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하고 있나" 5.18 규명 위해 산화한 '처남 김의기' | ||||||||||||||||||||||||||||||||||||||||||||||||||||||||||||||||||||||||||||||||||||||||||||||||||||||||||
얼어붙은 들판에서 다시 의기(義基)로 부활한 사람 | ||||||||||||||||||||||||||||||||||||||||||||||||||||||||||||||||||||||||||||||||||||||||||||||||||||||||||
박철 기자 pakchol@empal.com"> | ||||||||||||||||||||||||||||||||||||||||||||||||||||||||||||||||||||||||||||||||||||||||||||||||||||||||||
이 글은 23년 전 광주의 참혹한 살육 행위에 온몸으로 항거,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 탱크 위에 떨어져 '광주 만행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죽어간 김의기(나의 처남) 23주기를 맞아 쓴 글입니다. - 필자주
내가 처음으로 의기의 문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은 18년 전 '김의기열사 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추모집에 실린 의기의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그의 진솔한 삶-나라를 사랑하는 착한 마음씨, 군사독재와 독점재벌에 대한 투철한 저항정신, 예수님과 사람 사랑하기, 농촌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해박한 이론-의 역력한 삶의 흔적을 살피면서 너무나 부끄러워 아내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한참 울었다. 의기의 삶은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삶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의기는 사랑의 화신'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그의 가슴 속에 무엇이 불붙고 있었길래 나라와 민족을 그토록 사랑하고, 마침내는 민주와 역사의 제단 앞에 자신의 온몸을 남김없이 내던졌는지.
그래서 의기의 대학졸업사진도 셔츠만 입은 채였고, 의기의 추모행사 때마다 이때 찍었던 졸업사진이 영정으로 걸리곤 했다. 의기가 대학을 입학하여 졸업을 앞두기까지 의기집안은 정말 빈한한 살림살이였다. 장모님께서 어느 철공소 부엌살림을 맡아 생계를 유지했으니 집안형세가 오죽했겠는가. 그 당시 장모님께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동사무소를 가셨는데, 열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닳아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단다. 이런 가정 형편에서 의기는 상아탑에 매달리거나 교과서에 안주하기보다는 혁명적 삶의 전환을 시도했고 그의 일기를 보면 언제나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모색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의기는 자신의 삶의 근거를 자신이 태어난 농촌에 두었고, 대학 4년 동안 줄곧 과학적 세계관에 접근하여 자신의 진로에 대한 에너지를 축적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고향인 영주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광주항쟁에서 계엄군들의 처참한 살육행위를 목격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진리에 목마른 선구자처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겨두고 그해 5월 30일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의 탱크 위에 한 잎 꽃잎처럼 주검으로 떨어졌다.
그의 가족들은 의기의 죽음을 개인적 한이나, 가족사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 권채봉 집사는 '천날'을 하루같이 의기가 원했던 참 세상-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그가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中)-의 도래를 빌며 79년의 성상(星霜)을 옹골차게 살아가고 계신다. 장인은 3년 전에 돌아가셨고, 3년 전 의기는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치법에 따라 광주희생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해 5월 광주 5.18묘역으로 이장했다. 해마다 5.18 기념일이 되면 장모님을 모시고 광주를 방문하게 된다. 장모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이 원활하지 않으시다. 그래도 매우 강하신 분이다. 역사관이 분명하시다. 그야말로 '깡'으로 버텨 오신 분이다. 아내는 장모님을 십분의 일만 닮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다. 장모님은 체구는 작지만, 큰 거목(巨木)같으신 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실지 걱정이다. 나의 처남 김의기가 살아 있으면 서강대를 졸업하고 신학을 해서 농촌 목회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지금 살아 있다면, 45살이 되었을 것이다. 나와 좋은 동역자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2. 사랑은 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인가 / 가는 사람 붙잡지 못하고 / 가게 만든 아픔을 견디며 / 얼어붙은 들판이 꿇어 엎드린 사람아 / 알몸 맞잡아 온 지난 세월 / 다 주고 다 받고 / 다 줘버려 떠난다는 당신은 그것으로 족한가 / 사랑이 죽을 만큼 강하다면 / 사랑은 파멸을 넘어서는 것 / 헤어져 가는 발길에 / 어두운 하늘이 내리고 / 단지 징그러운 몸뚱이만이 / 흐느적거리며 춤추는 것 / 사랑을 버리고 영혼을 기만하고 희롱하는 / 형벌 받은 사람아 / 얼어붙은 들판에 꿇어 엎드린 사람아 / 사랑은 조용히 사라져야지 / 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일까 (박철 詩. 사랑의 노래)
5.18 광중항쟁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식구들과 함께 5.18 묘역을 방문했다. 장모님이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올해가 마지막 광주 방문이 될 것 같다. 1980년 5월 30일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서울시민의 총궐기를 요구하며 계엄군 탱크 위에 투신한 김의기의 죽음 후 꼭 23년만에, 강산이 변해도 두 번도 더 변할 세월이 지나갔다. 지난 세월과 함께 어머님도 백발의 노구가 되었다. 아버지도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귀애하던 아들이 분노의 핏발이 되어 역사의 민주 제단에 희생양이 된 까닭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감회 깊은 광주 방문이었다. 장모님의 광주 방문은 이번까지 세 번이었다.
비상계엄 하에 언론이 침묵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고, 심지어 재야 운동세력마저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공포와 광란의 포악한 시절에 김의기는 광주학살의 최후 목격자가 되어 진실을 밝히고자 검붉은 선혈을 흩뿌리며 계엄군이 세워 놓은 탱크 위에 낙하(落下)하였다.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질 때, 우리는 똑똑하게 그 죽음의 내면을 응시하여야 한다. 결코 열사들의 분신이나 투신을 미화하거나 찬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몸을 던질 수밖에 얼었던 조국의 현실, 당시 정권의 구조적 타살 혐의에 그 숨겨진 사실에 대해 눈뜨지 않으면 안된다. 김의기가 죽어가면서 외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토록 강한 신념과 의지를 불태우며 일구고자 했던 아름다운 삶의 이상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의 죽음은 결코 자신의 삶을 저주하거나 포기한 비겁, 나약한 불신앙의 행위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외쳤다. 불의와 살상에 감금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처절한 주검으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80년 5월의 한맺힌 죽음들을 그리고 지금까지 죽어간 수십 명의 열사들의 피맺힌 절규를, 이름 없이 죽어간 노동자·농민들의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살아가야 한다. 김의기가 떠나 간 지 2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이 땅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기만과 허위의 잿빛 조국은 언제 그 기백이 살아날 것인가? 그러나 실망할 수는 없다. 낙담하여 패배주의자로 살아 갈 수만은 없다. 세계 역사 가운데 자유·인류사회를 위해서 수십 명의 젊은이가 분신 자결한 유례가 없으므로.
어사지간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팔십 고령의 어머니는 아들을 무덤에서 오열을 하신다. 서럽게 서럽게 우신다. 어머니의 그 숯검댕이 같은 속을 누가 알겠는가? 아들의 주검으로 인한 한을 삭이며 아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지금껏 살아오셨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이제 가야 할 때가 지냈제. 지내도 한참 지냈제. 명도 질지. 여태 이래 살았으이!" 어머니의 회한과 한탄에 담겨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안다. 어머니가 얼마나 막내 의기를 사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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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5.18 구속부상자회 光州市지부
글쓴이 : 샘이깊은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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