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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타리나(인숙):성공회수녀에서 성공회신부로(한겨레2006년3월24일 기사)

DoDuck 2010. 5. 16. 09:23

 예전에 옮겨놓은 기사인데 제목만 띄워주고 클릭하면 다음뉴스로 연결되어 전문이 보였는데 오래된 기사내용이라서 그랬는지 링크가 깨지고 그냥 다음뉴스첫화면으로 연결되길래, 다시 신문기사를 찾아 아예 통채로 퍼 옮겼다.

말괄량이 수녀님 아니, 우리 신부님

한겨레 | 입력 2006.03.24 15:46

 

[한겨레] 성공회 사제 되는 첫 수녀 오 카타리나

서울 덕수궁 옆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뒤 한옥 대문을 여니 서울 속 '비밀의 정원'이 펼쳐진다. 성공회 성가수녀원이다.
   

 

소음 하나 없이 새들만이 지저귀는 나무들 아래 단아한 한옥 마루 옆으로 경건한 모습의 수녀들이 새색시처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넓게 펼쳐진 잔디 밭에서 강아지와 뛰어노는 수녀가 있다. 옷매무새와 행동거지가 조심스런 다른 수녀들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가 수녀에서 사제(신부)로 변신하게 될 오인숙 카타리나 수녀(66)다. 그는 오는 5월 27일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부제 서품을 받고, 1년 뒤 사제 서품을 받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신학을 전공한 여성 9명이 성공회에서 사제가 된 적이 있지만, 수녀에서 사제로 변신하는 것은 그가 최초다. 전 세계적으로도 수녀가 사제가 되는 경우는 아직 10명 안팎에 불과하다. 로마 가톨릭은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사제가 된다는 소식에 성공회대 총장이기도 한 김성수 주교가 "이제야 된단 말이야"할 정도로 수녀원은 물론 교단 안에서도 사제가 되는 첫번째 수녀가 그일 것이라는 데 이론이 없을 정도로 그는 여느 수녀들과는 '많이' 달랐다. 1984년부터 성공회대 영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교수이자 87년부터 95년까지 무려 8년간 엄격한 이 수녀원의 원장까지 한 경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권위'와는 거리가 먼 '만년 소녀'다. 나뭇잎 구르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는다는 이팔청춘은 그를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수다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함께 수다쟁이가 되어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게 하루를 보내버리고 마는 게 재앙이라면, 근심 걱정일랑 싹 잊어버리고 마는 게 그와 마주앉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5월 부제 서품… 수녀원 바꾼 '만년 소녀'
전쟁고아 그늘도 엄한 권위도 녹이고
사람 보면 하하호호 "좋은데 어떡해"


그늘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을 길 없는 그가 전쟁고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이를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의 할아버지는 고창 군수였고, 아버지는 서울 경동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었다. 그와 두 살 아래 동생 숙자는 부모와 함께 경동고 사택에서 살았는데, 부모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족은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그가 열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났고, 어느 날 인민군에 끌려간 그의 부모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울었다. 그러다 동생이 우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잠시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지만 모두가 피난을 가는 1.4후퇴가 되자 그도 동생의 손을 잡고 피난길에 나섰다. 열 살과 여덟 살 소녀 단 둘이 손을 꼭 잡고 한강다리를 넘자마자 폭격으로 다리가 끊겼다. 피난민들의 등만 따라 내려가다 서울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들은 어른들이 평택쯤에서 발길을 다시 서울 쪽으로 돌리자 그도 다시 방향을 틀었다.

수원까지 와 갈 곳 없어 파출소를 찾아갔던 그를 경찰에 데려다 준 곳이 바로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천성이 긍정적인 그에게 보육원은 천국이었다. 그가 수녀가 된 것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본 보육원 보모 장마리아처럼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보육원에 돌아오면 불을 때고 채소를 가꾸느라 책을 볼 시간이 없었지만 그는 학교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곤 했다.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나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슬퍼하면 돌아가신 엄마가 더 슬퍼하지, 네가 행복해야 하늘에 계신 엄마도 행복한 거"라며 위로하곤 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주제 파악 못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니깐.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수도원에서 유난히 크다. 수도원의 이단자가 어떻게 40년 넘은 시간을 버텼을까. 그가 수녀원에 입회한 것은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해인 1964년 봄이었다. 눈부시게 밝은 그의 미소에 목매다는 뭇 남성들을 다 뿌리친 뒤였다. 수녀원의 규칙은 엄하기 그지없었다. 큰소리로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되다. 길을 걸을 때도 앞에 조용히 손을 모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야 하고, 설사 아는 남자를 만나도 수도원에 데려오지 않으면 말도 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대학 졸업 여행 때 서울에서 설악산까지 가는 동안 한 순간도 레퍼토리가 끊이지 않고 꾀꼬리처럼 노래할 만큼 끼가 다분했던 그에게 수녀원의 규칙은 애초 무리였던 것일까.

"좋은데 어떡해?"

사람들만 보면 하하 호호 해야 하는 그가 어떻게 아는 사람을 보고 눈을 아래로 깐 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60년대, 70년대에 선교사들을 도와 한강 밑과 남산 위로 병자와 노숙자들을 찾아다니며 돌보는 것 말고도 늘 관심을 가졌던 것은 수녀원의 규칙 개정이었다.

그가 턱받이처럼 얼굴 주위에 쓰는 윔플을 없애자고 했을 때였다. 어른 수녀들과 주교들은 영화 < 수녀이야기 > 에 머리에 베일과 윔플을 쓰고 나와 대히트를 쳤던 오드리헵번을 빗대며 "윔플을 쓰면 얼마나 예쁜데 그러니?"라고 달랬다. 그러자 카타리나 수녀는 "제가 예뻐지려고 수녀 됐나요?"라고 대꾸했다. 맹랑한 그를 내쫓기는 커녕 '귀엽게' 보아준 어른 수녀들과 동료들 덕에 수녀원은 이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작년엔 검거나 회색 수녀 복이 아닌 푸른 수녀 복까지 도입됐다. 이 세상에 '여성 사제'가 존재하기도 전인 80년대부터 1대 원장인 다비다 수녀 등이 "카타리나 수녀는 사제가 되어야 해"라고 한 것은 애초부터 '수녀'를 뛰어넘는 그의 성격을 간파해서였다.

여성이, 특히 수녀가 사제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조차 그가 사제가 되는 것엔 환호한다. 부모의 죽음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빚어진 비극으로 자각한 순간 남북 양쪽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할 만큼 어떤 적의조차 붙지 못하는 그 밝음 때문일까.

"우리 집 개들이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지요?"라고 묻던 그가 자문자답을 한다.

"수녀님들이 묶어놓으면 내가 늘 모르게 풀어주고, 몰래 고깃덩어리를 갖다 주거든. 하하하"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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