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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에 대한 약평(곽범준/국제경제 93, 세계경제연구회)[진보넷의 학회평론에서 옮김]

DoDuck 2011. 6. 8. 02:49

헨리 조지에 대한 약평

곽범준
국제경제 93, 세계경제연구회


다음은 그 유명함에 비해 우리에겐 친숙하지 않은 미국의 한 경제학자에 대한
개략적 소개이다. 물론 유시민씨가 지은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에서
간단하게나마 그를 접한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그는 일반 경제사상사 책에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면서, 그리고 수많은 좌우파(?) 경제학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일부
지역, 국가가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있어서 앞으로의 향방이 더욱 주목되고
있는 그의 이론을 아래에서 살펴보자.

한 재미있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겠다.
호주의 한 지방에서는 그 곳에 시장이 서기 전에 땅값이 매우 쌌다. 하루는 정부가
그중 일부를 경매에 붙였다. 그 땅은 그 때 심한 황무지여서 쓰레기나 버릴 장소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고 보니, 사람들은 비싼 돈을 내고 사려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술 취한 한 사람이 경매장에 뛰어들었다. 그때 경매관은 값을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부르는 경매가격은 백원에서 2백원, 2백원에서 2백 50원으로
올랐는데, 2백 50원이 되었을 때엔 더 이상 비싸게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경매관이 3백 원 낼 사람은 없느냐고 하였을 때, 그 술취한 사람은 취기가 몽롱한
가운데, '내가 3백원을 내겠소'라고 한마디로 이에 응하였다. 그가 값을 결정한
후, 경매관은 그 땅에 그의 이름을 달아두었다. 매매가 결정되자, 모든 사람들은
헤어져 갔고 그도 또한 가버렸다. 다음날 경매관은 계산서를 가지고 그를 찾아가
땅값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제 술에 만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저지른
일을 조금도 기억해 낼 수가 없어서, 그 계산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에 그가
취중에 한 일인 것을 알고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정부에 대하여 계산을
어물어물할 수도 없어서 여러가지로 변통을 한 끝에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서 겨우 3백 원을 마련하여 경매관에게 지불하였다. 그는 그 땅을 얻은 후
오랫동안 손을 댈 능력이 없었다. 10여년이 지나자 그 땅 주위에는 모두 고층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 땅값은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그
땅을 수백만의 값을 지불하고 사고자 하였으나, 그는 팔지 않았다. 그는 땅을
나누어 사람들에게 빌려주고는 땅세만을 받았다. 다시 그후 땅값은 몇 천만 원으로
올라 그 술주정뱅이는 호주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이 호주의 몇 천만 원의
대부호는 돌이켜 보면 3백 원의 땅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한번 우리의 직관으로 평가해보자. 한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된
이야기는 당연히 유쾌하다. 그러나 이 부호의 부자된 연유를 따지고 보면 오직
3백원으로 그 토지를 샀다는 것 뿐으로 그 후에는 이렇다 할 개발이나 개량을 하지
않았고, 길을 닦지도 않았으면서 단지 잠이나 자고 몇천만원을 거저 얻은 것이다.
그러면 이 몇천만원은 실제 누구의 것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것은 모든
사람 즉, 사회의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여러 사람이 그 지방을 상공업의
중심지로 개발하여 그 지방의 땅값이 점점 높이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전적으로 사회에 의하여 창출된 것인데, 그것을 어느 개인이 차지하면....... 이는
지역공동체의 희생 위에 자기를 살찌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간단한 용어로
'도적질'이다. 반면에 정부가 개인의 노력으로 건설한 건물이나 토지개선의 결과의
가치를 세금의 형태로 취득한다 하더라도 이 역시 남의 것을 훔치는 형태의
하나이다. 정부가 생산자의 노력을 부당하게 가져가는 것을 그치게 해야 하고 또한
지주들이 지역공동체에서 착취하는 것을 그치도록 하여야 한다. 무슨 이론이나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이러한 평가가 당연하다. 그러면 이러한 평가와 조지의
이론이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본문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각설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이론을 알아보자.


1. 그가 이론을 펴게 된 동기 : 문제의식

조지의 경제분석은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가 지적하는 발전의 역설은, '부가 유례없이 증가하는 가운데도 빈곤이
광범위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수수께끼를 그의 말로 들어보자.
증기와 전기의 이용, 개선된 생산공정과 노동절약적 기계의 도입, 고도의 분업과
거대한 생산규모, 놀라운 유통시설…사람들은…당연히 생산력이 대폭 증대됨에
따라 빈곤이 일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러나 현실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꼬리를 문 발명과 발견은 하층민의 노동을 덜어주지도, 빈민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지도 않았다.…문명세계의 모든 곳에서 불황과 비자발적 실업, 자본의
낭비와 기업의 도산, 노동자계층의 빈곤과 불안의 소식이 들려온다.…이처럼
진보와 함께 빈곤이 따라오는 현상은 우리시대의 거대한 수수께끼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괴롭히는 정치, 종교, 교육이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
사회,정치적 문제의 근원이 되는 핵심적인 사실이다.

기계기술의 사용으로 인해 생산이 확대되었고 생산비가 저하되었으며, 총소득도
몇배로 늘어났다. 자본주의가 그 superpower를 발휘하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물질적 복지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산업이 융성하는 곳마다 빈부의 대조가 더욱 뚜렷해지고, 일부 계층은 현저하게
사치를 누리는 반면 일부 계층은 극도의 빈곤 속에서 연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시간이 길어지고 생산성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으며, 노동환경은 이상하게도 전통있는 공업중심지에서 더 열악하였다. 산업이
호황을 누리다가도 주기적인 불황이 닥쳐와서 노동자와 기업가가 다같이 고통을
겪었다. 기술진보에 빈곤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현상은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사회제도의 결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


2. 빈곤에 대하여

위의 문제의식을 기초로 빈곤의 원인을 찾던 그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분배법칙부터 따지고 들어간다. 조지는 고전경제학의 방식대로 생산의
삼요소를 토지와 그 자원, 노동, 자본으로 구분하였다. 조지는 이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노동이며, 인간이 노동을 토지와 자원에 투입함으로써 물자를
가공, 수송한다고 보았다. 자본은 생산의 한 요소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실은
과거에 투입된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 중 추후 사용을 위해 즉시 소비되지 않고
저장된 것이다. 자본의 형태는 기계류, 상품재고, 창고, 철도시설, 투자기금
등으로 다양하지만 일회 또는 그 이상의 과정을 통해 과거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에 불과하다. 즉, 자본은 노동의 결과물이고 과거 노동의 축적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재화와 용역의 생산은 전적으로 노동이 토지에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중 세째 생산요소인 토지는 인간의 모든 노력에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 자체는
수동적인 생산요소일 뿐이다. 그런데 막상 생산의 댓가가 분배될 때의 사정은
어떠한가? 생산과정에는 노동(과 자본)만이 참여했을 뿐인데, 생산에 의한 소득은
세 갈래―즉 노동에는 임금, 자본에는 이자, 토지소유자에게는 지대가 분배된다.
그러나 조지가 반복해서 지적하듯이, 토지소유자는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토지를 소유한다는 사실만으로 댓가를 받는다. 인간이 만들지도
않았고 또한 증가시킬 수도 없는 자연물에 대한 사유권을 인정함으로써 발생한
독점가격이 바로 지대인 것이다. 헨리 조지는 토지에 대한 사유권 인정을 공기나
물에 대한 사유권 인정만큼이나 부당하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공기나 물의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토지의 사유권도 인정해서는 안된다―아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조지는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이 생산소득의 부당한 분배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토지소유자가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생산의
댓가를 취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3. 진보에 대하여

그는 진화론적 발전을 배격했다. 다윈이 설명한 진화론이 옳다면 문명사회와
미개사회의 차이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굳어져갈 것이다. 조지는 이것을
거부하고 '순환론적인' 사회발전론을 제시하였다. 즉 인류역사는 과거 수많은
문명사회의 발생, 성장, 몰락, 그리고 망각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제국, 중국의 많은 왕조들이 그러했다. 과거 인류역사에서 우리는
하나의 문명사회가 몰락할 때, 그 몰락의 씨앗이 내부에서 발생함을 보아왔다. 즉
문명사회는 안으로부터 썩어가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과거 수많은
문명사회의 흥망성쇠 과정을 자세히 보면 진보를 멈추게 하는 장애물은 바로
진보과정에서 생성된다는 자명한 진리에 이르게되는데, 이 진리 뒤에 내재한
엄연한 인과관계로부터 조지는 진보의 원리를 풀어냈다.
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또한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조지는 결국 이런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인간 정신적 능력의 낭비적
소모를 초래하며, 이 낭비적 소모의 정도는 인간 사이 불평등의 정도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조지는 협동적 결합과 평등을 합친 평등상태의 협동적 결합이 진보의
법칙이라고 단언했다. 다시 말하면, 협동적 결합은 진보의 원천인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진보적 목적에 최대한 동원되도록 하는 요인이고, 평등은 인간 사이의
분쟁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쓸데없이 소모되는 것을 방지하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이 '평등상태의 협동적 결합'을 파괴하는 근원이 바로 토지의 사유화인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조지는 자신의 철학을 토지문제와 연결시켰다. 헨리
조지는 토지사유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은 변함없이 사회 붕괴의
가능성을 안겨준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아무리 정치적 평등을 법으로 보장하더라도
부의 불평등 아래에서 권력의 평등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은 생계를 위해 언제든지 권리를 팔아넘기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썩어빠진 민주주의는 썩어빠진 독재보다 나쁘지 않을 지 모르나
전자가 국민성에 미치는 영향은 후자보다 더 나쁘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드디어
국민을 부패시킨다. 국민이 부패하면 소생의 여지가 없다."


4. 공황론

자본주의를 구원(?)한 케인즈는 공황이 발생하는 것은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분석하였다. 그는
생산물을 크게 소비재와 생산재로 구분하고, 소비재는 소비자가 수요하고 생산재는
기업가가 수요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소비자는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그 소득 중
점점 큰 부분을 저축하려 하는 성향을 가지므로, 이에 따라 생산규모의 확대에
대한 소비자의 소비수요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결국 소비자의 저축성향이
증가하고 기업가들의 장래 전망이 비관적으로 변하여 투자를 중단하게 되면,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격감하게 되고 이에 따라 공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케인즈 공황이론의 주된 골자이다. 이러한 케인즈의 이론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이후 여러나라의 정책에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1970년대 이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케인지언의 자신만만하던 태도가 1974년
대공황 이후 깨어진 것이다. 그러면 케인즈 학파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케인즈학파 정책의 가장 큰 착오는 유효수요의 증가가 그대로
생산과 고용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 점이다. 생산부문에서 이윤을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이 악화된 상황에서, 증가된 유효수요는 생산부문의 확대보다는
투기부문에 흡수될 수 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헨리 조지의 공황론과 그 대책은 이러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다.
투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인데, 토지에 대한 투기는 생산물에 대한 투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상품의 경우에 해당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면 공급이 증가하여
이것이 상품투기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상품투기에는 자율적인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토지투기의 경우, 토지투기는 지가상승을 초래하고
다시 지가상승은 토지투기를 조장하기 때문에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Inflation-Speculation Spiral 이라 한다.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상승의 상한선은 임금과 이자의 하한선에 의해서 저지될 뿐이다. 이러한
논리로 헨리 조지는 흔히 받아들여지던 과잉생산에 의한 경제불황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에 시달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지가상승, 특히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상승 때문이라는 독특한
경기변동론을 제시하였다. 경제불황의 원인이 과잉생산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과잉생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근로소득이 너무 낮아 많은
대중이 구매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 구매력의 하락은 토지 투기에서
비롯된다―이 원인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유효수요의 외형적
증가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호황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에는 투기성 지가상승 역시 현저하였고 이어서 생산위축의 증세가
나타남이 상례였는데, 일반적으로 이 증세는 지가상승이 유난히 높은 지역에
있어서의 수요감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조지의 관찰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보면, 1872년경의 미국의 불황은 광범위한 철도부설 때문이었다. 이
철도부설은 인근지역의 토지투기붐을 조성하여 지가를 급증시켰고, 이 때문에 건축
및 기타 생산을 위한 토지개발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것이 드디어 전반적
경제불황으로 번졌다고 조지는 주장하였다.
헨리 조지가 제기한 경기변동론은 정통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토지사유권이 인정되는 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지대소득이 근로소득을 희생하고
지속적으로 증대하리라는 그의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호된 비판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이론의 설득력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근거가 되었다. 우선 많은
통계자료에 의하면 지대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고, 특히
사무앨슨은 GNP나 NNP에서 지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과연 지대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가? GNP에서 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1991년 땅값의 총액은 공시지가(公示地價) 1821조원으로
같은 해 GNP인 206조원의 8.8배나 되었다. 실제 시가로 추정하면 2500조 정도로
예상되는데 그러면 지가가 한해에 20%정도 올랐다고 했을 때, 불로소득이 약
360조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지대소득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이같은
자료 등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추정해보면, 지대가 국민 소득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란 것을 알 수 있다. 해리슨이라는 경제학자는
조지가 충분한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나 비판이
있었다고 보고, 공식 통계상의 자료들은 실상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Power in Land」라는 글을 통해 조지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대한 실증적
자료 및 사례들을 수집, 분석하였다.
Kuznets가 조사한 미국 GNP의 장기추세를 보면, 미국의 경제는 대략 20년을 주기로
장기 순환을 보인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Hoyt가 1818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의
지가추세를 조사해본 결과, 지가변동이 약 18년을 주기로 하였음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해리슨은 건축경기도 대략 18년을 주기로 변동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관계를 잘 살펴보면 지가가 최고로 비싸진 1∼3년 후 불황이 도래하고, 이 불황에
앞서 건축경기가 퇴조하는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해리슨은 많은 자료와
실례를 통해서 건축경기 순환이나 지가―건축경기―경제불황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변수가 이자율이 아니라 바로 '토지투기'라고 결론지었다. 토지투기는
원활한 토지공급을 저해하고 지가를 상승시킴으로써 건축활동을 위축시킨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상승이 주택가격이나 임대료를
상승시킴으로써 가계를 압박하고 소비지출을 축소시킨다. 부진한 건축경기는 경제
전체로 파급되고 여기에 소비감소의 요인까지 겹쳐서 드디어 경제 전체의 불황이
오게 된다는 것이 조지의 논리에 따른 해리슨의 설명이다. 흔히들 1970년대 이래
선진국들이 겪은 그 심한 불황, 그리고 이로 인한 대량실업은 1973년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OPEC 석유파동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석유파동 이전에
이미 불황의 싹이 트고 있었고 비록 석유파동이 없었더라도 불황은 있었을 것임을
장기적인 지가자료로부터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해리슨은 단정했다.
석유파동은 단지 그 불황을 더욱 촉진해준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기본 모델인 ( 노동 + 자본 + 토지 )에서 제3항인 토지는 신고전학파
이후 별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프리드만은 토지와 자본을 구별하지 않아도
경제학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고, 케인즈는 토지시장의 악영향은
농업중심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이를 묵살해 버렸다. 이렇게 토지가
자본의 영역으로 흡수되면서 토지 사유화로 인한 파괴적 악영향은 자본 속으로
은폐되었고, 지주에게 집중되어야할 지탄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자본가 혹은
노동자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같이 '문제의 진원지가 흑막에 가려진 상태'에서
수립된 대책이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교훈을 해리슨은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각국을 휩쓴 불황에 대한 각국의
경기부양정책은 조세감면, 임금억제, 혹은 생산성 제고 등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실패하거나, 설령 일시적으로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 성과가
지대소득에 흡수되어 버림으로써 결국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토지소유자들만 큰 이득을 보았다는 것은 이런 정책 실시 이후에 나타난
급격한 지가상승으로 여실히 증명된다고 해리슨은 주장했다.


5. 해결책

그는 빈곤을 추방하고 노동의 정당한 댓가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토지를
공유재산으로 만드는 것 뿐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토지를 공유재산화하는
구체적인 실시방안으로 토지단일세를 제창하였다. 흔히 토지의 최적이용과 토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토지의 사유화가 꼭 필요하다고들 말하지만 헨리 조지는
이러한 주장이 우연과 필연을 혼동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토지에 대한 사유권의 인정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으로
인한 이익에 대한 권리를 확고히 보장하는 것이다. 토지가 공유화된 상태에서는
토지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용도에 즉시, 그리고 항상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토지사유화 상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토지단일세란 말 그대로 세금을 100%를 지대로 충당하는 것이다. 물론 건물에도
세금은 부과하지 않는다. 토지단일세는 한편으로는 근로 및 자본축적에 대한
조세를 없앰으로써 생산의욕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독점 및 토지투기
억제를 통해 토지의 생산적 이용기회를 높여줌으로써 이중으로 생산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결과 보다 높은 국민소득의 수준에서 총수요와 총공급이
균형을 이루면서 불황은 없어지게 된다. 한편, 토지공유화의 일환으로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토지에 대한 모든 사람의
동등한 권리를 표방한다는 대의명분은 있을지 모르나, 우선 토지몰수는 사회에
필요없이 큰 충격을 줄 우려가 있으며, 또한 필요없이 정부의 기능을 확장할
우려가 있다. 헨리 조지는 "진실로 필요한 것은 토지의 몰수가 아닌 지대의
몰수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 이외의 모든 조세를
철폐'하는 토지단일세를 제창하였다.


6. 현실에의 적용

완전한 토지단일세 제도는 오늘날 재정제도 개선에서 진지한 고려대상이 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전국규모로 채택할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조지 이론의 중심적인 원리 즉, 조세부담은 생산기업과 토지개량물에
부과되기보다는 토지가치에 부과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재정개혁의 활발한 논점이
되고 있다. 토지를 토지개량물보다 더 높은 세율로 과세하는 형태, 토지개량물에
대한 조세를 완전히 또는 일부분 면제하고 토지세를 인상하여 세입 손실액을
적용하는 형태, 토지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토지매각에서 생기는 이익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형태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의 정책대안이
함의하는 토지소유권과 주택사용권의 분리 문제도 조지의 이론에서 그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을 분리하여 소유권은 세금을 통해서 국유 또는
사유화하고 사용권만 개인에게 불하할 경우, 토지의 매매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지가상승에 따른 토지가격 상승분이 주택임대료에 전가되지 않고 단지 주택의
입지에 따른 도시지대의 증대분만이 임대료에 포함될 것이다. 따라서 토지소유권과
사용권을 분리한 토지의 사회화는 장기적으로 주택임대료를 안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상과 같은 형태는 호주(지방자치단체의 2/3가 토지에만 재산세를
부과한다)와 뉴질랜드, 캐나다 서부지역, 남아프리카 등의 지방정부에서 더러
나타난다. 덴마크에서는 토지개량물에 대한 세금을 많이 감면해 주는 대신 고율의
토지세를 부과하거나 토지가치 증가액에 대해 국세를 부과한다. 미국에서는
토지세를 재산세의 한 요소로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에 데러웨어주,
뉴저지주, 알라바마주, 캘리포니아주 관개지역 등에는 '토지단일세'를 적용하는
일부 지방이 있으며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나 스크랜톤에는 차등세율을 실시하고
있다. 아시아의 예를 보면, 토지단일세 제도는 중국 손문의 삼민주의 구상에 큰
영향을 주어 오늘날 자유중국 토지세제의 기반을 이루었다. 명치유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본이 1890년대의 불황에 휘말릴 때에 {진보와 빈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한때 토지세제 정비운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7. 반대론

▶ 지대 외의 불로소득은 왜 거론하지 않는가?
☞ 물론 다른 불로소득이 존재하고 또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다른 것의 근본적 원인이 토지문제이고, 다른 형태의 자본소득 중에서
불로소득을 가려낼 수 있다고 하여 토지가치 환수의 우선순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적절한 재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병의 원인은 바로 토지이다.

▶ 천연토지의 가치와 토지개량물의 가치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 실제로 많은 나라, 지역들이 이것을 구별하여 과세하고 있다. 건물 기타
인공물의 비용은 쉽게 알 수 있고, 어느 부동산의 총평가액 중 이 비용을 뺀
잔액이 천연토지의 가치가 된다. 물론 습지의 배수, 경사지의 계단식 개발 등과
같이 토지 자체의 형질 변경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토지와 구분하기
어렵게 되는 이러한 종류의 개량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간 동안 조세를 면제하지만
그 후에는 토지 자체와 혼일된 것으로 간주한다.

▶ 토지세가 증가하면 세액이 소비자나 임차인에게 전가되지 않을까?
☞ 토지는 증산 또는 감산을 할 수 있는 인공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가용토지의 양이 일정하므로 추가세액의 효과는 토지소유자가
취하는 순지대소득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지는 토지세는 소유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못하며, 그
자신이 부담할 수 밖에 없다는 학설을 제시하였다.

▶ 완전한 토지세를 실시하면 누가 토지를 소유하려 하겠는가, 또 토지를 개량해
최선의 용도로 사용하 려는 의욕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 토지소유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토지소유자는 토지개량물, 개인소득,
생산기업에의 투자 등에 대한 세금이 없어지기 때문에 직접 이익을 볼 수 있다. 또
대토지 소유자는 지대소득의 상실로 인해 당장은 피해를 입겠지만 개혁의 장기적인
효과에 의해 다른 계층과 함께 공동의 이익을 누린다고 한다. 그리고
전술하였듯이, 토지가 공유된 상태에서는 토지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용도에 즉시
그리고 항상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토지 사유화 상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 토지만을 대상으로 하는 조세는 탄력성이 없어서 정부세입의 수요변화에
부응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 토지세액은 인구성장 및 이에 병행하는 토지가치 상승에 의해 증가하므로
본질적으로 탄력적인 조세이다. 그리고 토지세 자체의 액수가 엄청나기 때문에
토지단일세만으로도 모든 정부에 충분한 세입이 될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의
향상이 있을 것이므로 정부지출도 줄게될 것이라고 조지는 확신하였다.


8. 결론

아담 스미스의 장점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을 향한 개인의 노력과 동기를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시장경제체제의 원리에 무슨 잘못이 있는 때문이 아니고, 단지 시장경제체제의
두가지 전제조건―불평등과 특혜의 법을 폐지하는 것과 정의의 법을 실현하는 것,
즉 공정한 거래를 보장하는 것―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전제조건을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점과 특권에 대한 처방이나 부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하여 대처하기가 어렵다. 토지의 사유화가 지속되는 이상,
스미스의 두가지 전제조건은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헨리 조지의
이론은 이 전제조건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 맑스의 이론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인식과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간단히 말해서 동기, 자극의 결핍과 합법적인 자유의 불가피한
제한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정리하면, 경제학의 가장 고질적인 질문인 효율성과 형평성의 조화에 있어서
맑스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접근방법은 형평성에 지나치게 치우친 결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취약점을 고정시켰고, 한편 서구의 자본주의적 접근방법은
효율적인 측면에서는 일부 효과를 거두었지만 역시 형평성의 측면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이 두 방법의 공통점은 토지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미스는 "지대는 소유주가 그 스스로의 아무런 주의나 노력 없이
향유하는 일종의 수익이다. 그러므로 지대는 특정한 세금을 부과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익인 것이다" 라는 말로, 그리고 맑스도 {자본론} III에서 잉여가치가
결국에는 지대로 이전된다고 적으면서 지대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지만 그의
저작에서 토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맑스의 문제의식 아래에서 스미스가 제창한 자유방임 경제체제와 토지단일세를
통한 토지공유화를 결합한 접근방법, 즉 조지의 접근 방법이 아직 시도되지 않은채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이며 효율성과 형평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묘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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