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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하고 있나 .5.18규명위해 산화한 처남김의기

DoDuck 2010. 5. 20. 15:25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하고 있나"
5.18 규명 위해 산화한 '처남 김의기'
얼어붙은 들판에서 다시 의기(義基)로 부활한 사람
박철 기자 pakchol@empal.com">  
이 글은 23년 전 광주의 참혹한 살육 행위에 온몸으로 항거,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 탱크 위에 떨어져 '광주 만행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죽어간 김의기(나의 처남) 23주기를 맞아 쓴 글입니다. - 필자주

▲ 1983년 박불똥. 박불똥은 이 판화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
ⓒ1983 느릿느릿 박철
1.네가 너인 줄도 모르게 / 공포에 질린 그때 / 계엄령의 공수부대만이 있는 그때 / 학살과 고문과 약탈로 얼어붙은 그때 / 온통 이 강산 패배주의에 빠져버린 그때 / 그 공포의 아가리에서 / 한 이름 없는 학도 / 종로 5가 6층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 부르짖었다 /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싸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 그 절망의 아가리에서 /하나의 섬광으로 빛나며 / 모든 무덤과 노예의 그때 /오직 그대가 승리를 일컬었다 / 김의기! / 그대가 유신잔당을 이기고 승리를 일컬었다 / 죽어 피투성이 몸뚱어리로 (고은 詩. 김의기)

김의기 열사 연보

▲ 서강대 의기촌 기념비

1959년 4월21일 경북 영주군 부석면 용암리 4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970년 2월 영주 중부국민학교 졸업
1976년 2월 배명고등학교 졸업
1976년 3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 입학. KUSA가입
1977년 서강대 KUSA 하계 농촌활동대장 역임
감청 농촌 선교위원장
감정 농촌 선교위원장
한국기독청년협의의회(EYC) 농촌 선교 분과위원장
1980년 5월30일 오후 5시경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기독교 회관 6층 (607호)에서 투신 순국
1980년 6월 2일 경기도 금촌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힘
1990년 서강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1991년 5월18일 광주민중항쟁 유가족회로부터 5월 시민상 수상
2000년 정부로부터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음.
2000년 5월 광주 5.18묘역(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장
한번 '의기(宜基)'의 얼굴을 보았거나 마주 앉아 보지 못한 사이에서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자형-처남의 관계가 되었다. 의기가 죽고 나서 몇 년 후 그의 누나(宙淑)와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지금은 두 아들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래서 대충 처가집의 분위기를 살필 기회가 생겼고, 한 인간-의기의 죽음과 삶의 흔적, 또 그로 인한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고 담담하게 주목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의기의 문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은 18년 전 '김의기열사 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추모집에 실린 의기의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그의 진솔한 삶-나라를 사랑하는 착한 마음씨, 군사독재와 독점재벌에 대한 투철한 저항정신, 예수님과 사람 사랑하기, 농촌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해박한 이론-의 역력한 삶의 흔적을 살피면서 너무나 부끄러워 아내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한참 울었다. 의기의 삶은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삶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의기는 사랑의 화신'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그의 가슴 속에 무엇이 불붙고 있었길래 나라와 민족을 그토록 사랑하고, 마침내는 민주와 역사의 제단 앞에 자신의 온몸을 남김없이 내던졌는지.

▲ 5.18묘역 방문. 어머니 권채봉 집사. 어머니의 마음이 망연하기만 하다.
ⓒ2001 느릿느릿 박철
그가 의기충천하여 자신의 올곧은 삶에 대해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모세의 가시덤불 이야기'(출3:1-12)를 연상하듯이 그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불덩이가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언제나 작업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 양복 한 벌을 사주었는데, "좋은 옷 입으면 편해지고 싶고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어 도둑 같은 마음이 들어서"하고 사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기의 대학졸업사진도 셔츠만 입은 채였고, 의기의 추모행사 때마다 이때 찍었던 졸업사진이 영정으로 걸리곤 했다. 의기가 대학을 입학하여 졸업을 앞두기까지 의기집안은 정말 빈한한 살림살이였다. 장모님께서 어느 철공소 부엌살림을 맡아 생계를 유지했으니 집안형세가 오죽했겠는가. 그 당시 장모님께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동사무소를 가셨는데, 열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닳아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단다.

이런 가정 형편에서 의기는 상아탑에 매달리거나 교과서에 안주하기보다는 혁명적 삶의 전환을 시도했고 그의 일기를 보면 언제나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모색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의기는 자신의 삶의 근거를 자신이 태어난 농촌에 두었고, 대학 4년 동안 줄곧 과학적 세계관에 접근하여 자신의 진로에 대한 에너지를 축적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고향인 영주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광주항쟁에서 계엄군들의 처참한 살육행위를 목격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진리에 목마른 선구자처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겨두고 그해 5월 30일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의 탱크 위에 한 잎 꽃잎처럼 주검으로 떨어졌다.

▲ 서강대 김의기 열사 13주기 추모제. 문익환목사와 가족과 함께.
ⓒ1993 느릿느릿 박철
자식의 죽음으로 인한 비통한 심정이랴 부모님만큼 애절하고 한이 맺힐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는가? 그러나 의기의 죽음이 작게는 그의 가족 가운데 다시 '의기(義基)'로 부활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의기의 죽음을 개인적 한이나, 가족사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 권채봉 집사는 '천날'을 하루같이 의기가 원했던 참 세상-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그가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中)-의 도래를 빌며 79년의 성상(星霜)을 옹골차게 살아가고 계신다.

장인은 3년 전에 돌아가셨고, 3년 전 의기는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치법에 따라 광주희생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해 5월 광주 5.18묘역으로 이장했다. 해마다 5.18 기념일이 되면 장모님을 모시고 광주를 방문하게 된다.

장모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이 원활하지 않으시다. 그래도 매우 강하신 분이다. 역사관이 분명하시다. 그야말로 '깡'으로 버텨 오신 분이다. 아내는 장모님을 십분의 일만 닮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다. 장모님은 체구는 작지만, 큰 거목(巨木)같으신 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실지 걱정이다.

나의 처남 김의기가 살아 있으면 서강대를 졸업하고 신학을 해서 농촌 목회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지금 살아 있다면, 45살이 되었을 것이다. 나와 좋은 동역자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
고 김의기 열사의 유언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 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의 사이비 경제 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넣는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 잔당 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 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똑똑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모든 싸움은 역사의 정 방향에 서있다.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김 의 기

2.
사랑은 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인가 / 가는 사람 붙잡지 못하고 / 가게 만든 아픔을 견디며 / 얼어붙은 들판이 꿇어 엎드린 사람아 / 알몸 맞잡아 온 지난 세월 / 다 주고 다 받고 / 다 줘버려 떠난다는 당신은 그것으로 족한가 / 사랑이 죽을 만큼 강하다면 / 사랑은 파멸을 넘어서는 것 / 헤어져 가는 발길에 / 어두운 하늘이 내리고 / 단지 징그러운 몸뚱이만이 / 흐느적거리며 춤추는 것 / 사랑을 버리고 영혼을 기만하고 희롱하는 / 형벌 받은 사람아 / 얼어붙은 들판에 꿇어 엎드린 사람아 / 사랑은 조용히 사라져야지 / 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일까
(박철 詩. 사랑의 노래)


▲ 5.18광주묘역. 5.18시민상 수상식. 부모님(아버지 고 김억 집사)이 대신 수상하다.
ⓒ1992 느릿느릿 박철
몇 차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방문할 때마다 다 기억할 수 없는 원혼들의 호곡 소리가 겹쳐 가슴을 저미게 한다. 치유할 수 없는 역사의 상흔에 손을 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5.18 광중항쟁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식구들과 함께 5.18 묘역을 방문했다. 장모님이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올해가 마지막 광주 방문이 될 것 같다.

1980년 5월 30일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서울시민의 총궐기를 요구하며 계엄군 탱크 위에 투신한 김의기의 죽음 후 꼭 23년만에, 강산이 변해도 두 번도 더 변할 세월이 지나갔다.

지난 세월과 함께 어머님도 백발의 노구가 되었다. 아버지도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귀애하던 아들이 분노의 핏발이 되어 역사의 민주 제단에 희생양이 된 까닭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감회 깊은 광주 방문이었다. 장모님의 광주 방문은 이번까지 세 번이었다.

▲ 5.18 망월동 묘역. 어머니와 딸 손주와 함께.
ⓒ2001 느릿느릿 박철
김의기가 자신의 꽃다운 청춘을 마감하고 그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의 손을 놓고 홀연히 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계기는 그해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참혹한 대량학살을 목격하게 됐기 때문이다.

비상계엄 하에 언론이 침묵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고, 심지어 재야 운동세력마저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공포와 광란의 포악한 시절에 김의기는 광주학살의 최후 목격자가 되어 진실을 밝히고자 검붉은 선혈을 흩뿌리며 계엄군이 세워 놓은 탱크 위에 낙하(落下)하였다.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어질 때, 우리는 똑똑하게 그 죽음의 내면을 응시하여야 한다. 결코 열사들의 분신이나 투신을 미화하거나 찬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몸을 던질 수밖에 얼었던 조국의 현실, 당시 정권의 구조적 타살 혐의에 그 숨겨진 사실에 대해 눈뜨지 않으면 안된다.

김의기가 죽어가면서 외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토록 강한 신념과 의지를 불태우며 일구고자 했던 아름다운 삶의 이상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의 죽음은 결코 자신의 삶을 저주하거나 포기한 비겁, 나약한 불신앙의 행위로 단정 지을 수 없다.

▲ 금촌 김의기 묘소에서. 광주로 이장하기 위해 가족이 모임.
ⓒ2001 느릿느릿 박철
그는 생명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의 모독을 너무나 참을 수 없어서 분노와 저항의 몸짓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것이다. 그러한 불의한 세상에서는 목숨 연명 그 자체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며 죄악일 수도 있다는 것을 광주의 5월은 가르쳐주고 있다. 그가 참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역시 불의한 세력 앞에 모르는 척 했으면 그만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외쳤다. 불의와 살상에 감금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처절한 주검으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80년 5월의 한맺힌 죽음들을 그리고 지금까지 죽어간 수십 명의 열사들의 피맺힌 절규를, 이름 없이 죽어간 노동자·농민들의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살아가야 한다.

김의기가 떠나 간 지 2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이 땅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기만과 허위의 잿빛 조국은 언제 그 기백이 살아날 것인가? 그러나 실망할 수는 없다. 낙담하여 패배주의자로 살아 갈 수만은 없다. 세계 역사 가운데 자유·인류사회를 위해서 수십 명의 젊은이가 분신 자결한 유례가 없으므로.

'내일이 오면' 노래듣기 - 박철 시, 신화철 곡

어사지간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팔십 고령의 어머니는 아들을 무덤에서 오열을 하신다. 서럽게 서럽게 우신다. 어머니의 그 숯검댕이 같은 속을 누가 알겠는가? 아들의 주검으로 인한 한을 삭이며 아들이 바라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지금껏 살아오셨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이제 가야 할 때가 지냈제. 지내도 한참 지냈제. 명도 질지. 여태 이래 살았으이!"

어머니의 회한과 한탄에 담겨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안다. 어머니가 얼마나 막내 의기를 사랑했는지.

▲ 5.18 동생 묘역에서. 누나 김주숙이 오열하고 있다. 아내는 5월이 되면 많이 운다.
ⓒ2003 느릿느릿 박철

어머니(권채봉 집사)의 오월

무슨 일이 생길라치면 의기는 어머니(권채봉, 79세)의 꿈속에 나타나곤 했다. 87년 6.29선언이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의기가 90년 2월 명예졸업장을 받을 때도 그랬다. 얼마간 보이지 않다가 어머니는 며칠 전 꿈속에서 의기를 보았다. 어떻게 지내냐고 묻자 의기는 잘 먹고 지낸다며 어머님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들이 꿈으로 만나고 꿈은 다시 어머니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다가서는데 이번 꿈은 어떤 현실로 이어졌을까?

어머니가 지금 살고 계신 곳은 잠실 주공아파트. 그리 깨끗하지도 넓지도 않은 곳에서 살고 계신다. 아버지는 3년 전 돌아가셨다.

“여유는 없고, 부자들 아침 한 끼 해장거리로 한달 사는 거지 뭐. 알뜰하게. 그래도 남에게 돈 꾸지 않고 살아갈 정도는 돼.”

연세에 비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어머니. 이 대목에선 손빗으로 흰머리를 넘기신다. 여유가 없다고 하신 것은 실질적인 수입원이 따로 없고 고향인 경북 영주에 있는 땅에서 곡식이 올라오고 그 여분을 팔아 약간의 생활비로 보태시며, 의기의 형님 세 분, 누님 두 분이 보내주시는 용돈으로 생활을 꾸려 가시기 때문이다.

의기가 살아 있다면 지금 마흔다섯. 그러나 어머니의 기억에는 스물 두해 청년 의기의 삶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4남2녀의 막내로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형. 누나 따라 학교에 다니면서 이미 1.2학년 과정을 이수, 3학년으로 입학해 정규교육을 시작했던 일.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낙방, 결국 뺑뺑이 돌려 진학한 일, 대학 2학년 때부터 매일 같이 형사들이 따라붙고 사건만 터지면 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받고 구타당해도 어머니와 약속한대로 유치장 신세는 한번도 지지 않은 일….

1980년 5월 30일 이후 의기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온통 꿈이지만 아직도 의기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 ‘생활에 철저하고 자기 정리 잘 하는 똑똑한 자식’ 으로 남아 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의기를 통해 인연이 맺어진 다른 유가족들과 만나면서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게 됐다. 해마다 오월이면 추모제니, 무슨무슨 행사니 해서 집에 있지 않은 날이 많아진 것도 그날 이후다. 게다가 오월의 막바지인 30일은 의기제가 있으니 오월만 되면 어머님 마음이 편하실 리 없다. 또 5월, 그날이 오고 있다. / 박철

출처 : 5.18 구속부상자회 光州市지부
글쓴이 : 샘이깊은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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