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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 토지와 평화 _ 남기업 교수 [<평화한국-평화제작소>에서 옮김 ]

DoDuck 2011. 6. 8. 02:22

헨리 조지: 토지와 평화 _ 남기업 교수

리더십아카데미/강의 l 2010/08/18 16:58

헨리 조지: 토지와 평화

 

남 기 업(성토모 회장,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Ⅰ. 헨리 조지는 누구인가?

 

1. 헨리 조지의 생애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미국)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실한 복음적 신앙을 가진 영국계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부친은 성공회의 기도서와 주일학교 교재를 취급하는 소규모 출판업자였고 모친은 전직교사였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헨리 조지의 공식교육은 만 14세가 되기 전에 끝났다. 이후 소년 헨리 조지는 도자기 가게 등에서 심부름을 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성경을 비롯하여 문학과 역사 서적을 늘 읽었고, 지역의 퀘이커 도서관을 열심히 이용하면서 독서에 힘썼다. 그는 15세부터 선원이 되어 호주와 인도까지 항해하였고, 이후에는 인쇄소, 광산과 농장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한번은 둘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는 해산한 아내를 위해 길거리에 나가 구걸해야 했던 비참한 처지에 처할 때도 있었을 만큼, 그 스스로 빈곤과 실업의 고통을 체험하였다.

 

1865년 링컨 대통령의 암살소식을 듣고 노예제 철폐론자였던 헨리 조지는 격분하여 짧은 열정적 추도문을 써서 자신이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던 신문에 기고하였는데, 이 글이 신문의 머리글로 실렸고, 그 필자가 헨리 조지임을 알게 된 편집인이 그를 발탁하여 기사를 쓰도록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헨리 조지는 언론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헨리 조지는 신문사의 뉴욕 특파원으로 반년동안 파견되었는데, 극도의 사치와 비참한 빈민가가 공존하는 뉴욕의 대로에서, 부가 증가하는 진보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빈곤으로 고통당하는 현실의 원인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후일 어느 아일랜드 성직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헨리 조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어느 날 낮 대로 상에서 어떤 사상, 어떤 비전, 어떤 소명이(그 외 무엇으로 표현할지)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의 모든 신경이 전율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 그 시점에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저는 잘했건 못했건, 성취했건 못했건 그 맹세에 충실하였습니다.”(Robert V. Andelson·James M. Dawsey, 202-203쪽).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어느 날, 말을 타고 뉴욕에서의 맹세를 생각하다가, 헨리 조지는 부의 증가와 빈곤의 증가가 동행하는 이유를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생각에 빠져 야산을 달리다 보니 말이 지치고 말았다.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쉬면서 지나가는 일꾼에게 인사 삼아 땅값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멀리서 쥐만한 크기로 풀을 뜯는 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저 너머 땅을 팔려는 사람이 있는데 1에이커에 1천 달러라고 하데요.” 이 때 부의 증가와 빈곤의 증가가 동행하는 이유가 영감처럼 번쩍였다. 인구가 증가하면 토지 가치가 오르고, 이 토지가 필요한 사람은 돈을 더 내야 한다. 나는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였고, 그 생각은 그 뒤로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Robert V. Andelson·James M. Dawsey, 203쪽).

 

헨리 조지는 이 깨달음을 심화시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 1879)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부가 증가하는 물질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심화되는 ‘진보 속의 빈곤’에 대한 원인이 바로 토지 문제에 있음을 밝히고 그 해결책으로 지대조세제를 제시하였다. 일년 반이 걸려 책의 마지막 장을 끝낸 날 한밤중에 헨리 조지는 벅찬 감동에 휩싸여 무릎을 꿇고, 어린이처럼 울면서 “나머지는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헨리 조지가 만 40세 되는 해에 출간한 『진보와 빈곤』은, 당시 구미와 호주의 독서계를 휩쓸어 1900년까지는 영어로 쓰인 논픽션분야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되었고 지금까지도 경제학 서적으로서는 가장 많이 보급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조지는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아일랜드, 영국, 호주, 뉴질랜드를 순방하면서 강연하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이들 영어권 국가들에서 당대에 지공주의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헨리 조지는 평생 독서에 힘썼고, 그 결과 세계 사상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사회사상가나 저술가가 아닌, 지공주의 실현을 위해 그 인생을 바친 사회개혁가였다. 아가일 공작(Duke of Argyll, 1884년 4월 “샌프란시스코의 선지자”라는 글로 헨리 조지를 비판, 조롱함)은 헨리 조지를 폄하하기 위해서 ‘선지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헨리 조지는 이 표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헨리 조지는 뉴욕의 165개 노동 조합의 추대를 받고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는가는 그의 죽음과 장례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헨리 조지는 쉴 새 없는 강연과 집필로 몸이 쇠약해졌고 가벼운 뇌출혈로 일시적으로 실어증을 앓기도 했는데, 무리할 경우 치명적인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의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뉴욕과 전 미국에 지공주의를 전파하고 대변하기 위한 목적으로, 뉴욕시장 선거에 한 번 더 입후보했다가 선거 기간 중 사망한다. 후보 지명 수락연설에서 헨리 조지는 죽음을 예견하고 각오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께서 저를 후보로 지명하신 뉴욕 시장직은 제 견해를 완전하게 실천할 권한이 없는 자리이지만 저와 생각을 같이 하는 분들을 대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습니다. ...... 이런 가치를 위해 사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시대와 자기 세대에 바치는 것보다 더 큰 봉사는 없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몇 년 더 산다는 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자신의 국가, 민족, 시대를 위해 죽는다면 그보다 더 값지고 숭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Robert V. Andelson·James M. Dawsey, 219쪽).

 

선거기간 중 헨리 조지는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약 10만 명이 조문을 하였는데, 그의 평생의 동지 맥글린 신부가 다음과 같이 조사를 할 때에는 유례없는 자발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인은 단순히 철인이나 현인이 아니었습니다. 꿰뚫어 보는 자요, 선구자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스승이었습니다. 고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요한이라.” 제가 감히 성경을 본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헨리 조지라."(Robert V. Andelson·James M. Dawsey, 221쪽).

 

2. 헨리 조지의 신학 사상

 

헨리 조지는 사회철학자, 경제학자, 사회개혁가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고 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특정 교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에서 늘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했고 찬송가도 자주 불렀다. 헨리 조지의 모든 저술은 영적인 느낌으로 충만해 있고, 그의 『정치경제학』(The Science of Political Economy, 1898, 사후 출판)에도 자연 질서의 뒤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가 여기저기(특히 제1편, 제7장의 전체) 나타난다(Robert V. Andelson·James M. Dawsey, 198쪽). “노동의 문제”(The Labor Question)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자신을 비롯한 지공주의자들의 강령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더 잘해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의 뜻에 맞게 행할 뿐이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통일의 3걸 중 한 명인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5)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대한 이탈리아인 마치니는 말했다. ‘사회 개혁을 위한 모든 운동은 사람들의 종교적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 이상 희망이 없다. 이기심에 근거해 있는 권력과 조직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서는 이것이 너에게 이익이 된다는 식으로 사익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더 깊고 더 강렬한 종교적인 감성에 호소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형제애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헨리 조지는 지공주의 운동을 단순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아닌, 신앙 각성 운동으로 보고 있었으며, 또한 종교 쇄신 운동으로 승화되는 길만이 지공주의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헨리 조지는 구약 오경을 비롯한 성경 연구를 통해, 지공주의에 대한 성경적 전거(典據)를 마련하였고, 근원적으로 성경의 하나님의 부성애(父性愛) 사상(the Fatherhood of God)과 인간에 대한 형제애(兄弟愛) 사상(the Brotherhood of Man)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였다(안흥철, 36쪽). 이 과정에서 나온 그의 유명한 연설문들이 바로 ‘모세’, ‘나라이 임하옵시며’,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등이다. 그는 '지금 여기에'(Now & Here) 계시는 하나님을 중시하였다. 그는 연설문 ‘모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히브리 종교의 하나님은 불변의 법 가운데 지금 여기 계시는 하나님, 죽은 자뿐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성전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시장터의 하나님입니다.”(헨리 조지b, 106쪽). 이런 헨리 조지의 기독교 사상은 이후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신학 노선에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 사회복음주의자인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는 “1886년 조지의 뉴욕 시장 선거에서 사회적 차원의 깨달음을 처음 얻었으며,” 개인적 차원의 기독교와 사회적 차원의 기독교 양자를 통합하는 개념인 ‘하나님 나라’ 사상도 1886년 조지의 선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라우쉔부쉬를 비롯한 사회복음주의자들은 헨리 조지의 사회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지상성이라는 개념은 신학적으로 발전시켰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론으로는 칼 마르크스를 택하고 말았다. 오래된 사회적 불의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도 종합적인 방안을 찾아낸 헨리 조지는 현대의 모세로 비유될 수 있으며, 현대의 해방신학이 유명하게 되기 일 세기 전에 헨리 조지는 여러 측면에서 이미 해방신학자였다(Robert V. Andelson·James M. Dawsey, 198쪽).

 

3. 헨리 조지의 영향

 

헨리 조지의 사상은 많은 이상주의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예를 들면,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헨리 조지의 연설을 듣고 인생 행로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하였고 쑨원(孫文, 1866-1925)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삼민주의(三民主義) 중 민생주의(民生主義)의 핵심적인 토지정책을 세웠으며,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헨리 조지가 제시한 토지문제 해결책은 아주 완벽하여 현 국가체제와 조세제도 하에서 이보다 더 우수하고 공정하고 실제적이고 평화로운 해결책은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헨리 조지는 인품과 문체에서도 또한 뛰어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불행하게도 헨리 조지와 같은 인물은 드물다. 지성적인 예리함, 예술적인 문체, 정의에 대한 확고한 사랑이 아름답게 조화된 점에서 헨리 조지를 능가할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는 “헨리 조지를 읽으면 아름답고 힘찬 영감, 인간성의 본질적인 고귀함에 대한 빛나는 신념을 그의 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헨리 조지가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19세기 후반 침체상태에 빠졌던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을 부활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마르크스의 딸(Eleanor Marx)의 연인이었던 아벨링(Edward Aveling)은 헨리 조지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헨리 조지 사상은 경제활동의 자유와 자본의 사유(私有)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본질적으로 융화될 수 없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의 핵심은 ‘삼균주의(三均主義)’로서 조소앙이 기초하였는데, 조소앙은 당시 중국 쑨원의 민생주의와 영국 노동당에 영향을 미친 헨리 조지의 사상을 한국의 전통적인 균등 사상과 결합하여 삼균주의 중 ‘경제 균등론’을 기초하였다.

 

쑨원의 민생주의는 조소앙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조소앙의 삼균주의 중 경제균등의 내용인 ‘토지국유화’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는 쑨원의 민생주의와 비슷하다. 조소앙은 1904년에 <손문전(孫文傳)>을 읽었고, 1907년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국민당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 때 교류한 대표적인 사람인 짜이찌타오(載季陶)는 1925년 『삼민주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저서를 통해 삼민주의를 민생철학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인물이었다. 1930년 8월 12일 조선총독부 경찰국은 일본외무성 아세아 국장에게 한국독립당의 경제균등론이 중국 국민당의 민생주의와 일치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도 있다.

 

조소앙은 3·1운동이 고립무원 속에서 실패한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관 자격으로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 사회당 대회(Permanent Commission of Labour and Socialist International)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을 승인받았다. 영국 노동당 지도자 헨더슨(Henderson)의 사회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합법성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지적하며 각국 대표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국 독립 승인 결의안”(1919. 8. 8)을 제출하였고 이에 대해 이 대회는 한국의 요구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국제연맹에 한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였다. 조소앙은 영국 노동당 대표인 토마스(James Henry Thomas)로부터 한국 문제를 위해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또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 한국 독립방안을 논의하면서 교제하던 중 영국 노동당의 개혁 노선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여러 차례 영국 노동당을 모범 사례로 들기도 하였다. 또 조소앙은 1920년 4월 런던에서 영국 노동당 지도자들과 합작하여 영국 하원에서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 일본의 한국인 탄압과 수원 제암리 사건 등 한국 문제에 대한 대정부 질문안을 통해 일본을 규탄하였는데, 당시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영국의 의회에서 한국 문제를 토의케 하였다는 사실은 외교활동의 큰 성과였다. 2년에 걸친 유럽 순방은 조소앙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레닌의 노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만국 사회당 대회의 참석,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조소앙은 큰 영향을 받아, 영국 노동당의 개혁 노선을 수용하고 볼세비즘은 철저히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 노동당의 이론가 집단은 헨리 조지에게 영향받은 페이비언 협회였음을 생각할 때, 조소앙이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조소앙의 경제균등론은 김구의 균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임시 정부의 건국강령과 경제정책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김구는 1949년 암살당한 해, 그의 마지막 신년사에서, 소련식 공산주의도 아니고 미국식 자본주의도 아닌,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통일 독립 국가를 염원하였다. 김구는 “동포가 굶어죽고 얼어죽”는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경제균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균주의에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균등이었으며, 경제 균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토지문제의 해결이었다.

“우리는 이제 또 새해를 맞게 된다. 좋든 언짠튼 느낌이야 없으랴. 그러나 과거 일년을 살어온 나의 자취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뿐이다.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동포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그리고 또 서로 찔러 죽여도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통일론자라 하면서 점점 굳어가는 국토의 분열을 막지 못하였고 마땅히 할말을 하지도 못하였다. 또 독립운동자라 하면서 독립을 위한 진일보의 표현도 하지 못하였다...... 쏘련식 민주주의가 아모리 좋다 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모리 좋다 하여도 독점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상품시장화 하는 데는 악질이다...... 우리는 ...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가지기만 원하는 것이다. 더구나 반쪽의 조국만이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원하는 것이다.”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28일,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발표한 경제정책은 다음과 같다.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서 균등 사회의 복지생활을 보장할 것.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토지사용법, 지가세법(地價稅法) 등의 법률을 규정하여 한기 실시할 것. 국민의 현유(現有)한 사유 토지와 중소 규모의 사업(私業)기업은 법률로써 보장할 것. 토지국유는 점진적으로 실행한다." 이 경제정책 중 토지 국유화의 주대상은 일본인 소유의 ‘적산’과 친일파 소유 토지였다. ‘국민의 현유(現有)한 사유 토지’는 법률로써 보장하는 대신 지가세법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바로 헨리 조지의 토지 가치 과세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요컨대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 공유 사상은 해방직후 남·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애썼던 임시정부 세력의 정책적 기반이었던 조소앙의 경제균등론을 통해 일찍부터 우리나라와 맥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Ⅱ. 토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 희년(음력 7월 12일)은 속죄일

 

○ 토지와 자유와 가족의 회복을 위해 나팔 소리를 크게 불어야 하는 희년은 속죄일.

○ 그런데 이스라엘 달력은 우리나라 음력보다 약 한 달이 빠름

○ 그래서 이스라엘의 속죄일은 우리에게 음력 팔월 십일 경, 곧 한가위 명절에 해당.

 

□ 희년의 사회적 의미는 땅과 집과 몸의 회복을 통한 가족 공동체의 회복

 

○ 예나 지금이나 토지가 없으면 자유가 없음.(No Land, No Liberty!)

○ 자유만 공포하고 토지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타인의 품군살이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자유를 상실하게 됨.

○ 온전한 자유를 위해서는 토지권을 회복해야 함.

 

□ 희년은 공의로운 계약의 만료임(레25:13-17, 레25:39-55).

 

○ 땅의 사용권과 몸의 품(노동)을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매매가 가능했는데 희년이 바로 계약이 끝나는 날임.

○ 가난한 사람들이 빚을 질 때 최후로 저당 잡히는 것이 바로 땅과 집과 몸이었음

○ 땅은 영원히 팔 수 없기 때문에 희년까지 남은 햇수를 계산하여 그 땅의 열매의 다소를 따라 땅값을 일시불로 받고 땅의 사용권만을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팔 수 있었음

※ 희년의 풍경

“예를 들면 아버지가 병들어 일할 수 없고 가난하게 되어 땅과 가족들의 몸을 희년까지 저당잡히고, 큰 아들은 강 건너 강부자 집에, 둘째 아들은 산 너머 최부자 집에, 이런 식으로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설움 많은 품꾼살이로 들어 갔다가 희년이 오면 계약이 만료되어 토지와 자유를 회복하여 그리운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희년의 토지와 자유의 회복은 부자가 손해를 무릅쓰고 베푸는 은혜가 아니라, 부자와 빈자 어느 누구도 손해보지 않는 공정한 계약의 만료로서 부자가 마땅히 해야할 것이었다. 이 점에서 희년은 공의이며,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 것이었다(미6:8).

 

□ 무르기 제도(레25:23-28)

 

○ 무르기 제도의 대원칙은 토지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것

○ 토지 무르기는 대신 값을 치르고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것인데 이것이 다름 아닌 구속(救贖)임.

○ 근족은 무르기 제도가 있었음

※ “여호와의 기뻐하는 금식은... 골육(骨肉)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

(사58:6-7), 즉 무르는 자로서의 근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임.

○ 예수님은 구속자(Redeemer)임. 그는 친히 우리의 근족(近族)이 되어 주셔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우리의 죄로 잃어버린 토지자유가족을 회복시켜 주셨음. 즉, 어린양의 보혈, 예수님의 피값을 대신 치르시고 하나님 나라 기업과, 마귀의 종노릇으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는 진정한 가족 공동체를 주셨음.

○ 토지와 자유를 회복하는 방법

- 첫째, 근족이 물러 줄 경우.

- 둘째, 자기 스스로 무를 경우.

- 셋째, 물러 줄 근족도 없고, 자기도 무를 수 없을 때, 희년에 회복하는 경우.

 

□ 희년과 이스라엘 사회

 

○ 하나님의 말씀 : 레위기 25장 18절 ▶ “너희는 내 법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히 거할 것이라.”

○ 실제: 열왕기상 4장 25절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 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 희년에서 추출할 수 있는 원칙(principles)

 

○ 성경의 현대적 적용을 위한 세 가지 과정

- 먼저 구약성경당시 상황에서 세부 규정들을 이해해야 함.

- 거기에서 원칙을 추출해야 함.

- 그것을 현대에 맞게 적용해야 함.

○ 희년의 원칙

- 토지신유(土地神有)

- 평등지권(平等地權)

※ “그 이웃의 지계표(land mark)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17)

- 토지공유(土地公有)

※ “땅은 인생(the children of men:모든 인류)에게 주셨도다.”(시115:16).

- 지대공유(地代公有)

땅의 이익은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전5:9).

○ 당시 사회 이해

- 농경사회는 토지의 균등 소유가 가장 중요함.

- 토지가 없으면 종이 될 수밖에 없음.

○ 현대 사회에 적용

- 산업사회에서 토지를 균등 분할하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임

- 토지의 가치만 공유하면 됨: 즉, 좋은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은 금액을 내고 사용하고, 좋지 않은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은 낮은 금액을 내고 사용하면 됨.

- 소유권 중 처분권과 이용권은 토지소유자에게 주되, 수익권은 공동체가 환수함.

 

 

Ⅲ. 토지와 평화

 

1. 토지가치공유: 노동과 자본간의 평화

 

□ 자본과 노동의 갈등의 상당한 원인도 부동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큼.

○ 임금협상에서 노동자는 하한선을, 자본가는 상한선을 생각함. 다시 말해 노동자는 적어도 이정도 ‘이상’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본가는 이정도 ‘까지’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 예를 들어 노동자의 임금 하한선이 월 300만원이고, 자본가의 임금 상한선이 400만원이면 임금협상은 가능함.

○ 그러나 부동산투기가 일어나면 노동자의 하한선은 올라가고 자본가의 상한선은 내려감. 왜냐하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주택가격이 상승하면 주거비가 급상승하는 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비용중 하나인 토지임대료가 급상승하거나, 추가로 토지확보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

○ 이렇게 되면 타협의 공간은 계속 줄어들게 됨. 만약 노동자의 하한선이 자본가의 상한선보다 높을 경우에는 임금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음.

 

 

 

 

 

 

<그림 1> 부동산 투기가 노동과 자본의 임금협상에 미치는 영향

 

임금의 상한선(자본가)

 

 

 

임금

협상

공간

 

 

 

 

상한선

 

 

 

투기발생

 

 

 

협상공간축소

 

 

하한선

 

 

 

 

 

 

임금의 하한선(노동자)

 

 

 

2. 토지가치공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평화

 

<자본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지공주의>

사회 개인 사회 개인 사회 개인 사회 개인

 

지대

 

임금

 

이자

지대

 

임금

 

이자

 

지대

임금

이자

 

 

 

3. 토지가치공유: 개발과 환경보존간의 평화

 

① 자연자원과 환경을 알뜰하게 사용하게 함.

 

지대조세제는 토지사용의 대가를 사회공동체가 공유하자는 것이고, 환경세제도는 환경사용의 대가를 공유하자는 것이다. 즉 지대조세제와 환경세제도의 공통적인 철학은, 사람이 만들지 않은 토지(환경)에 대해 그 사용자로부터 토지(환경)의 사용대가를 조세로 사회공동체가 환수한다는 것이다. 환경에 대해서도 지대를 부과하고 미래세대를 위한 고갈비용까지 납부하게 되면 자연환경과 자원은 알뜰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

 

② 지대조세제는 난개발을 억제하고 녹지와 같은 개방지(open space)를 보존함.

 

지대조세제는 난개발을 억제하고 녹지(綠地)와 같은 오픈 스페이스(open space)를 보존한다. 도시 주변이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스프롤(sprawl)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투기용 유휴지 때문에 도심부의 놀리는 땅을 뛰어 넘어 비정상적으로 도시의 외연이 확대되는 개구리 뜀뛰기(frog-leaping) 식의 개발이 이루어지기 때문인데, 지대조세제는 스프롤을 방지할 것이다. 지대조세제가 실시되면, 토지 투기와 토지 저사용(해당 토지의 등급 이하로 사용, 즉 비효율적 사용)이 원천봉쇄되고, 그래서 도심부에서, 투기용으로 놀리는 땅과 저사용되는 땅을, 해당 토지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도록 경제메카니즘이 작동된다. 지대조세제 실시 후 막대한 지대세액을 감당하면서 땅을 놀리거나 저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고, 그래서 토지투기꾼이나 토지저사용 소유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지대조세제 실시로 재산가치는 거의 '0'이 되었고, 생산 의욕과 능력이 없으면, 하루빨리 그런 의욕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넘기는 게 손해를 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대조세제는 도심부의 투기용 유휴토지와 저사용토지를 해당 토지의 등급에 맞게 개발하도록 자극한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도심 외곽의 녹지(綠地)와 같은 오픈 스페이스를 개발하는 압력이 상대적으로 줄어 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픈 스페이스의 보존은 환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난개발 방지와 관련하여, 외국에서는 조지스트 운동과 환경 운동이 함께 협력하고 있다.

 

③ 토지투기 목적의 신도시 개발이 사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