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2,000년 전의 유대 땅에 오신 그 예수 고유명사로만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이전부터 세상 끝 날까지 계시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는 왜 강조되지 않을까요? 오히려 태초부터 있었던 예수, 지금도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 역사에 이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예수의 후예들은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모두 다 예수 아닙니까?

그러므로 유대의 멸망 예고는 옛이야기로만 듣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현대의 유대교적인 기독교의 멸망 예고로도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특히, 개교회 중심주의, 교단이나 교파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지도자들은 심판의 말씀을 되새김질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교회 개혁 운동의 명암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와 가버나움을 유대와 이방 모두의 구원 전략 기지로 삼았습니다. 갈릴리와 가버나움의 지역성은 중심주의와 보편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비유대인 로마 군대 백부장이 보인 믿음이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복음에 대하여 더 수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가르침에 대하여 유대교적 기독교인들보다 오히려 더 수용적이고 더 실천적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갈릴리와 가버나움은 어디입니까? 이 시대의 백부장은 누구입니까?

이방인의 길은 언제 뚫렸습니까? 이스라엘의 길이 막혔을 때 이방의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날 유대교적 기독교의 재복음화 운동, 한기총 해체 등 교회 개혁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보편적 그리스도의 세계는 오히려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되고, 아픈 채찍질을 당할 때에라야, 비로소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을 찾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 10:16~17)."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무대는 유대교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는 메시아는 될 수 없었습니다. 만인의 구주로서 고난을 당하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보편적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을 방해하다가 사단이라는 칭함까지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마태는 가장 유대 중심적인 발언에서 시작하여 가장 보편적인 세계주의 선언으로 마감하였습니다. 유대적인 것을 이용하여 과감하게 탈유대적이며 초유대적인 보편주의를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인 영혼 구원이나 교회 왕국이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 구원입니다. 우주적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교회 중심주의에서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삶의 새로운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