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적 신존재 증명에 대한 논박
신 상 형*안동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요 약 문 이 논문은 칸트이래 계속되어 온 신존재 증명의 도덕론적 논증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대표적인 논변들을 특징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비교를 통한 이 논변의 흐름의 차이를 현시하는 모색을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적 입장에 서서 그것을 적극 옹호하는 근대 철학자와 이를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현대철학자들을 대비시켰다. 초창기에 도덕론적 논증은 정치한 논리의 의미를 따지는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실천적인 근본원리 내지 실질적인 요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서는 대단히 첨예한 논의들이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 신의 존재를 확증 혹은 부정하려는 신실한 시도들로 제시되었다. 칸트나 라쉬돌과 같은 철학자는 신이 이성적으로 필연 내지 요청으로서 존재한다는 논증을 시도한다. 전자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는 지고선의 추구가 있고, 또 이것은 반드시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도덕이 등장한다. 후자는 그러나 칸트의 추구가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적인 설명을 하는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절대정신 안에 도덕이 자리를 잡는다고 설명을 하며, 성숙한 정신은 도덕을 하나의 객관적인 의무로 이해한다고 한다. 이런 논의들은 솔레이, 트루블러드 및 루이스에 의해 유신론적 논증으로 더 발전된다. 한편, 베일과 까뮈는 도덕론적 논증 신존재 증명 자체가 불가능한 논변임을 악의 존재를 들이댐으로써 증명하려고 한다. 전자는 전능한 신과 악의 존재의 갈등은 신의 전능과 악의 공존, 신의 인자와 그의 무력, 혹은 악의와 무력의 공존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신의 부재를 도출한다고 믿는다. 대신에, 까뮈는 페스트의 논의를 전개하면서, 의사와 페스트 및 신부의 3가지를 병렬시켜 신의 사랑과 대조하는 장치를 통해 도덕적 신의 존재를 거부한다. 이런 논증들은 힉과 푸케티 및 맥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이어지면서 한층 강화되는 모습을 띤다. 그러나 논의되는 모든 무신론적 논변의 내용과 신의 존재는 이른바 필연적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채 도덕론적 논증의 전형들을 부분적으로 비판할 뿐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데는 실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를 통해 도덕론적 논증은 아직도 논의될 가치를 가진 ‘실질적’ 논변이라고 여겨진다.
※ 주요어 : 도덕론적 논증, 신존재, 필연성, 요청, 최고선.
들어가면서
도덕적 신존재 증명은 윤리적 경험과 특히 동료 인간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책무감이 있는데, 이 책무의 원천이자 터전이 바로 하나님의 실재를 요청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도덕적 신존재 증명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체험을 깨닫기 위해 실천적 근본원리로서의 신을 가정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독자적인 자기 존재의 타당성을 투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도덕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면서 양심을 가지고 사는 한에서 인간이 비로소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칸트에게는 영롱한 빛으로 가장 분명하게 존재하는 별이 바로 도덕과 하늘의 샛별이었다. 나머지는 다 그것에 의해 존재론적 정당성을 판정 받는, 이를테면 별들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질서로서의 도덕별이 존재하려면 ― 그렇지 않으면 세계가 무질서해질 터이므로 ―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견해를 이어받은 여러 철학자들은 도덕의 개념을 다각도로 이해하면서 이 논증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발전시켜왔다. 이 논문에서는 몇몇 대표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려고 한다. 기술의 각도는 유신론적 입장에서 각각의 논의들이 어느 정도로 우호적인가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그들 진술이 얼마나 신학적 관점에 다가서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유신론적 인격성에 친화적인가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노골적으로 직시하는 진술의 형태를 띠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술 방식은 각 철학자의 핵심적 논증의 요점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쟁점의 차이점을 간결하게 노출하는데 중점을 두며, 각각의 논의들의 전모를 드러내는 모습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칸트의 증명부터 생각해 보자.
Ⅰ. 도덕적 필연성: 칸트 I. Kant
우선 언뜻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철두철미한 사색과 엄격한 생활로 소문이 나 있던 칸트가 어찌하여 신존재 증명을 하는 데는 ‘도덕’이라는 덜 명료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칸트는 엄정한 논리와 명확한 검증의 방법을 이상적인 철학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는데도 왜 굳이 도덕을 통해서 당시 학문의 바탕인 신을 증명하려고 했는가? 사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엄정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이 비판철학은 세 번의 전단계를 걸쳐 완성되는데, 라이프니쯔-볼프 철학기, 경험론 및 루소 철학기, 비판철학 준비기 등으로 구성된다. 첫째, 칸트는 자연철학에 깊이 몰두하여 뉴우튼의 기계적 역학에 동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물질과 생명을 문제 삼으면서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을 통해 형이상학적 실재를 고찰해서 㰡형이상학적 인식의 제일 원리㰡 Principi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에 그 내용을 담았다. 이 책에서 칸트는 모든 가능성들의 바탕으로서 신을 가정하며, 이 신을 토대로 모든 실체가 존재하는데, 이 실체가 바로 라이프니쯔가 주장한 단자[모나드]이고, 또 시공간이 존재하여 단자들 사이를 이상적으로 질서 지워 준다는 것이다. 둘째로 칸트는 이 자신의 형이상학적 설명을 의심했다. 이것을 통해 과연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1764년에 쓴 한 논문에서 그는 형이상학에서도 방법론상 뉴우튼의 자연학적 방법처럼 확실한 경험에서 출발, 일반적 규정을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며 형이상학 구상에 회의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문제는 경험이 과연 자연학적 경험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㰡심령 관측자의 꿈㰡Traeume eines Geistessehers에서 심령계의 지식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인식의 객관성을 부인하였다. 대신, 그는 형이상학적 관심을 실천적 신앙으로서만 그 의의를 부여한다. 셋째로, 1760년대 말에 이르면 다시 이성을 기초로 한 형이상학적 수립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1770년에 쓴 그의 교수 취임 논문 㰡감성계와 예지계의 형식과 원리에 대하여㰡 De mundi sensibilis atque intelligibilis forma et principii에서 칸트는 자연과학적 세계는 우리와 상대적 현상계이며, 예지계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物自體)>의 세계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제는 시간, 공간을 객관적 질서로 본 첫 단계와는 달리, 우리가 사물을 보는 순간 알게 되는 바탕 ― 직관 형식 ― 이라고 보았다. 뿐 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인식이란 오성이라는 순수한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감각적 요소는 전혀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관념론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데 그가 㰡순수이성비판㰡에서 보여주듯이, <물자체>의 세계는 감각적 경험으로는 알 수 없고 비감각적 직관으로만 파악되는 세계인데, 이런 직관이란 우리에게는 없으므로 그 물자체의 세계란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칸트는 물자체에 대한 인식조건을 실천적 신앙에 귀착시키게 되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적 요청을 기술하자면 이러하다. 인간은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 약간의 개념적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다. 그런데 행복은 모든 일이 자기가 뜻하는대로 되는 합리적 존재의 조건이다. 이것은 따라서 물리적 자연과 자기의 전체적 목적의 조화에 달려 있고, 본질적인 자기 의지의 결정 원리와의 조화에도 달려 있다.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육신을 버틸 물질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이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물질이 충족되어진 사람이라도 자기가 목표로 하는 인생의 방향이나 삶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인생을 행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의무인 도덕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저 유명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정언명법이 가리키는 것 같이, 칸트는 인간을 도덕의 필연적 주체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사람이 도덕적이지 못할 때 그는 한 주체성을 잃게 되고,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데 실패하게 된다. 부도덕한 도덕 파탄자의 삶은 한 개인의 실패를 넘어 한 사회나 국가의 패망을 가지고 오기도 하는 것은 칸트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칸트의 㰡실천이성비판㰡에 따르면 그러나 인간의 욕구인 행복과 인간의 의무인 도덕이 통일을 이룰 때 소위 최고선 summum bonum을 이루게 된다. 이제 자유 법칙인 도덕법은 자연 및 우리 욕구 능력과 자연의 조화와 아주 독립적인 원리들을 결정함으로써 명령한다. 그러나 세계 내에서 활동하는 합리적 존재는 세계와 자연 자체의 원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세상에, 부분으로서 세계에 의존하는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뜻에 의해서, 이 자연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또 행복에 관한 한 실천 원리들과 무관한 도덕법 상의 토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이성의 실천적 문제, 즉 필연적인 최고선의 추적에서 그런 연결은 필연적인 것으로 요청된다. 즉 우리는 최고선, 즉 틀림없이 가능한 최고선을 고양시키도록 애써야 한다. 따라서 모든 자연 즉 자연 자체와는 다르고 예컨대 행복과 도덕성의 정확한 조화의 원리를 포함하는 원인의 존재가 또한 요청된다. 이 최고 원인은 자연과의 조화의 원리, 합리적 이성의 법칙 뿐 만 아니라, 합리적 존재들이 그것을 의지의 최고 원리로 만드는 한 이 법칙의 개념과의 조화, 따라서 도덕과의 형식 뿐 만 아니라 그 동기가 되는 도덕성과의 조화의 원리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도덕적 특성에 대응하는 인과성을 가진 최고 존재를 가정할 때라야 어떻든 가능하다. 법칙들의 개념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의 지성의 존재이고, 이런 법칙 개념에 따르는 그런 인과성은 그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의 조건으로서 전제되어야 하는 자연의 최고 원인은 지성과 의지에 의한 자연의 원인이며, 따라서 그것의 저자인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도출된 최고선(최선의 세계)의 가능성의 요청은 시원적 최고선의 실재, 즉 하나님의 존재의 요청이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 우리가 최고선을 촉진시키는 것은 하나의 의무로 생각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최고선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수용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필요조건으로서 의무와 연결된 하나의 필연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이것의 전제는 의무와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다시 말하면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최고선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할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규범이나 당위가 있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것을 할 자유가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또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는 당위나 의무는 전혀 부과될 까닭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무와 욕구의 통일인 최고선은 지고의 선으로서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미 밝혔듯이, 인간의 인식 능력이 경험 세계에 해당하는 현상계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최고선의 영역인 예지계의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물자체의 세계를 포함, 모든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므로 이러한 통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힘이다. 또 이러한 통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영혼 불멸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실천에 의한 이성적 의지 결정에 있어서 이성은 감성의 제약을 받지 않고 무조건적 명령을 내리고 이성의 의지로서 발동한다. 여기에는 자연의 인과성을 넘어선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실천적 경지에 이르러 우리는 도덕적 노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지상의 과제를 넘어서는 과제를 느끼면서 영혼의 불멸 또한 느끼기 때문이다. 또 도덕적으로 선한 의지가 이 우주의 무한한 힘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궁극적으로 덕행과 행복이 합치된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품게 되며 스스로 최선, 전능의 주재자인 신의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의 의도와는 달리 정당한 하나의 논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성적 필연성을 띠지 않고, 단지 도덕적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요청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칸트의 의도와 달리 만일 그것이 합리적으로 증명된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 최고선이 성취된다는 것은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최고선에 대한 정의부터가 모호하고 또 그 방향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도덕법칙의 당위성은 그 자체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 특히 개신교 신학자들은 인간이 신 혹은 율법의 요청들을 다 수용하고 실천할 수 없으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칸트의 주장과는 반대로 의무와 욕구가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쾌락주의자나 공리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의 의무는 바람직하거나 유쾌한 것을 행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의 논증은 오직 사람에게 신과 영혼 불멸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증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관적 존재로서의 도덕률은 개관적인 것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Ⅱ. 객관적 도덕률: 라쉬돌 H. Rashdall
라쉬돌은 도덕률의 객관성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성이 있으며, 그것은 도덕적 이상으로서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절대이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상(理想)들은 가슴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 즉 사상들은 사상가들의 마음에만 존재하며, 그 어느 다른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절대이념들은 (상대적인) 개인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 안에만 있다. 따라서 절대적 도덕이상이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서 하나의 절대정신을 요청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절대적 개념으로서의 도덕 이념의 객관성을 옹호하면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첫째, 도덕은 보통 객관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성숙된 정신은 도덕을 객관적 의무로 여긴다. 셋째, 도덕적 객관성은 이성적으로 필연적 요청이다. 넷째, 실천상 객관적 도덕 이상들을 요청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기준에 따라 만일 도덕률이 객관적이면서 개인의 마음에서 독립된 것이라면, 유한한 인간 정신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절대정신 속에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도덕률의 객관적 설명을 위해 절대정신을 요청하는 것은 필연적인 셈이다. 트루블러드 Trueblood는 라쉬돌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 전개한다. 첫째, 객관적인 도덕률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우선 도덕률의 의미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한 집단이나 사회는 혼란을 맞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진지한 어떤 윤리적 논쟁도 없고, 상대주의에 빠져 각각의 경우에 각 행위는 정당화되는 혼란을 빚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윤리적 판단도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 해석될 것이다. 동시에 각 유형에 대한 둘 이상의 입장은 서로 모순되기 쉬울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상 사회 혼란기에는 이런 객관적 도덕률의 이해에 대한 혼란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둘째, 한 도덕률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개인과 전 인류의 차원을 넘어선다. 첫째, 개인들은 종종 자신들이 도덕률과 충돌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연인으로서 한 개인은 때때로 도덕률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둘째, 전 인류는 집단적으로 도덕률을 결여하고 있으나, 또 도덕률을 갖고 인류의 발전을 점검한다. 예컨대 <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각 민족은 고유문화를 갖고 있다.’ 와 ‘그 나라는 문화국가이다.’라는 표현에서는 각각 다른 의미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도덕률은 하나의 도덕적 입법자에게서 유래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법칙의 출처가 마음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어디에서도 법칙의 존재가 가능한 영역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격 속에 불성실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달리 말해서, 불성실이 없는 마음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평가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마음과 마음이 진리와 만남이 아니면 무의미하다 그래야 비로소 인격이 그것을 지향하고, 그것에 의해 평가받고,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도덕률의 의무와 그것의 발견은 배후에 정신이나 인격이 있어야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 없는 행위만이 있다는 모순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률 배후에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적 정신 ― 즉, 신 ― 이 있어야 된다. 이렇게 될 때 신이 배경이 되는 도덕은 마치 태양과 비가 모두에게 골고루 내림같이, 모든 이에게 도덕은 보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Ⅲ. 보편적 도덕률: 루이스 C. S. Lewis
루이스는 라쉬돌이나 쏠리 W. R. Sorley의 입장에 포함되겠으나 자신의 입장을 좀 더 독창적으로 전개시킨 부분이 있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첫째로 하나의 도덕률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의 결과가 초래된다. 도덕률이 개별적이라면 그것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기준도 마련하지 않은 채 하는 논쟁은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도덕적 비판들은 그 자체로 소모적이다. 예를 들어, 나치가 나쁘다고 하는 따위의 이야기들은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할 것이고, 반면에 인간성 존중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이 제시될 수 있기에 거기 비추어 나치의 만행은 규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개인간 약속이나 국가간의 조약 등도 보편적 도덕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무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도덕률은 군중심리와는 다른 것이다. 사실, 강력한 충동은 항상 승리할 것 같지만 역사상 이와는 오히려 반대가 된다. 왜냐하면 도덕률은 때때로 약한 충동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때 잘 실현되는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언뜻 본능적으로 행동할 것 같으나 본능을 거스려 행동한다. 심지어 본능들이 항상 옳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는데, 예컨대 모성애와 애국심 등도 비뚤어질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관습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 습득했더라도 모두 단순한 사회적 관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 심지어 자주 배우고 연마한 것이라도 습득은 되나 사회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와 독립적으로 타당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도덕적 진보에 대한 판단은 그 가치판단의 기초가 인간 사회와 독립적이어야 의미가 있다. 이 말은 도덕적 판단이 상황 윤리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도덕률은 또 자연법칙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루이스는 주장한다. 도덕률은 ‘~이어야 한다’는 규범 언어인데 비해 자연법칙은 ‘~이다’로 사실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선해야 한다.’는 언술과 ‘지구는 공 모양이다.’는 언술의 문장은 그 성격이 다르다. 또 동일한 상태를 결과로 맞더라도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상이군인이 버스에서 구호금을 받더라도 그것을 주는 사람이 기꺼이 주는 경우와 상이군인이 위협해서 받게 되는 경우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더 편리한 상황이 덜 편리한 상황보다 간혹 도덕적으로 더 나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연히 장님을 부딪혀 넘어지게 한 경우보다 일부러 그를 쓰러뜨리게 하려다가 실패하여 결국은 장님이 넘어지지 않은 경우가 더 사악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것이 전 인류에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것이 나에게 보상을 하지 않을 때 내가 그것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즉 어떤 것이 비록 나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그것을 해야만 하는 어떤 보편적인 의무 아래 있지 않다면 더욱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도덕률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공상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각각 그것을 제거하고 싶더라도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상은 그것의 주체가 원한다면 언제나 소멸되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도덕률은 도리어 전혀 한 개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리하게 생각되어질 경우가 많다. 도덕률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쨌건 <밖에서부터> 온 것이다. 그 내용의 수정 개폐 여부도 사실 규약에 의해서건 호기심에 의해서건 전혀 불가능한 것이 도덕률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것이 없이는 가치판단들도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값어치의 출발점은 도덕률에 있는 것이므로, 출발점은 다른 곳인데 목적지가 거기에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률을 이해하는 데는 인간이 중심이 된다. 루이스에 따르면, 규정적 당위성은 단순 서술적 존재 대상에서는 나올 수 없다. 이 말은 단순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만물들에게서 당위성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서 그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도덕률의 원천은 자연법칙보다 인간의 마음의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설계자는 자신이 설계하여 만드는 것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도덕률의 원천은 단순히 서술적인 과학적 우주에 속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루이스에 따르면, 마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 바깥에 있는 절대 완전한 힘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 명령을 제시한다. 그 존재는 이 명령을 지키는 우리의 행동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가 없다면, 옳다는 이유로 공허하게 우리 삶 전체가 희생될 수 있으며, 그래서 모든 도덕적 노력은 결국 무익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정당성의 원천은 절대적으로 선해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의 기준이라야 비로소 완전한 선 자체에 필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루이스의 중요한 적은 프랑스의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은 도덕률의 존재를 자연의 내재적인 생명력으로 설명하는 소위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주는 위안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생명력이 분투하고 의도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실 도덕론적 논증이 주장하는 일종의 절대정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적 논증의 세 가지 유형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도덕적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의 이면에 그 법칙의 주제자인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존재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악의 존재를 들어 반대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도덕론적 논증을 통해 신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주장을 살펴 보자.
Ⅳ. 도덕적 딜레마: 베일 P. Bayle
베일에 따르면, 도덕적 논증에는 굉장한 딜레마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전능하고 전지한 신이 있는데 왜 신의 속성과는 모순되는 악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 ―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 은 신의 전능성 혹은 전선성을 경험하는 것은 어려운 반면, 악 ― 도덕적이건 존재론적이건 간에 ― 의 존재는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 불공정한 일 혹은 선인들의 불행 등은 우리에게 악의 존재가 우리 주변의 현실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을 베일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 했다: 1)악은 존재한다. 2)전능한 신은 악을 파멸할 수 있었다. 3)인자한 신은 악을 파멸할 수 있다. 4)그런데 악은 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에 대한 결론의 의미를 이렇게 제시해 볼 수 있다. ㄱ)신은 전능하므로 다소 악의가 있다. ㄴ)신은 인자하므로 다소 무력하다. ㄷ)신은 악의가 있고 동시에 무력하다. ㄹ)신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언뜻 유신론적 신존재 증명을 결정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에서 이런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먼저, 신은 악을 박멸할 어떤 계획을 따로 갖고 있으며 또 이를 실행하는 중일 수 있다.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더욱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어떤 다른 계획을 갖고 있다는 한에서, 이런 주장은 가능하다. 그리고 악을 묵인하는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선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악은 도리어 선을 더 크게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악으로 보이는 작은 것이 보다 큰 선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시간 공간상 미완성의 것은 어느 것을 고정된 것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악을 박멸하는 것이 신의 속성 ― 자비 ― 자체에 모순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전지 전능한 신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원리에 충실하여 자체 모순은 범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하는 것이 반드시 전지전능한 신의 속성을 따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는 섣불리 한 두 마디로 주장할 바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 속에서 보면, 악의 존재와 신의 존재 특히, 한 속성 ― 자비 ― 을 절대화시켜 다른 어떤 속성의 상대적 가능성은 비워둔 채, 오로지 그것을 존재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여러 가지 논리적 오류를 빚을 수 있다. 한 실체에 부속되는 수많은 속성, 심지어 모든 속성이 신의 존재 증명에 역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관계로 성립될 뿐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증명에서 보았듯이, 속성은 결단코 존재와 직결시켜 이야기 할 수가 없다.
Ⅴ. 잘못된 유신론: 까뮈 A. Camus
까뮈의 눈에는 베일리의 논증은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온 신존재의 반증이었다. 그는 㰡페스트㰡에서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쥐가 전염시킨 페스트 병에 무구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을 언급하면서 유신론적 논증에 대한 반역을 시도한다. 첫째, 주민들은 의사와 합력하여 페스트와 싸우던가 아니면 신부와 합력하여 페스트에 걸리던가 해야 한다. (만일 페스트를 내린 것이 신이고 또 이것을 받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둘째, 의사와 합력하여 페스트와 투쟁하지 않는 것은 반인본주의적이다. 셋째, 그런데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것은 그것을 내리신 신께 대항하는 것이다. 넷째, 그러므로 인본주의가 옳다고 여겨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유신론/신본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선 까뮈의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리고 인본주의가 옳다면 전적 사랑의 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악의 원인이 되므로 반대해야 한다. 반유신론적 논증은 이런 기본형을 수반한다. 이 주장을 좀더 자세히 음미해 보면 약간 다른 접근을 할 수 있다. 예컨대 여기에서 유신론과 인본주의가 페스트를 두고 완벽하게 모순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페스트를 수용하는 것은 유신론이고 반면, 페스트를 배척하는 것은 인본주의라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가 좀 더 짚어져야 한다. 그리고 의사, 주민 및 신부와의 관계는 신의 뜻을 중심으로 서로 뭉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모색 불가능한 것인가? 이런 질문도 이전 질문이 만일 긍정적으로 풀린다면 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사람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는 것>이 페스트를 퇴치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전능, 전선의 섭리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논리가 가능할 경우에만 까뮈 식의 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유신론과 반신론의 대치적 상황 설정이 모순율의 관계에서 설정되고 있는가를 짚어 보아야 한다. 의사와 신부의 관계가 정확히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대표되는 경우인가? 이것은 까뮈가 살고 있던 시대적 상식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단히 한계를 갖는 개념의 병렬이다. 모든 의사가 무신론자일 수도 없지만, 모든 신부가 창궐한 전염병의 감염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 자연스러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또 페스트의 치료가 반드시 의사를 통해서 가능한다 하더라도, 그 예방 활동은 의료적이기도 하면서 또한 신앙적이기도 한 환경의 여건을 생각할 수도 있다. 게으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들도 해야 할 노릇이므로 청결을 통해 쥐의 접근을 간접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예방의학 차원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식으로 통하는 방편이다. 이 경우는 비록 ‘의사-신부’의 공식이 성립하는 상황에서도 중립적인 혹은 중복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저 비유의 상황은 까뮈의 의도대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해석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Ⅵ. 그 밖의 반유신론적 논증의 형태들
푸케티 Ronal Pucceetti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댈 수 없는 모든 견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신론자들은 전지, 전능 그리고 전적 사랑의 신이 순진무구한 자 ― 어린 아이 등 ― 를 고통 당하게 할 그럴듯한 이유를 하나도 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푸케티의 주장은 두 가지의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결백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지, 전능, 전선하신 신은 결백한 자가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실 푸케티의 주장은 유신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치명적인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인이 신의 전지 전능을 말하면서 아무리 그의 사랑을 예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전지, 전능, 전선을 동시에 만족시킬, 즉 불신자의 입장에서 수긍할 만한 예가 될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 이것은 유신론자들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서 읽을 수 있다. 첫째, 불완전한 인간이 전적으로 완전한 신을 논리적으로 반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신의 논리가 인간에게 불완전하게 비치는 것 중에는 신이 순진무구한 자의 고통과 그의 사랑의 논리가 조화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순진무구한 자의 고통은 전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동일하지 않다. 즉, 외부의 모양이 같다 해서 모든 내적 메커니즘까지 같다고 보는 것은 사태의 심층을 바로 보지 못하는 누를 범하는 것이다. 현대의 한 사조인 <논리실증주의>에서 보듯이, 모든 사태를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시켜 이름표를 붙이듯이 하는 검증은 ‘성급한 보편성의 오류’(어린아이가 전화 카드, 은행신용 카드 … 을 하나로 보듯)를 범하게 된다. 셋째, 순진무구란 신에게 속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한 판단이므로 반드시 순진무구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깨끗한 사람이라고 도덕적으로 반드시 전적으로 청결한 것은 아니다. 순진무구라고 굳세게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넷째, 완벽하지 않을지 모르나 무신론적 반론에 대한 답변들이 신의 전능성, 전지성 및 사랑과 관련되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자에 의해 좀 더 정치한 반유신론적 입장은 끊임없이 제출되고 있다. 한 가지를 더 살펴 보자. 맥키 J. L. Mackie는 이렇게 주장한다. ‘전능한 신은 악을 제거할 수 있었고, 사랑의 신은 악을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악은 제거되지도 중지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신은, 전능하면서 사랑하는 자가 아니든가, 악을 중지시킬 수 없었으므로 전능하지 않거나, 아니면 중지시키지 않았으므로 사랑이 없거나 이다.’ 매우 논리적인 이런 주장도 다음과 같은 유신론적 반론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신은 악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전능한 신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둘째, 악은 없어지지 않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셋째, 악은 어떤 이유에서든 세계의 보다 큰 선에 항상 필수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가능성들이 배제될 수 없다면 신존재에 대한 도덕적 반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나오면서
지금까지 논의에 대한 정리를 위해 우리는 노먼 가이슬러 Norman Geisler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합리적으로 불가피한 논증은 제안된 일이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 도덕률은 없는데, 그것은 하나의 심리학적 투사나 사회적 관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객관적 도덕률은 있으나 그 도덕률을 입법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신을 부정하는 어떤 도덕적 논증도 제안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악이 ‘더 큰’ 선을 위해 허용되고 있다는 주장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반신논증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오히려 유신론적 증명으로 역류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유신논증이 객관적 도덕 법칙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주론적 논증의 전제에 의존하게 된다. 즉 유신론적 도덕논증은 불합리한 우주나 인과성이 적용되는 우주에서는 확실한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도덕적 논증은 우주론적 논증의 타당성이 밝혀지고 나서야 성립된다. 이 말은 도덕적 신존재 증명이 그 자체로 엄정하게 따져질 수 없는 제이차적 논증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당위성을 두고 벌이는 유신론적 논증과 반신론적 논증은 모두가 담론의 영역이 부분적으로 겹치는 것이 있기는 해도, 양쪽이 다 일면을 주장하는 진술을 가지고 전체적 긍정 내지 부정을 이끌어 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덕적 당위의 문제는 끝없이 회귀되는 선결 문제의 오류를 물고 있다. 뿐 만 아니라 반신론적 주장들은 유신론적 재반박의 여지를 끊임없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논증 혹은 반증의 특징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합리적 접근의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부터 ‘뜨거운’ 신앙의 기반에서 선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교의의 문제이지, ‘차가운’ 합리성의 부지런한 모래성 쌓기는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도덕에 대한 칸트의 차가운 이성적 요청의 성 쌓기가 신존재를 위해 그렇게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수많은 논변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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