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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Duck 2006. 6. 20. 23:21
어묵 아주머니의 한숨과 월드컵
축제는 즐기자,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이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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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점상 아주머니의 피부에 와닿는 월드컵은 '매상의 절반을 앗아가는' 행사가 아닐까.
ⓒ 이한얼
한국과 토고의 경기가 열리던 13일, 저는 이제 여섯 살 난 우리 집 장남 건이와 목욕탕에 갔습니다. 저녁 8시쯤이었는데 목욕탕에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넓은 목욕탕에서 건이랑 물장난을 신나게 하고 밤 10시가 거의 다되어 나왔어요. 그리고 건이가 좋아하는 '어묵떡'(어묵국물에 가래떡을 삶은 건데 건이는 이 '어묵떡'을 '오뎅떡'이라고 부릅니다)을 먹으면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매상이 평소의 절반도 안 된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바로 근처의 대형 스크린이 있는 술집과 레스토랑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터져나갈 지경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일찍 들어가려다가 건이가 떡을 좋아하는 걸 알기에 목욕탕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사실 건이는 목욕 와서 '어묵떡'을 못 먹으면 집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주머니가 일찍 가셨던 날은 심하게 운 적도 있습니다.

아주머니는 축구를 보러가라며 어묵을 나무젓가락에 끼워 주십니다. 축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얼른 건이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달렸습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매상이 절반도 안 된다는 아주머니의 푸념이 맴돌았지만 저도 토고와의 첫 경기가 시작될 무렵엔 흥분되어 아주머니의 어두웠던 표정은 씻은 듯이 잊어버렸습니다. 저 역시 달아오른 '월드컵 냄비'가 되어 열심히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월드컵 한다고 돈이 나와, 떡이 나와? 왜 이렇게 야단들이야"

일요일이던 18일 아침 다시 건이와 목욕탕에 갔습니다. 건이는 목욕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목욕을 좋아하는 건지 '어묵떡'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 씻고 나와서 '어묵떡'을 건이에게 사주려고 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이제 금방 넣었으니 좀 기다리라'고 하시네요. 그날은 조금 늦게 나오셨다고 하시면서. 기다리는 동안 전 무심코 다음날(19일) 새벽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가 예정돼 있으니 또 난리가 나겠다는 말을 불쑥 내뱉았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약간 화가 나신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러더니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러다가 나라 망하겠어. 월드컵 한다고 돈이 나와, 떡이 나와? 왜 이렇게 야단들이야. 장사하기도 힘들고."

문득 토고전이 있던 날 아주머니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아주머니의 푸념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아주머니에게 월드컵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매상을 절반이나 떨어뜨리는 방해꾼이기도 하구요.

그뿐 아니라 근처 술집에서 야외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업했는데 경기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던 취객이 아주머니의 포장마차를 조금 부서뜨렸다고 하네요. 많이 부서진 건 아니지만 아주머니의 기분이 상할 만하지요.

아주머니가 하신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깟 공찬다고 돈이 나와, 떡이 나와? 왜 이리 야단들이야"라던 아주머니 말씀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월드컵 경제효과=수십조?...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2002년도에 한국 팀이 4강에 들자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경제효과가 몇 조 원 혹은 몇 십 조 원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 엄청난 액수는 무엇을 근거로 나온 것일까요? 몇 십 조원의 경제 효과가 우리에게 돌아왔나요? 살림살이가 나아졌던가요? 오히려 그런 어설픈(혹은 악의적) 계산이 대중을 마취시키면서,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의 경제 효과가 몇 십조(혹은 몇 백조)다'라는 환상이 그렇게 쉽게 주입된 것은 아닐까요?

아주머니는 아셨던 겁니다. 이 공놀이가 사실은 우리네 삶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으로, 경험으로 아시는 겁니다. 언제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법이지요.

이 꿈 같은 '붉은 한 달'이 지나면 삶은 다시 칙칙한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무 높이 날았던 꿈이, 떨어질 때에는 더 아픈 법입니다.

물론 축제를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요. 열등감 같은 지저분한 감정을 간직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보세요. 우리가 월드컵 축구에서 4강에 들고 혹 우승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열등감이, 혹은 집단적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신체적인 손상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지속되는 것)가 해소되거나 건강한 감정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요?

일본팀을 멸시하고 중국을 무시하는 정서가 넘쳐나는 월드컵 관련 게시판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내셔널리즘에 기반을 둔 격정적 흥분은 다른 민족, 다른 국가에 대한 우월감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열등감은 단지 우월감으로 전화되었던 것 뿐 아닐까요?

▲ 지난 19일 한국-프랑스전 때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응원인파.
ⓒ 오마이뉴스 이종호

월드컵 축제,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잔칫집에 꼭 찬물 끼얹어야 속이 시원한가?"

아닙니다. 저도 월드컵 보면서 많이 즐거워했어요. '정말 공 하나는 기막히게 찬다'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답니다. 축제를 즐기고 잔치에 흥겨워했습니다.

다만 어떤 분들은 아예 이 잔치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이 축제 기간이 더 아프고 더 소외받는 시기 아닐까요?

어떤 분은 또 말합니다. 이 축제가 디오니소스적인 광란 아니냐고, 대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일탈의 시기 아니냐고.

글쎄요. 그럴까요? 중세의 카니발이, 사투루날리아(고대 로마의 농신제)가, 동지절이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요? 모양이 비슷하다고 본질이 같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본이 기획하고 내셔널리즘의 격정이 불러일으킨 흥분과 고대의 봄 축제의 집단적 흥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재생과 소멸의 리듬을 느끼면서 인간 역시 자연의 순환에 속하는 고리라는 깨달음을 느끼게 하는 고대의 축제는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월드컵 축제가 과연 그런 깨달음을 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사건에도 여러 측면이 있으며 각자의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면서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축제를 즐기되, 초대받지 못한 이들을 잊지 않는 지혜를

'월드컵 냄비'에 불과한 제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설득력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생물이고 한 가지 경험을 통해서도 많은 코드를 찾아내고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한국 과학영재학교 자원봉사자팀을 교육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포레스트 검프>는 정치적으로 정말 올바르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는 감동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너희들이 이 두 가지를 다 느꼈으면 좋겠다. 이성적으로는 <포레스트 검프>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분석하면서 감성적으로는 그 보편적인 정서를 두드리는 이야기에 감동받을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나요? 그래도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전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축제를 즐기되, 이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 이 축제가 부풀리는 환상에 너무 부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러지 않으면 떨어질 때는 더 아플 테니까. 그리고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어묵아주머니에게는 참 힘든 유월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건이를 보면 활짝 웃어 주시겠지만.

 

 

(엠파스뉴스에서 읽고 오마이뉴스에 들어가 원본을 옮겨왔습니다./강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