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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65년 ‘용당산 모임’에서 ‘평화고리’까지; 크리스챤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운동사 - 김진

DoDuck 2014. 2. 5. 16:48

1965년 ‘용당산 모임’에서 ‘평화고리’까지

- 크리스챤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운동사 -

 

 

 

<이 글의 필자인 김 진 박사는 총신대학과 한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로 유학,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종교학, 종교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그의 주요 관심분야는 종교신학에 기초한 종교간의 대화를 비롯해 이웃종교와의 새로운 관계 모색을 위한 새로운 신학형성으로 이 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크리스챤 아카데미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종교신학연구소 소장으로 인터넷 사이트 www.Religionstheology.org를 운영하고, 이화여대와 한신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한들, 1998), 『종교간의 만남 - 피할 수 없는 대화』(편저, 한들, 1999)가 있으며 종교신학과 기독교 영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1. 들어가는 말

 

인류 역사상 어떤 종교도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 발전한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는 이웃종교와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한다. 종교사를 살펴보면 모든 새롭게 발생한 종교는 그 전의 종교를 ‘딛고’ 일어나고 있다. 불교는 힌두교를,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직,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태생적 특성 속에 종교간의 관계성이 이미 내재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종교사(宗敎史)는 종교간의 ‘대화사(對話史)’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를 현상적 종교 다원주의의 영역에서 발생한 종교학이나 혹은 신학의 주제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종교간의 대화가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언어적-비언어적으로, 명시적-암시적으로, 또는 이론적-실천적 영역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어오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의 실존적 특성이며 올바른 종교문화 형성을 위한 토대이다.

 

이 글의 목적은 지난 35년간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추구해 온 종교간의 대화운동의 내용과 방향을 고찰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먼저 필자는 종교간 대화의 일반적인 오해들을 먼저 규명하려고 한다. 이것은 종교간 대화의 본래의 의미 회복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내용임과 동시에 종교간의 협력과 대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한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종교간 대화모임’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데 중요한 준거 틀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필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진행해 온 종교간 대화모임의 역사적 의의, 내용적 방향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점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2.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들

 

종교인들은 나름대로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견해의 대부분은 한국의 종교문화의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부정적인 입장은 종교인들이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오해로 인해 더욱 가중되고 있다.

 

(1) "종교간의 대화는 불필요하다“

 

종교간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이며, 자신의 종교 안에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둘째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 나라의 종교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치 않다’라는 입장이다. 셋째로 종교간의 대화는 이미 종교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대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종교간의 대화’ 운운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과연 그런가? 첫 번째 주앙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기성종교가 진리를 완전하게 소유할 수 있다는 자만(自慢)에서 비롯된다. 종교는 진리를 표방하고, 또 그 종교가 표방하는 진리 그 자체는 온전하고 완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리를 파지하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 체제화된 종교가 진리를 완전하게 파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드소의 진리를 현재의 기독교가 다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교만이고 착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적 틀에 갇혀 자신의 진리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또 하나의 진리파지(眞理把持:사크라티아)의 길이다. 두 번째 입장은 일면에서 타당하다. 즉,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 현재 종교전쟁을 치르고 있는 다른 민족들보다는 상대적이고 평화적이며 포용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 상호간의 직접적인 이해 마찰이 없기 때문이기도 한다. 우리는 지난 시절, 분단 이데올로기 속에서 남북한 민족간, 혹은 한 마을에서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종교적 신념화되어 얼마나 처참한 폭력이 자행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우리 내부에 종교간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얼마든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금도 매년 사찰 방화사건, 훼불사건, 단군상 파괴 등등이 끊이질 않고 발생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종교성이 강한 민족인 만큼 배타성이 폭력화 될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종교간의 대화의 불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세 번째 입장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종교간의 대화의 의의를 간과하는 데서 비롯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존재하는 종교는 이미 보이지 않게 이웃종교와 많은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있고,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 보이지 않는 대화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대화가 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2)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이 입장은 종교는 신앙의 영역이며, 그 신앙은 다른 신앙체계와 어떤 이론적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설사 이웃종교들이 만나 언어적인 대화를 나눈다 하더라도 자기신앙을 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는 불가능하며 오직 ‘독백’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닌다.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간의 대화에서 물러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며,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을 유기하거나 포기하면서까지 종교간의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정직한’ 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장의 타당성은 종교간의 대화의 지향점이 바로 그 종교의 개념이나 교리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신앙(믿음)의 만남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옳다. 그러나 신앙이란 진리에 대한 헌신성을 의미하고, 또 진리가 현재 신앙보다 큰 범주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대화의 걸림돌이 아니라 대화의 기초로 작용할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자칫 빠지기 쉬운 우리의 신앙의 폐쇄성이 극복될 수 있고, 또 신앙간의 대화도 가능하다.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당위성,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을 괄호 안에 묶어 버리는(Epoche)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다. ‘교리적 믿음’이 아니라 ‘신앙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신앙과의 대면은 자신의 신앙의 충만과 성숙의 기회이다.

 

종교간의 대화가 불가능하고 주장하는 다른 이유는 한 종교 내에서조차 서로 대화하지 못하고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종교와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한 종교 내에서 자신의 이익과 교권에 얽매여 싸우며 대화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종교와 대화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조적 태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대화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다투는 것은 보다 넓은 진리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웃종교를 통해 자신들의 불화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더욱더 폐쇄적이게 되고 그곳에서 부정과 불화가 가속화된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는 자기종교 내 평화를 위한 좋은 방도이기도 하다.

 

(3) “종교간의 대화는 이론활동이다”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전통을 이론적 영역에서 상호 비교하는 작업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종교간의 대화는 신앙인의 삶이나 실천활동과 유리된 영역이며, 그래서 이것은 소수 신학자나 종교학자들에게만 국한된 영역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한다. 그래서 이웃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종교인조차도 종교간의 대화는 ‘배부른 학자들의 사치’정도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사실 지난 한국적 신학의 토착화를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의 많은 직업 중의 하나가 바로 제종교간의 비교연구였다. 그러한 이론작업 또한 불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는 그러한 학문적 이론 영역에서의 비교연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간의 대화는 오히려 우리의 신앙생활의 실천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즉,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신앙이 대면됨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간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간의 대화가 말이나 문자의 오고감이 아니라 살아있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만남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웃종교인들과의 만남은 상호 종교 속에 내재하는 사상이나 개념과의 만남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인의 만남이며 이것 자체가 엄청난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가 종교계에 요구하는 공동의 과제를 함께 실천하는 노력 또한 종교간의 대화의 주제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는 이론의 비교연구에만 머무를 수 없다.

 

(4) “종교간의 대화는 정체성을 변질시키는 혼합주의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종교간의 대화가 단순한 말의 오감이 아니라 신앙간의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상대방을 개종(改宗)시킴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그 안에 개종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종 문제 이전에 종교간의 대화는 자신의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 확장시키는 계기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심화와 확장의 과정이 혼합주의로 가는 과정이며 결국에는 혼합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하거나 비난한다. 그러나 ‘혼합주의(Synkretismus)’는 두 가지 의미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이웃종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 그대로 피상적인 접목과 혼합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혼합주의이다. 일반적으로 ‘혼합주의’를 언급하면 이런 부정적인 측면만이 강조된다. 그러나 종교간의 만남을 통해 상호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서로 배우고, 심도있게 교류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종교가 더욱더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창조적 결합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혼합주의’라는 말의 어감(語感)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 어감에 상관없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성종교는 모두 이런 과정을 겪어오면서 존재한다. 종교간의 대화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혼합주의를 거부한다. 종교간의 만남은 창조적인 접목과 변화를 인정하면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 상실되거나 변질됨 없이 승화 상승하는 계기이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종교간의 대화는 부정적인 혼합주의로 가는 길이 아니다. 신흥 사이비 종교들에게서 보듯이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간의 대화가 없기 때문에 잘못된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적 고립’이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 정체성이 변질되는 잘못된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교간의 대화는 진행되어야 한다.

 

종교간의 대화는 자기종교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간의 대화가 올바르게 진행되는 곳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이 더욱더 풍요로워진다. 그것은 진리 현현의 다양성, 수용의 개방성,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해방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종교인들은 종교여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정체성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왜 자신이 기독교인인지, 왜 불자인지, 왜 유교인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이웃종교와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혼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문명의 강력한 세속주의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반(反)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이고, 반공동체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현대 세속주의야말로 우리 종교인들의 정체성을 가장 강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종교인들의 공통적인 정체성을 확인하고 협력하고 실천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유익한 길인 것이다.

 

(5)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 내에 국한된 주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간의 대화가 종교 내 문제이기 때문에 그 주제나 내용 또한 종교 내적인 문제로 한정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결한 종교적 체험이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대화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간 대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강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종교간의 대화가 종교 이외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종교 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입장을 지닌 사람도 있다. 이 양자의 입장은 모두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종교간 대화는 결코 종교 내 문제로 축소될 수 없다. 만약 종교가 성(聖)과 세속(世俗)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한다면 종교간의 대화의 주제는 종교 내에 결코 한정될 수 없으며, 인간의 전 삶의 영역이 종교간 대화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종교인들이 서로 만나 나누는 대화는 자신의 종교적 관심이나 이해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인간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비전을 함께 나누고 해결을 모색하는 대화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종교간의 대화는 사회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적 기관’의 밀실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그것은 또한 신학자 혹은 ‘종교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또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종교의 박제화는 성직자 계급(이 이름은 종교들의 다양한 구조를 나타낸다)의 지배만큼이나 삶과 동떨어진 것이다. 진정한 종교들의 대화는 전문가들이 인간 존재를 파편화시키는 것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획득되는 인간해방을 지향한다. 객관적인 영역에 대한 전문지식은 정당하고 또 필요하다.”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인들의 만남이지만 결코 종교문제만을 취급하는 영역이 아닌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해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3. 크리스찬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운동사

 

지금까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해나 평견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난 35년 동안 크리스챤 아카데미(이하 ‘아카데미’로 표기)가 주도한 종교간의 대화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 활동들은 이 땅에 ‘종교간의 대화’라는 용어 자체를 의미 있게 만든 활동들이었다. 이제 아카데미가 추구해 온 종교간의 대화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용당산 모임’에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모든 문제를 조사 연구하고, 대화를 통한 합리적인 해결에 이바지하기 위한 각종 협의회를 가지며, 모든 분야에서 봉사할 일꾼들을 훈련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아카데미의 창립목적에 비추어볼 때 아카데미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의 종교상황, 특히 보수적인 개신교의 분위기가 한국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에, 개신교계 인사들을 주축으로 형성된 아카데미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주창하고 시도해 왔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많은 반대와 비난, 그리고 갖가지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종교간 대화를 주도해 온 것은 큰 용기와 인내와 확신을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아카데미가 종교간 대화의 의의를 감지하고 이것을 하나의 모임으로 발전시켜낸 역사적인 날이 1965년 10월 18일이었다. 이날 한국의 6대 종단의 지도자들이 용당산 호텔에 모여 이틀간에 걸친 첫 대화모임을 가졌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종교인들이 공동의 이해를 가지고 한곳에 공식적으로 모인 것은 3 ‧ 1운동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이웃종교들과의 만남이 매우 열악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국 제종교의 공동과제-6대 종단 지도자 모임”라는 주제로 모인 이 모임에서 불교에서는 이능가 스님, 원불교에서는 황온순 선생이, 유교에서는 유승국 교수가 각 종교의 입장에서 “한국 제종교의 제 과제”를 발표했다. 이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강원용 목사의 증언을 통해 모임의 동기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 나라 역시 하나의 문화적인 구조로 보나 사회적인 구조로 보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힘이 굉장히 큰데, 우리가 항상 화합과 일치를 얘기할 때 기독교 내의 다른 교파와의 일치만 생각했지 종교와 종교간의 대화라고 하는 것은 전혀 해본 예가 없었어요. 우리 나라 사람들 항상 대결구도 사고방식에 익숙해서 협력이라는 건 도저히 안 될거라고들 했죠. 하기야 사회구조, 문화구조가 그러니까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종교간의 전쟁을 해 본 일이 없는 나라입니다. 사실 종교간의 전쟁을 안 한 나라가 별로 없거든요. 우리 나라 경우 종교간의 전쟁을 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3 ‧ 1운동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죠. 물론 종교 전체가 뭘 한 건 아니지만요.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가 30년도 채 안되는 때, 일제에 항거하는 그런 큰 일을 했다는 건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죠. 그래서 종교간의 어떤 협력구도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원용 목사의 증언을 통해 이 모임의 동기와 의의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모임은 다른 나라 경우처럼 ‘종교간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들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간 갈등을 전제로 하면서 그 문제해결을 위한 과정으로 인식되기 쉽다. 서구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중요 주제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교와 기독교 등등 그들 사이에 내재하는 갈등의 요인들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주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다. 그러나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의 출발점은 본래 우리 나라가 가지고 있는 종교간의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계승하자는 의도가 더욱 강하다. 가깝게는 3 ‧ 1운동 당시 종교들이 보여준 대화와 협력의 정신을 계승하는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종교간의 대화를 한국사회의 제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적인 장(場)으로 삼아야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제종교의 공동과제”라는 첫 모임의 주제가 시사하듯이 한국사회 속에서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추적함으로써 종교들의 사회적 역할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이것은 종교 내적인 문제를 다룰 경우 자칫 대화보다는 ‘독백’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될 수 있다는 판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종교간 대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실천적인 문제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셋째로 적어도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모임은 상대방을 ‘개종’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용당산 모임에 반발하고 나선 보수 기독교에 대한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김활란 박사가 거기 앉아 있었는데, 내가 계속해서 공격당하고 있으니까 참 내가 불쌍했는지 김활란 박사가 일어나서 “우리 참 민족을 복음화하자고 하는 목적은 강 목사나 우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화를 하는 방식법에 있어서 우리는 나가서 전도강령을 하고 회개운동을 하고 우리가 보통 하는 방법인데, 강원용 목사는 아주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방법을 바꿔서 그들(이웃종교들)하고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믿게 해보자고 하는, 그래서 전도의 수단으로서 대화를 하는 건데 우리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그럴 게 뭐 있습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기가 꽉 막혀서 내가 일어서서 “김박사님 저를 위해서 말씀하신 건 아는데 이 말이 밖에 나갔다가는 정말 큰일납니다. 저는 전도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 아닙니다. 제가 왜 불교 지도자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겠습니까. 저는 그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더니 당장 “저거 보라고, 저게 바로 정확한 정체라고”하면서 “자기 입으로 다 말하지 않았느냐”고 뭐 야단나고 굉장했죠.

 

이처럼 한국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막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종교간의 대화의 목적이 개종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한 점은 다행스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웃종교에 대해 기독교의 우선권을 주장하거나, 포교적, 배타적 관점을 취하지 않고 이웃종교 지도자들이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모임으로 이끌어 갔다는 사실은 아카데미의 종교간의 대화운동의 기초가 건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종교간 대화의 첫 모임에서 발견되는 세 가지 방향성은 그 이후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 여정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지침돌로 작용한다.

 

이 용당산 모임은 의외로 많은 파장과 성과를 가져왔다. 파장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수적인 개신교의 강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우상을 섬기는 종교들과 기독교가 한 자리에서 대화할 수 있냐고’ 주장하면서 이 모임을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당시 종교간 대화의 내용을 떠나서 이웃종교인들과의 만남 그것 자체가 ‘전도’라는 기치 아래 한국교회의 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놓고 매진하고 있었던 개신교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웃종교인들과의 만남은 곧 우상숭배, 신앙의 순수성의 상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변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용당산 모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성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이 모임을 계기로 해서 한국 최초로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종교인연합회’라는 상설모임이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종교연합회’의 결성은 한국 종교지도자들이 자기종교의 영역에서 벗어나 이웃종교인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초대회장을 지낸 강원용 목사는 종교연합회 모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가 단순하게 공동과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만 찾지 말고 서로 배우자’ 기독교, 불교가 무엇인지 서로 잘 몰랐기에 점심식사에 초대하고 모여서 그 자리에서 종교 이야기를 들었어요” 용당산 모임이 한국사회에서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인들의 공동과제를 나누는 장으로 출발했다면, 이제 ‘종교인연합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종교를 배울 수 있는 장이 된 것이다. 이웃종교인들과 마음을 열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배우며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한국 종교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종교인연합회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이웃종교인들을 만나 서로를 알고 배우며 종교적 코이노니아를 형성해 나갔다. 종교인연합회는 각 종단의 지도자들이 대표를 맡아가며 운영되었는데 그러나 불행히도 박정희 정권시절 정부의 개입과 통일교의 가입문제로 와해되게 된다.

 

‘종교인연합회’가 정부의 간섭과 통일교의 입회로 본래의 모임에서 와해된 이후 같은 성격의 모임은 오랜 시간 형성되지 못하게 되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종교인연합회” 이후 그때 뜻을 같이 했던 한국종교 지도자들이 하나의 협의체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계기는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총회 개최에서 비롯되었다. 1981년 인도 뉴델리에서 있었던 총회에서 차기 총회 개최지를 한국으로 결정했고, 이를 위해 한국에서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1985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를 결성하게 된다. 이 모임을 통해서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총회를 성공리에 마치게 되었고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한국의 종교들의 화해와 평화실천을 위한 중추적 기구로 성장해 가고 있다. ‘용당산 모임의 정신’이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이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2)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의 역사적 흐름

 

용당산에서 모인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이 외향적으로 종교연합회로 발전해나가는 한편 아카데미는 이 모임의 대화정신을 기초로 ‘종교간의 대화’의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모임을 펼쳐 나갔다. 이제 지난 35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추구해 온 종교간의 대화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 변화과정을 살펴볼 때이다. 이를 위해 먼저 그 동안 종교간의 대화모임 프로그램을 시기별로 정리한 다음의 표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시대별 특징을 알아보자. 1965년 의욕적으로 시작한 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모임은 1960년대 말까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모임에 참석한 이들을 중심으로 “종교인연합회”라는 모임이 형성되었고 이 연합회 이름으로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이 대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만 해도 ‘종교간 대화’라고 하면 지도자들의 모임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아카데미는 1970년대 들어서 다시 종교지도자 모임을 개최한다. 특히 1970년에는 5월부터 매월 종교지도자들이 모이는 모임을 가졌다. 현재 남은 자료가 빈약해 그 모임들의 주제나 성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모임 명칭 그대로 각 종교의 지도자들이 대표로 참석해 공동의 주제를 놓고 대화하는 작은 모임으로 추정된다. 그 모임에는 천도교의 임문호, 배호길, 유교의 양대연, 불교의 법정, 가톨릭의 김몽은, 개신교 환완상, 정하은, 원불교의 유병덕 등이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한국의 6대 종단에 포함되지 않는 대종교의 대표(최희규)가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의 모임이 지금보다 훨씬 널려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1년 이후, 특히 1974년을 기점으로 해서 종교간 대화의 모임에서 발견되는 변화 중의 하나는 종교간 대화모임이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종단 대표자 모임의 성격에서 각 종교의 학자들의 모임으로 변화되어 갔다는 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제 종교간 대화가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상이나 이론을 상호비교하는 대화가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구원문제’(1974년) 혹은 생명문제(1978년)에 대한 각 종교의 이해를 학자들을 중심으로 발표하고 대화하는 모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모임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더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러한 대화는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를 확충하는 한편 종교인으로서 공동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되었다.

 

1980년대 세계 종교계에는 ‘종교간의 대화’ 그 자체에 대한 많은 학문적 접근과 대화가 중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이른바 ‘종교다원주의’라는 명칭 아래 기독교 신학의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경향성은 이웃종교 상호간의 대화가 갖는 의미나 당위성, 그리고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흐름을 반영하듯 1980년대 아카데미의 종교간의 대화모임에서도 ‘종교간의 대화’ 문제 자체를 심도 있게 다루는 모임들이 형성되었다. “종교적 다원사회에서 대화문제”(1982년), “종교간의 대화”(1984년), “기독교와 타문화의 만남”(1986년) 등등의 주제를 가지고 종교간 대화의 의의나 방법론, 그리고 한계에 관한 연구와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런 흐름은 1990년 초반에까지 이어져 1991년에는 “다원종교사회에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모임”을 가졌다. 이런 주제의 특성상 이 모임은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 외 현장 성직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 시기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종교간의 대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외국학자들의 방한과 강연이 이루어짐으로 당시 세계 종교계가 지향하는 종교간 대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레오날드 스위들러, 울라프 슈만 등이다. 1980년대에 눈에 띄는 모임의 또 하나의 주제는 ‘평화’였다. 평화를 위한 공동의 주제를 놓고 “평화를 위한 종교간의 대화”(1985년), “평화를 위한 종교간의 협력방안”(1988년), “민족평화를 위한 종교인 대화”(1988년) 등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한국의 비평화적 상황(분단문제, 사회, 정치적 평화문제 등등)에 대한 종교인들의 문제의식의 출발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1990년대는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꽃핀 시기이다. 이 시기는 다른 때와 현격히 구별되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종교간의 대화 모임이 정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종교간의 대화의 모임이 필요에 따라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모인 한시적인 모임으로 끝났다면 1990년대에는 정기적인 모임으로 뿌리내렸다. 각 모임이 정례화되었다는 것은 종교간의 대화모임의 의의나 이해가 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 특징은 대화모임의 명칭을 구체화시키면서 모임의 성격과 구성원을 분명히 한 점이다. 예를 들어 “종교간의 대화 연구모임”(1992년 2회)과 이를 발전하여 정례화된 “종교간 대화모임”(1994년 2회, 1995년 2회, 1997년)과 KCRP와 공동으로 주최한 “젊은 종교인 대화모임”(1997년 2회, 1998년 2회, 1999년 1회), 그리고 “종교청년평화캠프”(1994년에서 1999년까지 매 1회), “종교청년 평화고리 대화캠프”(1995년, 1996년, 1997년)가 그것들이다. “종교간의 대화 연구모임”이나 “종교간 대화모임”으로 진행된 대화모임은 제 종교간의 공동의 주제를 가지고 보다 학문적인 연구모임이 주를 이루었고, 참여자 대다수가 기독교 학자들이 인사들도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997년 2월부터 매년 2회 진행된 “젊은 종교인들 대화모임”은 가능한 한 각 종단의 참가자 수(數)나 연구분야에 대해 각 종단에게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했다. 기독교 중심의 모임에서 다종교 중심의 모임으로 바뀌어간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모임 구성원들이 보다 젊어지고 모임의 주체가 학자나 지도자 중심에서 성직자, 평신도 지도자들로 ‘하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종교인 모임”의 경우 그 모임의 이름에 걸맞게 3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의 지도자, 성직자, 학자들이 모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1990년대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 중 가장 눈에 띄는 모임은 1992년에 각 종단의 예비성직자들을 모아 시작한 “종교청년 평화캠프”이다. 이러한 형태의 모임이 시작된 그 배경에는 이전에 진행된 종교간의 대화모임이 기존 성직자나 학자, 그리고 연로한 종교지도자들만의 대화모임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모임은 많은 경우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보다 생산적이고 장기적인 종교간 대화모임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성직자는 아니지만 성직의 길을 가고 있는 학생 때부터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고, 상호간 화해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훈련을 경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이 “종교청년 평화캠프”는 지금도 매우 활발하고, 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어느 종단 경우는 이 모임에 참석하고 지원하는 학생이 많아 선배들이 특별심사(?)도 실시한다는 말이 들릴 정도이다. 이 모임의 성과물 중의 하나는 이 모임에 참여한 예비성직자들이 중심으로 만든 “평화고리”라는 모임이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화모임이 다른 아카데미의 외부 모임으로 발전한 것은 용당산 모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것은 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 운동의 주요한 성과물이다. 이 평화고리 구성원들의 모임을 지원하는 의미에서 진행되고 있는 후속 모임이 바로 “종교청년 평화고리 대화모임”(1995, 1997년)이다.

 

넷째, 1990년대 종교간 대화모임의 특징은 모임과 만남의 수가 비약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1990년대 10년간 29회 걸

쳐 모임이 진행되었는데, 이 수는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15년간 열린 17회보다 훨씬 많은 모임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확장되고 매체의 발달로 인해 종교간의 만남이 더욱더 빈번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의 역사적 의의

 

지금까지 서술한 특징을 토대로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다종교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간 대화문화가 척박한 이 땅에 평화와 화해를 향한 대화모임을 시작함으로써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은 한국종교문화의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운동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종교 차원에서 볼 때도 선구자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다양한 세계종교 협력기구에서 종교간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는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 활동에 기여하는 한국 종교지도자들 역할의 토대가 되었다. 만약 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모임의 축적된 힘이 없었다면 아시아와 세계종교의 연합활동에서 한국종교들의 활동은 지금처럼 활발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셋째,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운동은 이웃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폐쇄적인 태도를 일부나마 불식시키는 획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카데미가 개신교 전통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희생과 비난을 가고하고 이웃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거부함으로써 이웃종교 안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새롭게 한 것은 한국 기독교사에 큰 족적으로 남을 것이다.

 

넷째, 아카데미의 종교간의 대화는 그 활동과 연구범위에서 이론적, 실천적, 그리고 영성적 대화모임간의 균형을 나름대로 유지함으로써 종교간 대화모임이 추상적인 탁상공론이 아닌 신앙인의 삶의 구체적인 활동임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종교간 대화모임의 중요한 준거틀로 활용될 것이다.

 

(4)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이 나아가야 할 길

 

지금까지 필자는 지난 35년간 아카데미가 주도해 온 종교간 대화의 흐름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모임이 좋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부합되는 종교문화 창출을 위한 방향설정을 위해 몇 가지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종교간 대화’ 대화의 영역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공동의 실천적 활동을 위해 이웃종교들이 협력하는 영역에서 종교간의 대화이다. 종교는 구원을 지향하며, 이때 구원은 인간의 사회적, 총체적 구원을 등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시대가 종교에 부여하고 있는 과제를 공동으로 해결해 가는 것은 종교간 대화의 중요한 주제이다. 두 번째 영역은 이웃종교 안에 내재한 사상과 이론을 상호비교하는 차원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존재한다. 종교의 역사나 교리, 사상 등은 각기 종교에 따라 상이하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교연구는 종교간 대화의 토대이기도 한다. 세 번째는 종교간 대화의 가장 어려운 영역인 각 종교가 지닌 ‘영성의 대화’이다. 각 종교의 깊은 종교적 체험이 상호 침투됨으로 말미암아 개종 없이 창조적인 깨달음이 오가는 대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세 가지 영역에 비추어볼 때 아카데미가 지난 35년간 펼쳐온 종교간의 대화모임은 그 두 번째 영역에 집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실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대화모임을 가진 경우도 있다. 1965년 용당산 모임의 주제 또한 이러한 실천적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였고, 1971년 “사회발전과 종교의 역할: 종교의 자율성과 법적 규제 문제를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대화모임에서는 ‘재산관리법 문제’나 ‘납세문제’라는 종교계와 사회가 맞물려있는 주제를 다루었으며, 1989년에는 “민족화해를 위한 종교인 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고 이웃종교들과의 만남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1997년에는 각 종교들이 벌이고 있는 북한 돕기 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것도 실천적인 대화모임의 사례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공동의 실천과제를 놓고 대화하는 모임이 빈약했다. 특히 당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굴곡된 한국 근대사에 나타난 가난, 비민주, 부정부패, 분단, 군사독재 등등의 산재되어 있던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각 종교의 뜻을 모아보는 종교간 대화모임이 매우 빈약했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고 있는 시기에 아카데미는 이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를 놓고 종교인들이 뜻과 행동을 모으는 실천적인 종교간의 대화를 지향해야 한다.

 

아카데미의 종교간의 대화가 가장 열악한 부분은 영성 깊은 ‘종교적 대화’의 부재이다. 기독교 중심으로 영성에 대한 강의나 훈련모임은 많이 있었지만 각 종교들을 모아놓고 각 종교의 영성의 전통들을 점검하고, 실제로 체험하고 교류하는 모임은 극히 빈약했다. 1993년 “침묵의 대화”, 1998년 “새로이 다가오는 영성의 시대”라는 주제의 모임이 전부이다. 그것도 상대방의 영성전통에 대해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 상황에서 설의 영성이 침투, 교류되었다기보다는 영성에 대한 서로의 이해를 확인하는 모임에 불과했다. 그것 자체도 큰 의의가 있는 모임이지만 서로의 영성의 교감을 통한 종교간의 대화야말로 종교간 대화가 지향해야 될,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영역이다. 이런 성격의 모임이 적었던 이유는 모임의 기획자인 인식 부족이라기보다는 종교간 대화의 영역에서 영성의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 한국의 종교간의 대화 자체가 성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더 옳다. 상호간의 이해와 자신의 종교적 체험의 깊이가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서로 진리파지를 향한 영성의 대화가 가능한데 아직 한국 제종교간의 이해 수준조차 일천한 상황에서 영성의 대화를 기대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 프로그램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라도 이 차원을 더욱더 강조하고 성숙시켜 가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피상적인 대화로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종교간 대화모임을 총체적으로 볼 때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 종교의 수장들 중심에서 점점 젊은 종교인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욕심을 더 내자면 이제 평신도 사이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35년 지도자나 학자들은 이웃종교인들을 만날 기회를 많이 가졌지만 평신도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이웃종교인들을 만나 삶을 나누며 대화하는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간의 대화가 실질적으로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종교간의 대화운동이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 종교들의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에 구체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도 종교간의 대화가 학자나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종교인들의 실질적인 문제라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세기의 종교간의 대화는 각 종교의 주체들인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대화의 장으로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카데미가 추구해야 할 또 다른 종교간 대화의 방향은 ‘종교 세대간의 대화’이다. 현재 한국종교계의 종교 세대간의 격차 또한 점점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종교계 ‘어른’들과 젊은 종교인들이 함께 만나는 ‘종교 세대간 대화’가 요청된다. 젊은 종교인들에게 기성 종교인들은 한국사회의 그 어떤 계층보다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계층으로 인식되고 있다. 종교의 정신적 지도자들이기보다는 굳은 종교제도 속에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지배자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하다. 또 종교계의 어른들은 요즘의 젊은 종교인들이 신앙이나 신심이 부족하고, 세속화되어 가고 있음을 한탄한다. 이러한 양 계층간의 간격은 종교의 발전에도 저해가 된다. 그러므로 종교 상호간, 종교 세대간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계기와 모임이 필요하다. 이는 차세대 종교지도자들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

 

4. 글을 마치며

 

종교간의 대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아카데미가 주도하고 있는 종교간 대화운동은 다종교사회에서의 종교인으로서의 성숙과 역사 속에서 종교의 역할을 위한 종교 상호간 이해와 협력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 운동이 굴곡된 한국 근대사 속에서 종교들의 본연의 자세를 되새기게끔 한 것은 한국종교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축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 안주하거나 뒷걸음질 없이 새로운 밀레니엄에 종교계의 새바람을 불어넣는 혁명적인 ‘종교간의 대화운동’이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한번 종교간의 대화의 목적이 종교 내적으로는 진리파지의 실천운동으로, 사회적으로는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각인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종교간의 대화 30주년 기념 대화모임에 방한한 사무엘 레이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대화의 목적을 기독교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대화는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 사이에서,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에서, 성(性)의 사이에서, 인류와 우주 사이에서, 그리고 억압의 희생자들과 죽음을 야기하는 구조 속에서 발생합니다. 대화는 모든 것을 위한 생명의 총체성과 사랑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또한 창조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반영하고 구현하게 하는 새로운 땅을 건설하는 데 동참함을 목표로 합니다.

 

이 목표를 지향하는 종교간의 대화모임이 하나의 평화운동으로 발전하고 나아가 세계 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기까지 아카데미의 종교간의 대화운동의 발걸음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ksunipa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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