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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증명" 인터넷 검색 결과 모음

DoDuck 2006. 2. 8. 02:12
답변기간이 5일 남았습니다. (2005-07-30 12:11 작성) 고하기

저는 기독교 자입니다. 하지만 창조론을 믿는것은 아닙니다.

숙제를 할려고 하는데 진화론을 비판하는 글들이 많더군요

진화론의 맹점들이 많던데요

그럼 창조론의 가장 모순인 신의 존재증명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진화론은 지금 점점 근거가 모순적이라고 밝혀지고 있다는데요

그 모순들도 제가 보기엔 기독교 광론자들이 억지로 말하는것 같아

별로 제가 믿을수 있는게 못 되는것 같아요 이러다가 하느님을 못 믿을것 같아서요

창조론의 명확한 근거를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re: 창조론의 가장큰 맹점인 신의 존재증명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ilsoohan (2005-07-30 12:25 작성) 고하기

지금까지 창조론의 근거는 성서였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의 창세기였지요.

하지만 그 창세기의 기록은 적어도 3000년 이상 전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과학적 빙성이 많이 결여되고요...

요즘 창조론의 근거는 과학을 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결론적으로 창조가 아니면 이 우주나 모든 존재가 이렇게 질서적이고 조화적이고 체계적인 세계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의해서이지요.

진화론으로만 설명하기에 한계에 부닥치다보니 창조론에 대한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서도 창조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죠.

그것이 창조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주나 모든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은 결국은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결과적인 존재는 원인적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죠.

그 원인적 존재이라 가정하고 그 이 능력이 있어서 이러한 우주와 삼라만상이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창조론의 근거가 되며, 내 자신이 존재하는데 내가 나를 있게 한 원인자가 아닌 이상 나를 있게 한 원인자, 즉 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죠.

그것이 바로 창조론을 주장하게 하는 근거일 것입니다.

저의 견해였습니다.

re: 창조론의 가장 큰 맹점인 신의 존재증명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gua01 (2005-07-30 12:42 작성, 2005-07-30 12:48 수정) 고하기

+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영혼을 추구하는 가톨릭자입니다.

하느님 을 믿은 그리스도자들은 체험으로 하느님을 믿습니다.

내가 체험한 것을 질문자님에게 증명 할 수 는 없지요..

성경의 내용들 역시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님께서 체험을 못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나는 유한한 존제로써,나의 삶의 가치가 신의 존재에 의해서

그 값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존재하지 않고 하늘나라가 없다고한다면

나의 고통과 삶은 죽음이라는 미래의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값어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론자들이 말하길~

사람들이 나약하고 두려워해서 을 만들었다고 말들 하는데요..

절대 나약하고 두려워서 하느님을 믿는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하늘을 바라보며,,,드넒은 호수에서,,향기로운 꽃을 보면서,,

인간들의 숭고한 사랑을 느끼면서,, 그것을 만드 분을 찬양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것 입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제로써, 아무것도 아닙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단 한번의 실수로 모든 인간을 죽일수 도 있는것 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근거는 바로 창조된 모든것입니다.

그 모든것을 보면서 그것을 최초에 만드 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추라는 고등사고를 할수 있는 인간들입니다.

유추라는 고등인식을 포기하면

당연히 아무것도 알수 없는 짐승과 다름없는 동물일 뿐이지요..

여기서 유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그렇고요..

유추에 대해서 한번 자세히 알아 보세요..

이 유추에 대해서 받아 드릴때 제가 "신존재 증명"을 해드리리다.

그럼 하느님 사랑안에 항상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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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전통적인 신의 존재증명 방식에 대한 질문
질문자 : 비공개 | 작성일 : 2003-08-29 09:35 진주 0알 | 답변: 0 | 조회: 3
안녕하세요.
항상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질문과 답변들을 읽어보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신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들이 여러가지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전통적인 방식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꼭 알고 싶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답변] 전통적인 신의 존재증명 방식들?
답변자 : 비공개 | 작성일 : 2003-08-29 09:35


서양 철학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논의되어 왔습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같은 철학자들도 이런 논의를 계속합니다.

신의 존재 증명에 한 전통적인 증명은 크게 우주론적 증명, 존재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주론적인 증명은 우주(세계)의 궁극적인 제일원인을 찾아냄으로써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존재론적 증명은 신이란 정의상 그보다 더 큰 존재가 없는 존재인데,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보다 더 큰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데 이는 모순이라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목적론적 증명은 이 우주(세계)는 어떤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디자인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우주의 디자이너가 곧 신이라는 방식으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이 외에도 현대의 수많은 신 존재 증명 방식이 있습니다. 도덕의 본성으로부터, 명제, 수, 집합의 본성으로부터, 지향성으로부터, 지시체로부터, 단순성으로부터, 직관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색과 향이로부터, 기적으로부터, 놀이와 희열로부터, 아름다움으로부터, 삶의 의미로부터, 심지어는 악의 존재로부터 신을 증명하려는 수많은 방식이 있습니다.

글쎄요. 이런 방식들이 과연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식일까요? 이에 대해 철학적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다섯가지 증명, 알셀름무스의 증명,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의 신존재와 관련된 부분을 더 공부해 보세요.

 

질문 내용 추가 (2005-12-07 15:09 추가)
그리고 자료도 좀 예를 들어주심 감사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re: 신존재증명에 관한..
ddd2414 (2005-12-07 16:27 작성) 이의제기 |
질문자 평
잘 알겠습니다.

신의 존재 여부 증명하려는 논리는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종교(약 10000여개)가 존재하니까 각각 선명성을 주장하며 보이는 에서 부터 보이지 않는 이 있습니다.

이모든 것이 사람을 창조할때 조물주가 지존자를 사모하는 마음을 넣어 주셨기 때문에 각각의 에 의지합니다.

신을 부정하면 우리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란 논리.

최고의 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육안으로 볼수도 없습니다.

굳이 증명해 보라고 하면 이런 질문으로 존재함을 이치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공기가 보입니까? -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전파가 보입니까? -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전류가 보입니까? - 보이지 않지만 지금 컴퓨터를 작동하고 전등을 켜고 있습니다.

신의 세계도 지위가 있고 조직되었습니다. 모든 경전이 주장합니다.

성경 - 하늘에 천천이요 만만의 영들과 수많은 악귀신의 존재 인정함

뷸교 - 붓다 역시 생명을 주 지존자를 인정함

유교- 수많은 조상신과 하늘로 지칭된 신의 존재 인정

힌두교 신도 도교 - 모두 수많은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무속인들 을 접하고 보고 함께 기거합니다.

산에 가서 촛불을 켜고 빌면 단 몇분내에 수많은 악귀이 달려 온다고 주장함

세상의 제물과 욕망을 체우려는 욕구도 이라고 주장함

하루망 각종 부적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신자의 봉헌의식만 거치면 이된다 주장

에 대한 부정적인 론리

미국과 소련의 우주인이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보았지만 을 보지 못했다.

수많은 위성을 쏘아올려 고성능 카메라로 수십년을 촬영해도 은 없었다.

수많은 목격 증인이 있지만 실체를 증거로 제시하지 못한다.

막연한 정신적 혼동 착란 환상 꿈 무아지경 상태에서 떠오른 상상을 으로 주장

이렇게 신의 존재에 관한 논쟁은 끝이 없는 논리가 된다.

어떻게 현실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는가?

우주 만물이 우연히 질서있게 존재할 수 없으며 지성을 가진 최고의 인격체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은 인간보다 한차원 높은 고등 인격체일 것입니다.

일부 종교에서 주장하는 햇빛처럼 파동이나 입자로 존재하면서 물질의 장벽이 없이 이동하는 독특한 조직일 수 있습니다.

지존자는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정하시고 때에따라 점진적인 이해로 접근하게 조종되었을 수 있습니다.

현대 첨단 과학이 진보가 그렇고 인간 수면 연장이나 자연 현상을 통해 보면 에 대한 부정 보다는 실재를 인정할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이나마 참고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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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신에 존재 증명
작성일 2003-07-11 02:45 채택 포인트 200   답변 2   한줄의견 3   조회 1090  
가운데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있잖습니까? 신에 개념 안에서 신에 존재를 증명하는 것인데...
전지전능,최고의선,무소부재...
이런 신에 대한개념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루소같은 사람은 신에 능력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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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와 데카르트...
작성일  2003-07-11 11:04 현재추천 0  
brothering 님
등급 :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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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 중의 하나인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은 안셀무스(Anselmus, 1033 ~ 1109)와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가 시도한 바 있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스콜라 신학자이며,
캔터베리 대주교(大主敎)였던 안셀무스는
"내부에 결정(結晶)된 존재의 사변(思辨)"을 연역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는데...
이러한 안셀무스의 증명법에 대해서는 솔직히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데카르트의 증명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언급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위에 제시한 안셀무스의 짤막한 언급은 데카르트를 연상시킵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안셀무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방법은
비철학도(혹은 비신학도)들에게도 조금은 익숙한 것입니다.
일단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이해하셔야겠죠.
"방법론적 회의"라고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고등학교 윤리책에도 있지요.
그것은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확실성"을 찾기 위한 회의입니다.

데카르트의 연역법은 "조금도 의심할 나위없이 가장 확실한 근거"에서 출발해야지만
그것으로부터 나머지 논리들이 연역되고 증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그냥 단순히 "이것은 확실하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일단 의심하기 시작하면 의심의 끝이 없어보일 정도로 모든 것이 의심됩니다.
건물, 바위, 나무, 담장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증명해 보인다고 해보십시오.
혹은 누군가가 그것들을 "내가 볼 때만 그 자리에 후다닥 나타났다가
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후다닥 흩어져버리는 환상이다"라고 우긴다고 해보십시오.
혹시라도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 그것들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로 설명해주기는 매우 힘들답니다.
한번 그러한 회의에 빠져들면 모든 것의 존재가 의심스럽습니다.

끝없어 보이는 이러한 회의 속에서,
잘 아시다시피, 데카르트는 "마지막 결정적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럼 나도 없는걸까? 만약 내가 없는데, 나는 저 나무가 없다고 회의할 수 있는가?"
결국 데카르트가 찾은 것은 "나"입니다.
즉 "회의하는 주체인 내가 없으면 처음부터 회의할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 내가 저 대상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 결국 내가 존재하는 것도 분명하다"입니다.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인 것이지요.

자, 여기서부터 회의는 끝나고 반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
즉 그것으로부터 다른 철학적 반성이 뒤따른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원칙을 확립한 것입니다.
바로 "자아"이지요.
일단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왜 다른 사물들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논증의 골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만약 분명한 자아가 존재한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분명한 실재들도 존재해야만 한다"

여기까지 이해하셨다면,
이제 님께서 제기하셨던 맨처음의 질문,
즉 신의 존재증명도 이와 같은 방식일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하실 겁니다.
즉 "확실한 내가 존재하므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고,
더 나아가 신이 존재하는 것도 확실하다"라는 논리이지요.

"내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므로 신이 존재하는 것도 확실하다"
는 부분이 좀 이상하다고요?
좀 더 생각해 보지요.
가령 한 나무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그 나무의 존재는 영원합니까?
아니지요. 언젠가 베어지거나, 혹은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없어진다고 해서 "무엇인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 역시 없어집니까?
아니지요.
나무는 유한하며 불완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가 없어져도 여전히 남는 그 무엇, 즉 "존재 일반"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어떤 것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무엇 이전에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하므로 시작이 없다는 것이며
끝이 없다는 것도 동일한 논리에서 연역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누가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가령 어떤 책상을 어떤 사람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일단 "그 무엇"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럼 "그 무엇"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이렇게 나가다 보면 최종적인 "존재 일반"은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란 관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는 드디어 '신(神)'의 개념에 도달한 겁니다.
이것은 "I'm Who I'm"이라는 성경 구절과 같지요?
동시에 노자가 처음 말했던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과도 같지요?
그것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개별 존재들과 대비되는 그 어떤 것이며,
따라서 "무한영원하고 완전하며(전능) 그 어디에도 존재하는(무소부재)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라 부르는 사람(신학자나 종교인들)도 있고,
'자연'이라고 부르는 사람(자연주의자나 도가철학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론적 개념은 반드시 신학에 종사했던 사람들만 가졌던 개념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해내었던 개념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s, BC 515?~BC 445?)도
그러한 개념을 언급한 바가 있지요.
즉 존재 혹은 자연(physis=nature)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데카르트의 신론을 계승한 사람들이 범신론(凡神論)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 범신론: 어느 곳에도 신이 존재한다는 이론, 결국 신은 곧 자연이라는 이론)


작성자 미스터황..
출처 :
의견 : 박사님 이셨군요 ^^*   (비공개님이 2003-07-13 23:15 작성)
위에 밝혔듯이 전 기독교인 입니다. 님은 아니신것 같군요.
정말 어려울때 님께서 말씀하신 존재가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진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의견 : 답변이 약간 빗나간것 같습니다.   (비공개님이 2003-07-11 19:03 작성)
질문자입니다.
제가 질문한것은 존재론적증명이지 우주론적 증명이 아니엇습니다.
그건그렇고 궁금했던건 신에 개념이 어디서 온것인가 였습니다. 님에 답변에 답이 들어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논리가 좀 미지근한것 같네요..(데카르트에방법서설은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니 신에 개념안에 신에 대한 개념이 들어있는것 같군요.
문제는 존재하는것은 존재하지 않는것보다 완전한것인가하는 것인데요...
그런가요?
의견 : 매우 진지한 질문자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 brothering [등급:대학생] 님이 2003-07-11 19:44 작성)
답변이 마음에 안 드셨다니 좀 아쉽기는 하지만, 제 역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는 없네요. 좀더 내공이 깊으신 분을 기다려 보십시오.
그건 그렇고, 파르메니데스가 언급했던 <불완전한 비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해 본 적이 없는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사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 혹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이해합니다. 이에 대해 <완전한 존재>는 그 모든 불완전한 비존재를 포괄하여 결과적으로 <죽음과 사멸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 <불완전한 비존재>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요.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죽는 것은 그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지만, 세대를 거듭하여 사람이 끊임없이 나고 죽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파르메니데스적인 개념틀 내에서는 <존재>가 <비존재>보다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체의 관점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한 몸이 죽는 게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이란 것이 항상 불완전한 것이지만, 좀더 넓은 견지에서 죽음을 바라볼 경우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섭리이며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를 깨닫고 그 <존재>에 귀의하고 순응하면, 앞서 말한 <불완전함>이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불완전함>과 <완전함>은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존재>가 <존재>에 귀의해서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것은 기쁘고 담담하게 삶과 죽음(삶과 죽음은 비존재의 특징이겠지요)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도 사실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지요. 동시에 <비존재>가 더욱 더 불완전해지는 것은 죽는 날까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간들의, 그리고 인간들만이 가진 병입니다.
님의 글에 대한 답변은 즐겁습니다. 설혹 정확한 답변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의견 : 만약에.. 신이있다면   ( hahaba [등급:유치원생] 님이 2004-08-21 15:23 작성)
신이 있다면 신은 누가 만을었을까요?
왜 2차적인 사고방식은 못하져?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무가 유가됐는데 그 유가 무를 없앤다면 없애는 물질이라면, 그리고 유가 자꾸 팽창한다면
무가 없어지고나서 사람들은 유만 있으니
무를 찾으려고 하겠져 하지만 무는 절대 없습니다.
아님 무는 있는데 우리가 단지 무를 볼수없는것인지...
2가지 결론이있습니다.
그러니까 순볶음교회로 오세여~ 행복이 가득~ 기쁨이 가득~
초코파이도 줍니다. 오리온~
의견 : 만약에.. 신이있다면   ( hahaba [등급:유치원생] 님이 2004-08-21 15:23 작성)
신이 있다면 신은 누가 만을었을까요?
왜 2차적인 사고방식은 못하져?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무가 유가됐는데 그 유가 무를 없앤다면 없애는 물질이라면, 그리고 유가 자꾸 팽창한다면
무가 없어지고나서 사람들은 유만 있으니
무를 찾으려고 하겠져 하지만 무는 절대 없습니다.
아님 무는 있는데 우리가 단지 무를 볼수없는것인지...
2가지 결론이있습니다.
그러니까 순볶음교회로 오세여~ 행복이 가득~ 기쁨이 가득~
초코파이도 줍니다. 오리온~
그외답변
논리적 오류
작성일  2003-07-11 06:59 현재추천 1  
신을 증명하는데 있어 그런 증명법은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예를 들어
"저 집의 주인은 나인데, 저 집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로 내가 저 집의 주인이라는 증거다."
심각한 노리적 모순이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사실들을 통해서(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증명해야지 발견하지 못하는 현상(증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현상을 가리켜 "저것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증거다"라는 주장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 해석이 가능하니까요.

전지전능의 개념 역시 모순입니다. 전지하면 전능할 수 없으며 전능하다면 전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에서 우주(시공간)를 창조했다면, 나머지것들을 일일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물리법칙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죠. 이러한 창조주는 시공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시간과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시공속에 들어와 있지 않으므로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획도 세울 수 없으며 인간에게 개입할 수도 없죠. 즉 전지하다고 할수가 없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듯 우주의 창조라라 부른다면(시공을 초월해 그 밖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면) 기독교 메세지 자체의 형태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 많은 선지자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반면 생각하고 인간과 대화하고 계획을 짜면서 인간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살아있는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공간을 통해 활동하게 되므로(즉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으므로) 전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호흡하며 인간세계에 순간순간마다 관여하시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하느님이 더 중요한 개념인지 우리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창조주라는 개념이 더 중요한지는 택일을 해야하는 현실에 부닥쳐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숭배한다면 오히려 누가되는 억지를 쓰지는 말아야한다는 겁니다. 앞으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이 발전되어 갈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잘 알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짧은 글로 많은걸 이야기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논점이 흐려질 수 있으므로 간략하게 적었습니다.
출처 :
의견 : 님에 답변은 왠지 이상합니다???   (비공개님이 2003-07-11 18:53 작성)
질문자입니다.
저도 기독교인입니다만 님의 답변이 좀 이상합니다.시공간을 하나님이 만들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우주에 시작이 하나님이 아니라는것인데... 잘못된거 아닌지요?

의견 : 기독교 신자 분께..   ( yeouby [등급:고등학생] 님이 2003-07-12 15:49 작성)
중세시대 때 Augustin(e)이라는 신부가 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죠.. 지금도 Aporia(난제)로 남아있는 것인데... 구약성서라던가..? 아무튼 거기에 보면 제일 첫 장에 이렇게 적혀 있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 뭐 그런 내용)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죠.
"그럼 태초 이전은 어떻게 됩니까?"
아직도 아무도 대답 못 하고 있다죠.. ^^;
의견 : 그럼 "無"는 애초부터 없었다...?   (비공개님이 2003-07-11 13:14 작성)
신이 무에서 유로 창조하였다면..무를 유로 바꾸게한 신은 무엇인가?
신이 만들었다면..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무가아닌 유에서 유로의 변화에 불과할것이고...
신이 없다면..무에서 유로 전환된..동기는 어디에있는가..?
지금의 유의 세계는 무에서 기인한것인가...아니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인가...?
우주의 시작은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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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 보충 답변입니다.<답변 쓴 이>   (비공개님이 2003-07-14 16:56 작성)
종교철학자들은 성경에 묘사된 글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일반에게 가르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는 문구가 가장 대표적이며 하나님과 우주의 시초에 대한 철학적 해석의 시발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다분히 철학적이죠. 나름대로의 연역적 논리를 구성하는 철학이 인간의 많은 고민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사유지 과학적인 증명은 아니란겁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은 마음속에 존재하는것이며 믿음(신앙)의 문제이지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불경스러운 태도라는 종교적 답변이 웬지 확신이 없게 보입니다. 실재로 인간 세계에 개입을 해 오고 있는 존재를 오직 믿음의 문제로 국한시킨다면 그 사람 자체가 신에 대한 모순된 인식을 말함으로써 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을 한번 더 보여주는 거 밖에 안됩니다.
우주의 시초? 무에서 어떻게 유를 창조하는가? 이것은 무라는 개념을 먼저 세우는게 중요합니다. 무라고 해서 흔히 우리의 철학적 개념의 무만을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죠. 지금 허공을 한번 바라보시죠. 아무것도 없죠. 그렇다고 그 곳에 진짜 아무것도 없는건 아닙니다. 어떤 에너지의 파동이 있을 수 있죠. 무에서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두기만 하면 그건 바로 물질이 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건 대학교 조그만 실험실에서도 가능한게 현실입니다.
실재로 우주 전체의 에너지양을 측정하는 방정식이 있는데 그 결과는 바로 '0'랍니다. 애당초 우주는 '0' 즉 '무'에서 시작되고 현재도 '0'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거죠. 분명히 나는 이 우주를 인식하고 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린가..이해가 안 가시면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한개의 양에너지와 한개의 음에너지를 합하면 '0'이 되겠죠..
우주의 시초가 있게 한 원인은 '나'입니다. 양자물리학이라는 현대 과학 발전의 모체가되는 물리학의 대표적인 분과가 만들어낸 결론이죠. 전자라는 입자는 이해하기 참 어려운 물질입니다. 물질이기도하고 단순한 파동이기도 하고.. 빛을 이루는 광자도 그렇죠.
전자는 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들여다보면 물질이며 그 에너지양을 재려고하면 파동입니다. 우리는 한바퀴를 돌면 얼굴이 나타나지만 전자는 두바퀴를 돌아야만 얼굴이 나타나죠. 전자는 실재로 인간이 관찰 활동을 해야만 실존하며 관찰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간단한 발견이 오늘날 전기를 바탕으로 하는 문명의 발전을 있게 한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결국 전자는 존재하지 않는것이며 우주도 마찬가지란 겁니다. 우주는 애당초 누군가 자신을 알아줄 누군가가 존재하게 되리란 확신하에 생겨났으며 우주를 인식하는 바로 당신이 우주의 창조자란겁니다.
또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강박관념 하에서는 우주의 시초와 종말이 왜 한 점에 존재하는지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구의 시작과 끝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 두 점은 한 점이라는 개념을 오늘날엔 누구나 알고있죠.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면 태초 이전에는 바로 이 세상이 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이 세상 이 우주 자체가 우주의 원인이며 태초를 있게 한 거죠. .
시간은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하지만 흐르지는 않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공간을 통하여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활동을 하는 거죠.
그리고 답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창조주가 우주의 밖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면 그는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인간세계에 개입을 할 수가 없으며 인간세계에 개입하는 인격적인 하느님이라면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므로 어떠한 하나님이 기독교인에게 더 필요한 하나님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합니다. 하나님도 결코 자연법칙을 어기고는 이 세상에 메시지를 전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기적이라는걸 믿으며 그런 증명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증거해 보이려는 맹신도들에겐 이런 이야기가 물론 하등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지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이 이야기가 설사 맞는다 해도 원래 가지고있던 하나님의 영광에는 아무런 위해도 가는게 아니란걸 깨달아야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길로 당신이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는겁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야기를 한다해도 원래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속성은 언제나 그대로이며 오히려 우매하고 미신적인 맹신이 그 영광을 헤친다는 것을 알아야하죠. 과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헤친다는 이유로 화형을 가하기도 했었지만 오늘날 그게 증명이 된 이후 어느 누가 지구가 둥글다고 말하는 이유로 탄핵받는 경우가 있습니까? 지구의 나이만 45억년이며 인간이 신이라는 개념을 알게된 거는 기껏해야 10만년 정도 밖에 안됩니다. 유일신 개념이 생긴 것은 만 오천년 정도이고 기독교적 유일신 개념은 6천년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 짧은 기간에 언제나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신의 속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그 믿음을 확신으로 일관하지만 그런 신의 새로운 속성을 계속해서 밝혀내는건 언제나 과학자들이었죠. 하나님이 언제 지구가 평평하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했던가요?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냥 그렇게 생각한거죠. 기독교 지도자들은 계속하여 그릇된 신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오히려 신을 제대로 알아가게 하는건 언제나 과학자들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역설적으로 아직도 신의 개념은 확실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왜냐면 계속하여 새로운 증명법이 나오고 있으며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이 새로운 증명법에 의하여 계속 밝혀지고 있으니까요.

좀 산만하지만 보충 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참고로 정신세계사 발행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라는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정리를 해 가면서 다섯 번 정도 숙독을 하면 산만한 제 이야기가 이해되실 겁니다.
의견 : 탁월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비공개님이 2003-07-14 22:57 작성)
님 정말 똑똑하세요(비꼬는것절대아님니다)천국이 님처럼 똑똑한 사람만 갈수 있다면
정말 한산 하겠네요^^*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을때 님처럼 똑똑한 분을 제자로 삼았어야 하는건데요..(뭐 좀 곯치는
아프셨겠지만요.ㅋ)저는 똑똑하지 못하니깐 그냥 성경을 액면 그대로 믿을랍니다.
그런데 님은 다른창조 물리학자들과는 의견이 다르신것 같아요. 지구에 나이라든가 또 이적을 믿지
않는다던가요

위에 또다른 답변써 주신분과 지적수준이 맞으실것 같아요.(그분도박사님)

성의있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진심으로)
의견 : 보충 답변-2편   (비공개님이 2003-07-23 16:47 작성)
10억개의 반물질 당 10억 1개의 물질이 생겨 한 우주가 생성될 확률은 10의 31승 분의 1 정도 입니다. 이건 순전한 우연이며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이죠. 우주가 없었을 수도 있었단 겁니다. 어쨌건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우리는 지금 엠파스 지식거래소에서 이런 토론을 할 수가 없었겠죠. 어항에 물고기가 있어야만 그 물고기가 어째서 내가 사는 세상은 물로만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으며 산등성이 등산로 위에는 물도 물고기도 없으며 거기에는 그런 의문 자체도 없죠.

우주가 팽창하는건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 현상입니다. 원래 우주에 존재하는 자연법칙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건 중학교 과학 교과서를 보면 간단히 나와있구요.

믿음이란게 과연 유효한가 하는게 질문자의 요지 중에 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자기 존재 내에서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죠.
저 집은 내 집인데 저 집이 저기 서 있는게 바로 그 증거다... 하는 것처럼 나중에 등기부등본 조회해보면 알 수 있는 문제를 그걸 믿느냐 안 믿느냐 하며 옥신각신 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증명되지 않는 믿음에 의한 신의 속성에 대한 판단은 자칫 과학 발전에 따라 그저 미신이나 비 과학적인걸로 판명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구는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도는 거 맞죠?
영혼을 믿나요? 그렇다면 영혼이란 어떤 겁니까? 교회에서 배운거 말고는 없을걸로 판단됩니다. 영혼의 실체도 과학자들에 의해 일부 밝혀졌고 앞으로는 더욱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논문들이 나올겁니다.
물에 영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마 없다고 하겠죠. 온도가 내려가면 물분자들은 조직적으로 어떤 형태를 구성하여 내려가는 온도에 대항해 자기 존재들을 보호하려는 현상을 일으킵니다. 얼음이 돼가는 것이죠. 온도가 너무 올라가도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류현상을 일으켜 받아들인 온도를 대기중에 발산시킵니다. 마찬가지로 공기도 대류를 하죠.
인간만이 영과 혼을 지닌 존재라는 독선은 곧 깨집니다. 우주에 포함되어있는 그 무엇도 조직화 할 수 있으며 조직화가 확대되면 인간의 뇌 활동만큼 못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지구의 생태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인간의 두뇌가 그걸 다 이해할 수 없고 지구상의 전 재화를 쏟아부어도 자연 현상을 통제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 때 인간이 더 영적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지구의 생태계가 더 영적으로 보입니까? 역으로 말하면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자식이 된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믿음의 문제이지 하나도 증명되지 않은 말이죠. 그래서 그런걸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는 위에 말한 등기부등본 조회해 보는게 빠르다는 논조와 같은 맥락입니다.

각 민족의 건국신화 등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더 유식하고 과학발전이 앞선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신진 지배층이 대다수 우매한 백성들을 속이거나, 아니면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해 줘 봤자 못 알아들으니까 쉽고 흥미있게 펴낸 이야기입니다. 고등학생이 읽는 걸리버여행기를 초등학생이 이해하기는 어렵겠죠? 그래서 그 수준에 맞춰서 쉽고 재미있게 그림을 곁들여 써 놓은 겁니다. 그런거죠.

아직까지는 신은 인간의 창조물이라는게 제 솔직한 생각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고도로 집중된 종교철학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위대한 개념이 우습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류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겨주려 했던 성현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물 역시 인간이 인식하는 하나의 위대한 개념이며 그 자체로서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믿으니까요. 어라?... 말하고보니 이것도 믿음의 문제네?... 인간은 역시 과학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는 믿음의 문제로 돌려놓는가 봅니다. 그러나 어떤걸 맹신한다면 정말 위험합니다.
어쨌든... 인간에게 어떤 하나님이 더 필요한가 하는 고민이 필요한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저 우주를 창조하고나서 인류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물리세계 밖의 창조주가 더 중요한 개념인지, 끊임없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이 더 중요한 개념인지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란 겁니다. 만약 전자의 창조주가 더 중요하다면 수천년간 내려온 기독교 메시지 자체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계속 하다보면 책 한권 쓰게 생겼으니까 그만 하고 다시 한번 권하죠. 정신세계사 발행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란 책을 여러번 깊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양한 현대물리학 이론과 종교철학 이론을 비교적 쉽게 통합하여 서술해 놓았으므로 하나님과 생명, 우주, 시간.. 등에 관해서 기초적인 개념을 세울 수 있을겁니다.
의견 : 무에서 유가 생기는 방법에 관한 짧은 답변....(100%보장은 불가)   ( kreak79 [등급:유치원생] 님이 2003-07-21 21:51 작성)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無'라는 것은 시간, 공간,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질량도 아인슈타인에 의해 에너지가 되었죠.) 이런 아무것도 없는 우주들이 기체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기체의 에너지 상태 그래프를 보시면 낮은것 부터 높은 것이 있을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보면 우주는 '0'의 상황입니다만, 실제로는 +10~-10모 이런 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단 것이죠. 그러다가 운좋은 한 녀석이 다른 녀석들을 아주 -로 많이 만들면서 혼자 에너지를 키워서 툭하고 0의 상태에서 빠져나옵니다.(tunnel effect라 부르는 것이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혼자 나머지 부분들을 먹어 치우면서 커지기 시작합니다. 소위 빅뱅이라 부르는 것이죠. 빅뱅이 일어나면서 에너지들이 물질과 반물질로 바뀝니다.(전기의 +-처럼 물질과 반물질이 부딪히면 에너지로 돌아갑니다.) 이때 10억개의 물질과 반물질당 1개의 물질이 더 많이 생겼기 때문에 현재의 물질 우주가 생겼다고 합니다. 대충 이해하고 쓴 것이라 틀린 부분이 있겠지만, 대충은 무에서 유가 생길 수 있는 이론입니다.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여러가지 증거도 있죠^^

여기서 신이 우주를 창조하셨단 분들께 하나만 질문하겠습니다. 신은 왜 우주가 점점더 커지게 만들었나요? 왜 지구도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태양도 우리 은하 중심으로 돌고, 다 돌게 만들었나요? 그냥이라구욤? 흠....

위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물질이 생길때 10억개의 물질과 반물질들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에너지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욤... 홍홍....

마지막으로, 신(The God)이 있었다면, 북유럽의 신화나 우리나라 단군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케 된거죵??? 그리고 신이 우리와 같은 모양이라면,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에서 어케 우리모양의 존재가 존재할 공간이 있었죠??????

한가지만 말씀드리면, 신을 믿기전에 영혼을 믿으신다면 신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 드리지만, 영혼을 믿지 않으시는데 신을 믿지는 말아 주십시오.
신의 존재증명
  0  0     나도평가하기 최초작성자 : 동서문화사   조회: 706   버전 : 1
지식편집자 : 동서문화사(level 1)   |   2004-02-28 18:23 작성  
神-存在證明 그리스도교의 신학·철학 문제의 하나. 그리스도교에서 신은 신앙의 대상인데 세계의 여러 가지 사물과 신앙자 자신의 존재가 이성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에 따라 신의 존재도 이런 사물과는 다른, 이러한 사물을 초월하는 존재로서 신앙자의 마음속에서 이성적인 방법으로 확인되는 것이 요구된다. 신의 존재증명이란 이 확인의 절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일의적으로 신앙자 마음속에서의 신앙내용의 이성적인 자기확인 절차이며 동시에 비신앙자에 대해서는 신앙자에 의한 신의 존재의 변증이 된다. 고대 그리스 교부와 A.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그 기초를 찾아볼 수 있으나 투철한 논리적 사색을 전개한 최초의 사람은 안셀무스이다. 그에 따르면 신이란 <그보다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대상>이며,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그것은 그 사람의 정신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것과 정신 속에 존재하고 동시에 실재 속에도 존재하는 것에서는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크다. 따라서 신은 <그보다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이 신이 단지 정신 속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실재 속에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프로슬로기온》). 이것은 신의 관념에서 그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으로서, 뒤에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라 하였다. 근세에는 R. 데카르트가 이와 비슷한 증명을 했다. 이 증명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I. 칸트와 G.W.F. 헤겔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찬반양론을 폈고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T. 아퀴나스는 경험론적 기반에서 세계존재의 인식에 기초하여 세계존재를 존립시키고 있는 근거로서 신의 존립을 논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5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을 <5개의 길(quinque viae)>이라 하였다. 첫번째에서 세번째까지의 길은 세계존재가 운동변화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운동변화의 첫번째 근거로서 신의 존립을 논증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것이었다. 네번째 길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완전성 단계의 차이에 기초하여 이 단계를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최고로 완전한 것인 신을 논증했다. 다섯번째 길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이성적 질서의 근거로서 신을 논증했다(《신학대전》). 이러한 세계존재에서 출발하는 논증을 총괄해서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 한다. 칸트는 이성의 합리적 요구로서는 불가피하지만 객관적인 타당성은 가질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신은 이런 것들과는 다른 길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Q :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0  0     나도평가하기 질문닷컴(level1)    조회: 761    답변: 1    지수: 0
마감되었습니다.    l    2003-06-04 00:00 작성 신고하기
선택된 답변
A :
답변자 : 질문닷컴    l    2003-06-04 00:00 작성 태클달기    l    신고하기    
여러분은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가 쿼크라는 걸 알고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 쿼크 또한
''쿼크구성입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쿼크의 입자인 가느다란 띠.. 이것이 일종의 파동인데요.
. 그러니깐 결국 따져보면 이 우주는 실체가 없고 결국 진동인 셈이죠.
150억년 전에 생긴 진동..
그 이전 無의 상태였을 때는 무한대의 에너지를 지닌 공간, ''의식체''였고요.
.
그것이 차원분화를 겪어 물질우주가 되고, 또 우주의식이 흩어지면서 생물의
''자아''개념으로 분화되고 그렇게 된 것이죠.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이해하시려면 양자역학과 초끈이론에 대해 좀 아셔야 하는데요.
.
브라이언 그린의 저서 ''엘리건트 유니버스''와 문성호 저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라는 책을
보시면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또하나 말하자면,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자연계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린다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이를 긍정하는 측의 대표적인 것에는 다음의 세가지 증명을 들었습니다
1. 신은 완전한 것인데, 만약 ''존재''라고 하는 요소가 빠지면 신은 불완전하게 되므로 신이 존제한다고 생각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본체론적 증명
2. 자연계에 있는 것은 모두 인과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므로 인과관계를 더듬어서 점차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후에는 제1원인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는 우주론적 증명
3.천제가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는것은 목적이나 의장을 창출한 신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목적론적 증명 등ㅇ ㅣ있습니다.

또한 이들을 비판한 역사적증명, 도덕적 증명, 그리고 체험적 증명등도 있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측의 대표적인 것은 직접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유물론,무신론적 실존주의 논리 실증주의 등의 입장에서 주장 됩니다.

또한 지배자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서 신이 생겼다고하는 정치적 발명설, 공포가 신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공포기원설, 신이 존재하고 있는 양 행동하는 편이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허구설 등 간접적 부정의 시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만족할수 있는 ''해답''은 아직껏 ''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신의 존재증명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적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평점 :
0 (0 명) 나도 평가하기 catchsyung 조회 :66 답변 : 5
답변이 완료된 질문입니다. (2005-09-19 01:29 작성) 고하기

고2 인문사회계열 학생입니다.

얼마전에 사회문화 수업을 듣다가

선생님께서

'종교에서 하는 말들은 다 지어낸것이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꾸며낸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그 근거로

'을 만난적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은 없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셧습니다.

전 특별히 종교가 없습니다만, 듣는 순간 '어,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학은 경험적으로 증명 될 수 있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형이하학'이고

학은 사회학에 포함되지 않는 독립적인 학문이며 형이상학인데요.

앙의 유무에 관계없이

'신을 만난 사람이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논리적 경함에

논리적으로 반증할 수 있는 철학적, 학적 근거가 있습니까?

간단해도, 자세해도 좋으니까 명확하게 가르쳐주세요.

질문 내용 추가 (2005-09-19 01:31 추가)
질문이 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러니까 제 질문의 요지는 '신의 존재가 입증 가능하다는 철학적 근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re: 신의 존재증명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적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badbanana (2005-09-19 02:12 작성) 이의제기 | 고하기
질문자 평
감사합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할지 알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어떠한 논리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입증하는 논리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논리로는 다음과 같은것이 있습니다.

"은 완벽하다"

"완벽함은 존재성도 포함한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저 논리는.. 우선 신의 완벽함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므로..

이미 오래전에.. 그 힘을 잃은 증명입니다.

하지만..님 선생님의 무신의 논리도.. 많은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에 이 없다는 직접적인 증명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없을 확율이 높은 강력한 증명들이 많을 뿐이지요.

을 만난사람이 없으므로 은 없다?

더 좋은 논증들이 많은데 저런 허접한 논증을 쓰다니.. 님 선생님도.. 참 욱기는 분이네여

그럼 님도 반증을 해보세여.. 지금 학계에 보고 되지 않은 수많은 생명체가 있다고 여겨지

는데.. 그들은 현재까지 아무도 만난적이 없지만.. 있으리라 강력하게 추측된다. 또 실례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새롭게 학계에 보고되는 생명체도 많다. 그렇다면.. 분명히 존재

는 것인데.. 단순히 사람과 만난적이 없단 이유만으로 그 존재가 부정될 수 잇는 것이냐.?

^ㅅ^ 도움되셨길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re: 신의 존재증명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적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ronerius (2005-09-19 10:40 작성) 이의제기 | 고하기
질문자 평
독특하네요...공부가 되었습니다.
신의 존재의 유무...

신이 존재함에 철학적 근거를 제시해보겟습니다

일단 예를 들어보죠

컴퓨터의 전산 값인 off의 값 0과 on의 값 1...

이 수많은 꺼짐과 켜짐의 회로가 데이터가 되고 그것으로 컴퓨터가 작동됩니다

그렇담 off값과 on값의 의미는 무엇을 뜻할까요?

0은 무...아무것도 없는걸 말합니다

1은 유...단 하나, 무엇인가 하나의 개체가 완벽하게 갖춰져있음을 말합니다

무신론자...즉 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0...즉 off값을 믿습니다

유신론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1...즉 on값을 믿습니다

하지만 있다와 없다의 그 사이, 즉 소수점 0.000...0001값부터 0.999...999값

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신은 처음과 끝입니다 0과 1만이 이며

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0과 1 사이의 소수점의 할당범위이죠

과학자들은 빅뱅...우주의 시작이 단지 미립자들의 충돌로 일어난

충돌에너지의 무한발산의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이쪽 분야로는 잘 모르니 이정도 말로 얼버무리겟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시작일까요?

어쩌면 우주의 시작(즉 신의 범위)은 신의 인위적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주가 소멸하는 것도 신의 행동일태죠

쉽게 말해서 다시한번 예를 들겟습니다

어느 한 유저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단지 도스(우주 탄생 기초 전의 미립자들) 밖에 없는 컴퓨터였지만

OS를 설치(일종의 빅뱅이라고 가정합시다)하고

그 후 각종 유틸리티(빅뱅으로 생겨난 수많은 은하계와 그외 것들)를 설치합니다

이제 사용자는 컴퓨터의 기본적인 설치를 마쳤으니

컴퓨터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껍니다

어느 유틸리티를 사용하여 이러한 것들을 만들거나 계획하고

또 어떠한 유틸리티를 사용하여 다른 것들을 만들거나 계획합니다

위의 예는 컴퓨터를 세상(우주의 만물들),사용자를 으로 비유한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좀 쉬울지도 모르겟네요

즉 신은 단지 존재의 유무 자체를 입증 할 대상이 아닌

만물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써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나 이치들을 다루는

존재입니다

작은 것으론 만류인력이나 마찰력,충돌에너지,질량보존,탄성,자전,공전,

빛의 생성과 굴절 등등 수많은것들이 있으며

지구 안의 범위로 따져보면 태양계의 탄생,지구의 탄생,생명체의 탄생,인류의 탄생

수많은 역사로 남은 여러 사례들...

이러한 모든 것을 담당하고 다루는 사람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것?입증?

눈에 보이는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현재 인간이 오감과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설명할수 있는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설명의 한계 이상의 것을 발견한들

그것은 머리안에서의 개념으로만 남을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그러한 것들 중 하나가 신의 존재입니다


신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내용출처 : 개인 서술
답변들
론자의 증언.
dr_insane (2005-09-19 11:43 작성) 이의제기 | 고하기
저는 무론자입니다. 고로 그 선생님의 생각에동의하나. 그 선생님 분의

'의견' 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누구도 보지않았다는 이유로 존재하지않는

다는것은 매우 단세포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흠.. 유론자들은 성경(종교의 교리가 있는 책.. 그런것들..)이 가장 절대적인

진리의 책이다.. 라고 믿고있죠.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모든 사건에는 '원인' 이 필요한데

계속 '왜?' 를 쫓다보면 결국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는 사건이 생깁니다.

(빅뱅의 경우에도 제일처음에 작은 점하나가 왜 생겼는지는 알방법이 없죠.)

유신론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절대원리는 이 만들었다' 정도의 말을 하는거죠.

흠.. 말하자면 은 '절대원리' 를 위해 탄생한것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re: 신의 존재증명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적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dkdlelff (2005-09-19 14:01 작성) 이의제기 | 고하기

음.. 탈무드에서 읽은 내용인데요

로마의 장군인지?

어떤 사람이 랍비를 놀려주려고

"당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네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데체 어디있는거요?"

"(랍비. 잠시 뜸을들이더니)잠깐 밖으로 나와보시죠."

"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수 있으십니까?"

"(해를 보더니 눈이부셔서)아. 눈부셔! 어떻게 태양을 볼수 있겠습니까!"

"(웃으면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저 태양도 보지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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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어보세요. 참고로 저도 무론자에다가 종교 같은것에 별로 관심없는 사람이지만

이 믿지 않는다고해서 다른사람의 믿음까지 무시하는 행동은 조금 마음에 안듭니다.

하지만 그 사회선생님도 학생들에게 어떤 동기?랄까.. 를 심어주기 위함이 아니였으련지요..ㅎㅎ

과학적인 증거는 어떨런지...
kng1122 (2005-09-28 03:31 작성) 이의제기 | 고하기
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우주의 끝을 설명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하

지만 내 나름대로의 지식과 경험과 깨달음과 과학을 통하여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군요.

을 형상화 하여 보여달라고 하면 그럴수 없음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산속에 있으면 산의 전체 형태를 모르듯. 지구가 구(원형)의 형태로 있는것을 땅위에서는 알수 없듯말입니다. 은 우리를 알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을 공기로 가정을 해봅시다.
공기는 세상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공기가 없다면 어떤 생물도 살아갈수 없습니다.

인간에겐 산소의 형태로 세포 하나하나에 투입되었다가 에너지로 변환하고 다시 나옵니다. 모든 생물에 삶과 죽음의 차이는 공기를 필요로 하는냐 필요없는냐의 차이겠죠..

또한 공기속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존재합니다. 구름을 만들고 바람이 불고 비를 뿌리고 천둥 번개를 만들고 이런 자연 현상은 공기중의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말그대로 공기는 생명의 근원이겠죠 그런데 공기는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언제 어디든지 존재한다는 거죠.


그럼 을 물이나 불로 가정해봅시다.

위에 처럼 설명하지 않아도 이 또한 생명의 근원이며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공기.물.불등은 생명의 근원이며 만물을 지배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자연이 이다. 그렇게 결론 내리기는 너무 쉽고 뭔가 아쉽고 논리의 부족함을 느낍니다.

물리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습니다.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는 그것이 보존이되어 남아 있다는것입니다.

한 예로 나무를 태우면 에너지가 불을 형태로 있다가 공기중으로 에너지가 분산되었다가 그 에너지가 공기를 데우고 공기가 비를 만들어 다시 나무를 키우고 그렇게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거죠.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은 이 에너지는 인간이 상상할수 없을 만큼 엄청남 힘을 지지고 있습니다.모든 생물 무생물을 지배하여 완벽한 자연의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길흉화복 뿐만 아니라 생과 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잠깐! 그럼 귀신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적용하면 쉽게 설명이 됩니다. 인간은 생명으로 살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몸에 지니며 존재합니다. 그 에너지는 죽는다고 금방 없어지지 않습니다. 일정한 형태로 남아있든지 사라지든지. 그 에너지가 강할때 형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혼령 즉 귀신이지요 그래서 퇴마사들은 귀신을 기의 유무로 판단하지요 이런 인간의 에너지 형태는 혼령의 모습으로 50년 정도 지속되기도 한답니다.

자연에서 보존되고 생성된 그 엄청난 에너지가 모든 생명들을 삶과 죽음에서 주관하고 관리합니다. 한마디로 신의 영역이죠.

.

그럼 인간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의문으로 넘어가겠죠. 우리는 학교에서 '진화'대해 배웁니다. 진화의 허구를 알게되면 한마디로 웃기죠.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하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어떤 형태로든 빨리 또는 천천히 변하여 그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물은 늙어 죽고 무생물은 형채가 변합니다. 그것이 진화죠..

그런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만물들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변하는 거죠 창조되지 않은 것이 진화된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닭이 먼저나 달걀이 먼저냐인데 닭은 닭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달걀을 낳는 것입니다. 진화에선 처음 만드어진것이 단세포인데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 졌을까요.. 스스로는 절대 아니죠 질소 산소 메탄.유기물등 여러가지가 필요했을것입니다. 모든것이 움직일때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스스로는 없습니다.

그 자연의 엄청난 에너지가 작용에 의해서 단세포는 창조되어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지요.

쉽게 말해 연필을 인간이 만든것이 창조이고 그것을 쓰는것이 진화겠죠. 창조되지 않은 것이 진화한다는것은 말이 안되죠.

인간의 생명탄생도 하나의 창조입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이 이루어 지지 않고는 탄생할수 없고 그런 창조적 행위가 있기에 탄생한것입니다 . 탄생한 생명체가 자라고 늙고 죽는 것이 진화죠. ..

그러나 엄청난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서 단세포든지 다세포든지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탄생한 종(種)이 다른 종으로 변하여 진화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핸드폰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변한다고 핸드폰이지 자동차는 될수 없듯이말입니다.

전 지금도 새로운 것이 탄생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끝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만들듯이 자연은 새로운 탄생을 지속하고 있지요.

그럼 그 에너지가 (하나님)이냐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에너지는 살아있고 무한의 힘을 지니고 있다 여겨집니다.

성경에는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生氣)를 넣어서 탄생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6일만에 모든만물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럴수도 있지요 (단지 시간 개념이 다를지?) 한마디로 창조되지 않은 것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본론으로 창조와 진화 또한 자연의 영역입니다.

성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형상을 묻자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자.(自然)이라고 했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때 불꽃의 형태로 나타나기고 했습니다

그럼 자연이 이다. 이런 결론이 도달하네요 하지만 전 자연이 이라기 보단 절대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는 에너지(生氣)가 자연을 움직이고 있기에 그 기(生氣)를 이라 부르고 싶군요.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어떤 형태로 어떤 힘이 작용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공기이든 물이든 불이든 전자파든 간에 그러나 어떤 지역이든 다른 언어든 어떤 환경이든 신은 그곳에 존재하고 그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공기없는 곳이 없듯)

태초부터 인간은 과 함께 했습니다.(솔직히 죽든지 살든지 신의 영역을 벗어날수 없죠.. 살면 생명의 형태로 죽으면 에너지로 귀속되죠)

두려움의 존재든 마음의 안식을 주는 존재든간에 인종.환경.지역을 막론하고 인간은 에 대한 경외와 존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온것이 인간삶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문명이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이 형상화 시킨 과 함께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종교의 기초를 보면 모두 자연으로 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직도 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 많은 인간이 당신보다 비이성적이고 무지하고 겁쟁이어서 신의 존재를 믿고 을 두려워 한것이 아닙니다. 님보다 더 많은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오만과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온지를 깨달으면..아니 지금이라도 옆산에 올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나무가 자라고 물이 흐르고 생명이 요동치는 모습을 보고도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군요. 눈과 귀을 열어서 자신의 교만을 낮추면 신의 존재를 의심할수 없습니다.

그럼 은 인간을 사랑할까요?
모든 생명은 신의 창조물 즉 자연에서 태어났죠 .다시말해 인간의 부모는 신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만들었다고 하면 맞는 말이지만 생명의 근원은 자연이죠 그러므로 이죠...)
당신이 부모에게 태어났다 하지만 몸을 구성하는 요소(물.유기물.산소)가 모두 살아 있는 에너지(생기)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의 일부 즉 신의 살을 떼어 만들었다 할수 있지요) 당신이 살면서 섭취하는 모든 에너지는 신의 한부분 입니다. 말그대로 이 만들고 키우고 당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내 몸이 신의 일부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신의 자식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어버이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비가 자식을 마음대로 자기 성에 차게 키울 수 있을까요. 인간은 성품이 다른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어떤 자식은 부모의 말을 잘 듣는사람도 속썩이는 자식도 있지요. 그래서 때론 매를 들기도 하고 칭찬도 하고 그러는 거지요 과 인간은 어미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럼 신은 인간을 사랑할까요? => 당연하지요. 부모의 자식사랑과 같다니까요.

그런데 사랑하는 인간에게 왜 불행과 악행이 끊임없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약육강식. 자유의지. 본능.. 그것이 자연스러운것이니까요..

그런데 신은 유일신일가요 그런데 성격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I 이라 하지 않고 we라 칭했습니다. 이렇듯 신은 스스로 복수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지 가정을 한다면 공기.물.불등)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성품과 형상대로 만드셨다 합니다.
다수의 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까는 알수 없지만, 인간 각 개인의 성품이 다르듯또한 각기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신의 힘이 작용한다면 세상에는 좋고 바쁜일들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럼 구원은 무엇일까요.
구원을 논하기 전에 왜 구원이 필요할까요.? '구원이 없으면 어때'하고 물으다면 난감하겠지요. 지옥에 가니깐 구원이 필요해. 라고 말하면 '지옥에 왜가'.라고 물으면 이런 설명은 어떨까요

신의 영역에는 알파와 베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선과 악이라 칭하고 싶진 않군요.

천사에겐 천국이 선이고 악마에게 지옥이 선이듯 상대적이니까요.그래서 악이 존재하기에 선이 존재 가치가 있는것처럼 선만 존재하고 악이 없다면 선을 선이라 할수 없죠 .

전기에 +와 -가 음과 양을 선과 악으로 구분할수 없듯이 이렇듯 어떤 힘에는 균형이 존재합니다. 그 균형이 유지될때 모든 에너지가 힘을 발휘할수 있는겁니다.불러스와 마이너스가 합치될대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정자와 난자가 합해질때 생명이 탄생하듯 신의 영역은 알파와 베타가 그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수 없는 시기에 이 힘의 균형이 깨집니다. (지금까지는 자연은 놀라운 능력(비.구름.자전축,바람)으로 힘의 균형을 지금까지 유지하고있습니다 ) 그런데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변모하든 분리되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의 균형이 깨지면서 생명체의 근간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합니다. 즉 구원은 생명(에너지)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이지만 사실 받은면 좋죠...) 한 예로 조금있으면 불타버리는 집에서 엄마 아빠 자식들이 있는데 아빠는 외출중이고 집에 있는 엄마가 여기 조금있으면 불이 날꺼니깐 나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믿고 먼저 나가는 자식은 죽지 않고 살것이고 그중에 아빠를 잘 따르고 믿는 사람은 '아빠는 그런말씀 안했어 무슨 불이 난다고 그래"하고 믿지 않고 남아있으면 불에 타죽는 개념하고 비습합니다. 비유적으로 세상을 집이라 하고 엄마 아빠를 이라 가정하면 ,불은 에너지의 균형으로 세상이 파괴되는 것이고 외출중인 아빠는 다른 신(구원을 말하지 않는 종교)이고 집에 있는 엄마(기독교)는 불이 날거라는것을 사실을 알고 자식들을 피신시키려 합니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식이 있을 것이고 불이 날 조짐이 전혀 없다고 불이 난다고 의심하지 않고 남아 있으면 면 타죽는 거죠 구원의 개념은 간단해요 그렇게 믿음의 차이죠. 그런데 아무도 그집에 언제 불이 날지는 모른다느게 좀...

장황하게 설명은 했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신의 개념을 형상화 하지 않고 자연처럼 넓게 확대 해석하면 그 존재가 분명 보인다는거.
구원은 선물이며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거

님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토마스 아퀴나스의 5가지 신존재 증명
  0  0     나도평가하기 최초작성자 : singamja    조회: 618   버전 : 1
지식편집자 : singamja (level 4)   |   2004-04-25 09:11 작성  
첫 번째 것은 "운동으로 부터의 증명”이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인식하며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다. 즉,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있을 것이다. “부동의 동자”가 바로 신이다.

두 번째 것은 “능동인으로부터의 증명”이다. 그 자체가 본래부터 능동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어떤 사물이 그 자체가 원인이 되려면, 자신보다 먼저 존재해야 되는데 이것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본질에 있어 알려져 있는 모든 원인이란 것은동시에 다른 원인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가능한 유한한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원인들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 이것으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제1원인을 필요로 하며, 이것이 바로 신이다.

세 번째 것은 “가능성과 필연성으로부터의 증명”이다. 관찰된 대상은 본질에 있어 우연적이다. 우연적이라 함은 대상이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물에 의존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대상들의 존재는 그들이 존재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이다. 이러한 계열의 존재의 가능성은 그 이외의 것에 의존하지 않는 필연적인 존재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 필연적 존재가 바로 신이다.
네 번째 것은 “자연의 위계에서 관찰되는 사물의 단계에 근거하는 증명”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은 다른 사물 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교적인 등급은 필연적으로 판단의 규정과 일치하는 절대 기준을 시사한다. 선함, 아름다움, 완전함 등의 기준은 바로 신이다.

다섯 번째 것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질서와 조화에 근거하는 증명”이다. 세계의 모든 일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맞는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질서의 조화를 운명이나 우연으로 돌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목적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는 한 지적 설계자가 있음을 지지하고 있는것이다. 그 설계자가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가운데서 처음의 세 가지는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 내지 세계의 몇몇 경험된 속성들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 들인 것이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논증을 목적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목적을 가지고 운동 혹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일이 없는 자연적 물체들도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요, 바로 그런 목적들은 우연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마치 화실이 궁수에 의하여 어떤 방향으로 겨누어지고 있듯이...(Summa Theologicae)" 지성을 가진 어떤 존재에 의하여 겨누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적인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신의 존재 증명
잼난 이야기 | 2005/11/23 (수) 08:14
 
신의 존재 증명 1

유신론자: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지전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정의와 모순 된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하지 않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신론자: 수미산은 무한히 높은 산이다. 수미산이 존재하지 않으면, 수미산은 무한히 높지 않지만, 그것은 수미산에 대한 전제에 어긋난다. 그래서 무한히 높지 않은 수미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수미산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론자: 이 것으로 신의 존재 증명을 마치겠습니다

무신론자: 당연하지.. 신은 수미산 위에 있으니...ㅋㅋㅋ


신의 존재 증명 2

유신론자: 그런 억지가 어디있소? 당신이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 해 보시오.

무신론자: 그래요? 벌써 증명 했어요. 당신 침대밑에 있는 마법의 보라색 용이 먼저 증거를 내놓았고요, 당신 머리위에 있는 투명 유니콘이 다른 증거를 내놓았습니다.

엉? 용하고, 유니콘을 보거나, 들을 수 없다고요? 제발 마음을 열고 그것들의 존재를 느껴보세요.. 에?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증거를 대세요^^ ㅋㅋㅋ


신의 존재 증명 3

유신론자: 사람이 눈을 뜨면 세상은 절대자의 질서, 자비로 가득 차 있다. 지구상의 산소가 사람이 필요한 만큼 주어진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힘들다.

무신론자: 또한, 사람의 다리길이조차 매우 신기하다. 만약 당신의 다리가 10센티만 짧았어도, 당신은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공중에서 유영할 것이다. 만약 당신의 다리가 10센티만 더 길었어도, 당신의 발은 바닥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다리가 지금 딱 이 길이인 것은,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거랑 다를 게 없구만...
 
신의 존재 증명 4
 유신론자: 모든 창조된 것을 거슬러 올라갈때 마지막 남는  더이상 창조될수 없는 그것을 이름하여 하느님이라고 이해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때,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입니다.

 
무신론자: 모든 것에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상상력의 빈곤일 뿐이라고 러셀이 말했습니다. 실제로 마지막에 남는 것 없이 무한히 원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만 상식적이고 이성적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관점도 정당성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어째서 원인 없이 존재하지 못할 것인가?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어째서 유일해야만 하는가?"
이 경우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입니다.

 

도덕론적 신존재 증명에 대한 논박
2005/11/10 오후 8:15 | W-Philosophy


도덕론적 신존재 증명에 대한 논박

신 상 형*안동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요 약 문
이 논문은 칸트이래 계속되어 온 신존재 증명의 도덕론적 논증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대표적인 논변들을 특징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비교를 통한 이 논변의 흐름의 차이를 현시하는 모색을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적 입장에 서서 그것을 적극 옹호하는 근대 철학자와 이를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현대철학자들을 대비시켰다.
초창기에 도덕론적 논증은 정치한 논리의 의미를 따지는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실천적인 근본원리 내지 실질적인 요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서는 대단히 첨예한 논의들이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 신의 존재를 확증 혹은 부정하려는 신실한 시도들로 제시되었다.
칸트나 라쉬돌과 같은 철학자는 신이 이성적으로 필연 내지 요청으로서 존재한다는 논증을 시도한다. 전자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는 지고선의 추구가 있고, 또 이것은 반드시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도덕이 등장한다. 후자는 그러나 칸트의 추구가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적인 설명을 하는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절대정신 안에 도덕이 자리를 잡는다고 설명을 하며, 성숙한 정신은 도덕을 하나의 객관적인 의무로 이해한다고 한다. 이런 논의들은 솔레이, 트루블러드 및 루이스에 의해 유신론적 논증으로 더 발전된다.
한편, 베일과 까뮈는 도덕론적 논증 신존재 증명 자체가 불가능한 논변임을 악의 존재를 들이댐으로써 증명하려고 한다. 전자는 전능한 신과 악의 존재의 갈등은 신의 전능과 악의 공존, 신의 인자와 그의 무력, 혹은 악의와 무력의 공존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신의 부재를 도출한다고 믿는다. 대신에, 까뮈는 페스트의 논의를 전개하면서, 의사와 페스트 및 신부의 3가지를 병렬시켜 신의 사랑과 대조하는 장치를 통해 도덕적 신의 존재를 거부한다. 이런 논증들은 힉과 푸케티 및 맥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이어지면서 한층 강화되는 모습을 띤다.
그러나 논의되는 모든 무신론적 논변의 내용과 신의 존재는 이른바 필연적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채 도덕론적 논증의 전형들을 부분적으로 비판할 뿐 결정적으로 붕괴시키는 데는 실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를 통해 도덕론적 논증은 아직도 논의될 가치를 가진 ‘실질적’ 논변이라고 여겨진다.

※ 주요어 : 도덕론적 논증, 신존재, 필연성, 요청, 최고선.

들어가면서

도덕적 신존재 증명은 윤리적 경험과 특히 동료 인간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책무감이 있는데, 이 책무의 원천이자 터전이 바로 하나님의 실재를 요청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도덕적 신존재 증명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체험을 깨닫기 위해 실천적 근본원리로서의 신을 가정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독자적인 자기 존재의 타당성을 투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도덕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면서 양심을 가지고 사는 한에서 인간이 비로소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칸트에게는 영롱한 빛으로 가장 분명하게 존재하는 별이 바로 도덕과 하늘의 샛별이었다. 나머지는 다 그것에 의해 존재론적 정당성을 판정 받는, 이를테면 별들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질서로서의 도덕별이 존재하려면 ― 그렇지 않으면 세계가 무질서해질 터이므로 ―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견해를 이어받은 여러 철학자들은 도덕의 개념을 다각도로 이해하면서 이 논증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발전시켜왔다.
이 논문에서는 몇몇 대표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려고 한다. 기술의 각도는 유신론적 입장에서 각각의 논의들이 어느 정도로 우호적인가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그들 진술이 얼마나 신학적 관점에 다가서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유신론적 인격성에 친화적인가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노골적으로 직시하는 진술의 형태를 띠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술 방식은 각 철학자의 핵심적 논증의 요점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쟁점의 차이점을 간결하게 노출하는데 중점을 두며, 각각의 논의들의 전모를 드러내는 모습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칸트의 증명부터 생각해 보자.


Ⅰ. 도덕적 필연성: 칸트 I. Kant

우선 언뜻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철두철미한 사색과 엄격한 생활로 소문이 나 있던 칸트가 어찌하여 신존재 증명을 하는 데는 ‘도덕’이라는 덜 명료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칸트는 엄정한 논리와 명확한 검증의 방법을 이상적인 철학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는데도 왜 굳이 도덕을 통해서 당시 학문의 바탕인 신을 증명하려고 했는가?
사실 칸트의 <비판철학>은 엄정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이 비판철학은 세 번의 전단계를 걸쳐 완성되는데, 라이프니쯔-볼프 철학기, 경험론 및 루소 철학기, 비판철학 준비기 등으로 구성된다. 첫째, 칸트는 자연철학에 깊이 몰두하여 뉴우튼의 기계적 역학에 동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물질과 생명을 문제 삼으면서 라이프니쯔의 단자론을 통해 형이상학적 실재를 고찰해서 㰡”형이상학적 인식의 제일 원리㰡• Principi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에 그 내용을 담았다. 이 책에서 칸트는 모든 가능성들의 바탕으로서 신을 가정하며, 이 신을 토대로 모든 실체가 존재하는데, 이 실체가 바로 라이프니쯔가 주장한 단자[모나드]이고, 또 시공간이 존재하여 단자들 사이를 이상적으로 질서 지워 준다는 것이다.
둘째로 칸트는 이 자신의 형이상학적 설명을 의심했다. 이것을 통해 과연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1764년에 쓴 한 논문에서 그는 형이상학에서도 방법론상 뉴우튼의 자연학적 방법처럼 확실한 경험에서 출발, 일반적 규정을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며 형이상학 구상에 회의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문제는 경험이 과연 자연학적 경험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㰡”심령 관측자의 꿈㰡•Traeume eines Geistessehers에서 심령계의 지식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인식의 객관성을 부인하였다. 대신, 그는 형이상학적 관심을 실천적 신앙으로서만 그 의의를 부여한다.
셋째로, 1760년대 말에 이르면 다시 이성을 기초로 한 형이상학적 수립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1770년에 쓴 그의 교수 취임 논문 㰡”감성계와 예지계의 형식과 원리에 대하여㰡• De mundi sensibilis atque intelligibilis forma et principii에서 칸트는 자연과학적 세계는 우리와 상대적 현상계이며, 예지계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物自體)>의 세계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제는 시간, 공간을 객관적 질서로 본 첫 단계와는 달리, 우리가 사물을 보는 순간 알게 되는 바탕 ― 직관 형식 ― 이라고 보았다. 뿐 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인식이란 오성이라는 순수한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감각적 요소는 전혀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관념론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데 그가 㰡”순수이성비판㰡•에서 보여주듯이, <물자체>의 세계는 감각적 경험으로는 알 수 없고 비감각적 직관으로만 파악되는 세계인데, 이런 직관이란 우리에게는 없으므로 그 물자체의 세계란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칸트는 물자체에 대한 인식조건을 실천적 신앙에 귀착시키게 되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적 요청을 기술하자면 이러하다. 인간은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 약간의 개념적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특징이다. 그런데 행복은 모든 일이 자기가 뜻하는대로 되는 합리적 존재의 조건이다. 이것은 따라서 물리적 자연과 자기의 전체적 목적의 조화에 달려 있고, 본질적인 자기 의지의 결정 원리와의 조화에도 달려 있다.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육신을 버틸 물질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이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물질이 충족되어진 사람이라도 자기가 목표로 하는 인생의 방향이나 삶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행복하다고 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인생을 행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의무인 도덕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저 유명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정언명법이 가리키는 것 같이, 칸트는 인간을 도덕의 필연적 주체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사람이 도덕적이지 못할 때 그는 한 주체성을 잃게 되고,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데 실패하게 된다. 부도덕한 도덕 파탄자의 삶은 한 개인의 실패를 넘어 한 사회나 국가의 패망을 가지고 오기도 하는 것은 칸트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칸트의 㰡”실천이성비판㰡•에 따르면 그러나 인간의 욕구인 행복과 인간의 의무인 도덕이 통일을 이룰 때 소위 최고선 summum bonum을 이루게 된다. 이제 자유 법칙인 도덕법은 자연 및 우리 욕구 능력과 자연의 조화와 아주 독립적인 원리들을 결정함으로써 명령한다. 그러나 세계 내에서 활동하는 합리적 존재는 세계와 자연 자체의 원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세상에, 부분으로서 세계에 의존하는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뜻에 의해서, 이 자연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또 행복에 관한 한 실천 원리들과 무관한 도덕법 상의 토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이성의 실천적 문제, 즉 필연적인 최고선의 추적에서 그런 연결은 필연적인 것으로 요청된다. 즉 우리는 최고선, 즉 틀림없이 가능한 최고선을 고양시키도록 애써야 한다. 따라서 모든 자연 즉 자연 자체와는 다르고 예컨대 행복과 도덕성의 정확한 조화의 원리를 포함하는 원인의 존재가 또한 요청된다. 이 최고 원인은 자연과의 조화의 원리, 합리적 이성의 법칙 뿐 만 아니라, 합리적 존재들이 그것을 의지의 최고 원리로 만드는 한 이 법칙의 개념과의 조화, 따라서 도덕과의 형식 뿐 만 아니라 그 동기가 되는 도덕성과의 조화의 원리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도덕적 특성에 대응하는 인과성을 가진 최고 존재를 가정할 때라야 어떻든 가능하다. 법칙들의 개념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의 지성의 존재이고, 이런 법칙 개념에 따르는 그런 인과성은 그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의 조건으로서 전제되어야 하는 자연의 최고 원인은 지성과 의지에 의한 자연의 원인이며, 따라서 그것의 저자인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도출된 최고선(최선의 세계)의 가능성의 요청은 시원적 최고선의 실재, 즉 하나님의 존재의 요청이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 우리가 최고선을 촉진시키는 것은 하나의 의무로 생각되어진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최고선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수용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필요조건으로서 의무와 연결된 하나의 필연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이것의 전제는 의무와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다시 말하면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최고선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할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규범이나 당위가 있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것을 할 자유가 있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또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는 당위나 의무는 전혀 부과될 까닭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무와 욕구의 통일인 최고선은 지고의 선으로서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유한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미 밝혔듯이, 인간의 인식 능력이 경험 세계에 해당하는 현상계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최고선의 영역인 예지계의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물자체의 세계를 포함, 모든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므로 이러한 통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힘이다. 또 이러한 통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영혼 불멸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실천에 의한 이성적 의지 결정에 있어서 이성은 감성의 제약을 받지 않고 무조건적 명령을 내리고 이성의 의지로서 발동한다. 여기에는 자연의 인과성을 넘어선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실천적 경지에 이르러 우리는 도덕적 노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지상의 과제를 넘어서는 과제를 느끼면서 영혼의 불멸 또한 느끼기 때문이다. 또 도덕적으로 선한 의지가 이 우주의 무한한 힘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궁극적으로 덕행과 행복이 합치된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품게 되며 스스로 최선, 전능의 주재자인 신의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칸트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의 의도와는 달리 정당한 하나의 논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성적 필연성을 띠지 않고, 단지 도덕적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요청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칸트의 의도와 달리 만일 그것이 합리적으로 증명된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 최고선이 성취된다는 것은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최고선에 대한 정의부터가 모호하고 또 그 방향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도덕법칙의 당위성은 그 자체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 특히 개신교 신학자들은 인간이 신 혹은 율법의 요청들을 다 수용하고 실천할 수 없으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칸트의 주장과는 반대로 의무와 욕구가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쾌락주의자나 공리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의 의무는 바람직하거나 유쾌한 것을 행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의 논증은 오직 사람에게 신과 영혼 불멸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증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관적 존재로서의 도덕률은 개관적인 것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Ⅱ. 객관적 도덕률: 라쉬돌 H. Rashdall

라쉬돌은 도덕률의 객관성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성이 있으며, 그것은 도덕적 이상으로서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절대이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상(理想)들은 가슴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 즉 사상들은 사상가들의 마음에만 존재하며, 그 어느 다른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절대이념들은 (상대적인) 개인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정신 안에만 있다. 따라서 절대적 도덕이상이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서 하나의 절대정신을 요청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절대적 개념으로서의 도덕 이념의 객관성을 옹호하면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첫째, 도덕은 보통 객관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성숙된 정신은 도덕을 객관적 의무로 여긴다. 셋째, 도덕적 객관성은 이성적으로 필연적 요청이다. 넷째, 실천상 객관적 도덕 이상들을 요청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기준에 따라 만일 도덕률이 객관적이면서 개인의 마음에서 독립된 것이라면, 유한한 인간 정신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절대정신 속에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도덕률의 객관적 설명을 위해 절대정신을 요청하는 것은 필연적인 셈이다.
트루블러드 Trueblood는 라쉬돌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 전개한다. 첫째, 객관적인 도덕률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우선 도덕률의 의미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한 집단이나 사회는 혼란을 맞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진지한 어떤 윤리적 논쟁도 없고, 상대주의에 빠져 각각의 경우에 각 행위는 정당화되는 혼란을 빚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윤리적 판단도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 해석될 것이다. 동시에 각 유형에 대한 둘 이상의 입장은 서로 모순되기 쉬울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상 사회 혼란기에는 이런 객관적 도덕률의 이해에 대한 혼란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둘째, 한 도덕률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개인과 전 인류의 차원을 넘어선다. 첫째, 개인들은 종종 자신들이 도덕률과 충돌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연인으로서 한 개인은 때때로 도덕률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둘째, 전 인류는 집단적으로 도덕률을 결여하고 있으나, 또 도덕률을 갖고 인류의 발전을 점검한다. 예컨대 <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각 민족은 고유문화를 갖고 있다.’ 와 ‘그 나라는 문화국가이다.’라는 표현에서는 각각 다른 의미로 다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도덕률은 하나의 도덕적 입법자에게서 유래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법칙의 출처가 마음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어디에서도 법칙의 존재가 가능한 영역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인격 속에 불성실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달리 말해서, 불성실이 없는 마음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평가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마음과 마음이 진리와 만남이 아니면 무의미하다 그래야 비로소 인격이 그것을 지향하고, 그것에 의해 평가받고,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도덕률의 의무와 그것의 발견은 배후에 정신이나 인격이 있어야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주체 없는 행위만이 있다는 모순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률 배후에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적 정신 ― 즉, 신 ― 이 있어야 된다. 이렇게 될 때 신이 배경이 되는 도덕은 마치 태양과 비가 모두에게 골고루 내림같이, 모든 이에게 도덕은 보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Ⅲ. 보편적 도덕률: 루이스 C. S. Lewis

루이스는 라쉬돌이나 쏠리 W. R. Sorley의 입장에 포함되겠으나 자신의 입장을 좀 더 독창적으로 전개시킨 부분이 있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첫째로 하나의 도덕률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의 결과가 초래된다. 도덕률이 개별적이라면 그것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기준도 마련하지 않은 채 하는 논쟁은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도덕적 비판들은 그 자체로 소모적이다. 예를 들어, 나치가 나쁘다고 하는 따위의 이야기들은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할 것이고, 반면에 인간성 존중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이 제시될 수 있기에 거기 비추어 나치의 만행은 규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개인간 약속이나 국가간의 조약 등도 보편적 도덕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무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도덕률은 군중심리와는 다른 것이다. 사실, 강력한 충동은 항상 승리할 것 같지만 역사상 이와는 오히려 반대가 된다. 왜냐하면 도덕률은 때때로 약한 충동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때 잘 실현되는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언뜻 본능적으로 행동할 것 같으나 본능을 거스려 행동한다. 심지어 본능들이 항상 옳은 것 같으나 그렇지 않는데, 예컨대 모성애와 애국심 등도 비뚤어질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관습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우선 습득했더라도 모두 단순한 사회적 관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 심지어 자주 배우고 연마한 것이라도 습득은 되나 사회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와 독립적으로 타당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도덕적 진보에 대한 판단은 그 가치판단의 기초가 인간 사회와 독립적이어야 의미가 있다. 이 말은 도덕적 판단이 상황 윤리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도덕률은 또 자연법칙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루이스는 주장한다. 도덕률은 ‘~이어야 한다’는 규범 언어인데 비해 자연법칙은 ‘~이다’로 사실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선해야 한다.’는 언술과 ‘지구는 공 모양이다.’는 언술의 문장은 그 성격이 다르다. 또 동일한 상태를 결과로 맞더라도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상이군인이 버스에서 구호금을 받더라도 그것을 주는 사람이 기꺼이 주는 경우와 상이군인이 위협해서 받게 되는 경우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질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더 편리한 상황이 덜 편리한 상황보다 간혹 도덕적으로 더 나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연히 장님을 부딪혀 넘어지게 한 경우보다 일부러 그를 쓰러뜨리게 하려다가 실패하여 결국은 장님이 넘어지지 않은 경우가 더 사악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것이 전 인류에게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것이 나에게 보상을 하지 않을 때 내가 그것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즉 어떤 것이 비록 나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그것을 해야만 하는 어떤 보편적인 의무 아래 있지 않다면 더욱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도덕률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공상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각각 그것을 제거하고 싶더라도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상은 그것의 주체가 원한다면 언제나 소멸되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도덕률은 도리어 전혀 한 개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리하게 생각되어질 경우가 많다. 도덕률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쨌건 <밖에서부터> 온 것이다. 그 내용의 수정 개폐 여부도 사실 규약에 의해서건 호기심에 의해서건 전혀 불가능한 것이 도덕률의 특징으로 보인다. 이것이 없이는 가치판단들도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값어치의 출발점은 도덕률에 있는 것이므로, 출발점은 다른 곳인데 목적지가 거기에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률을 이해하는 데는 인간이 중심이 된다. 루이스에 따르면, 규정적 당위성은 단순 서술적 존재 대상에서는 나올 수 없다. 이 말은 단순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만물들에게서 당위성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그들에게서 그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도덕률의 원천은 자연법칙보다 인간의 마음의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설계자는 자신이 설계하여 만드는 것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도덕률의 원천은 단순히 서술적인 과학적 우주에 속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루이스에 따르면, 마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 바깥에 있는 절대 완전한 힘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 명령을 제시한다. 그 존재는 이 명령을 지키는 우리의 행동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가 없다면, 옳다는 이유로 공허하게 우리 삶 전체가 희생될 수 있으며, 그래서 모든 도덕적 노력은 결국 무익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정당성의 원천은 절대적으로 선해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선의 기준이라야 비로소 완전한 선 자체에 필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루이스의 중요한 적은 프랑스의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은 도덕률의 존재를 자연의 내재적인 생명력으로 설명하는 소위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주는 위안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생명력이 분투하고 의도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실 도덕론적 논증이 주장하는 일종의 절대정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적 논증의 세 가지 유형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도덕적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의 이면에 그 법칙의 주제자인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존재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악의 존재를 들어 반대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도덕론적 논증을 통해 신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주장을 살펴 보자.


Ⅳ. 도덕적 딜레마: 베일 P. Bayle

베일에 따르면, 도덕적 논증에는 굉장한 딜레마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전능하고 전지한 신이 있는데 왜 신의 속성과는 모순되는 악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 ―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 은 신의 전능성 혹은 전선성을 경험하는 것은 어려운 반면, 악 ― 도덕적이건 존재론적이건 간에 ― 의 존재는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 불공정한 일 혹은 선인들의 불행 등은 우리에게 악의 존재가 우리 주변의 현실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을 베일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 했다:
1)악은 존재한다. 2)전능한 신은 악을 파멸할 수 있었다. 3)인자한 신은 악을 파멸할 수 있다. 4)그런데 악은 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에 대한 결론의 의미를 이렇게 제시해 볼 수 있다. ㄱ)신은 전능하므로 다소 악의가 있다. ㄴ)신은 인자하므로 다소 무력하다. ㄷ)신은 악의가 있고 동시에 무력하다. ㄹ)신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언뜻 유신론적 신존재 증명을 결정적 위기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에서 이런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먼저, 신은 악을 박멸할 어떤 계획을 따로 갖고 있으며 또 이를 실행하는 중일 수 있다.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더욱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어떤 다른 계획을 갖고 있다는 한에서, 이런 주장은 가능하다. 그리고 악을 묵인하는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선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악은 도리어 선을 더 크게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악으로 보이는 작은 것이 보다 큰 선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시간 공간상 미완성의 것은 어느 것을 고정된 것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악을 박멸하는 것이 신의 속성 ― 자비 ― 자체에 모순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전지 전능한 신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원리에 충실하여 자체 모순은 범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하는 것이 반드시 전지전능한 신의 속성을 따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는 섣불리 한 두 마디로 주장할 바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 속에서 보면, 악의 존재와 신의 존재 특히, 한 속성 ― 자비 ― 을 절대화시켜 다른 어떤 속성의 상대적 가능성은 비워둔 채, 오로지 그것을 존재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여러 가지 논리적 오류를 빚을 수 있다. 한 실체에 부속되는 수많은 속성, 심지어 모든 속성이 신의 존재 증명에 역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관계로 성립될 뿐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증명에서 보았듯이, 속성은 결단코 존재와 직결시켜 이야기 할 수가 없다.


Ⅴ. 잘못된 유신론: 까뮈 A. Camus

까뮈의 눈에는 베일리의 논증은 매우 구체적으로 다가온 신존재의 반증이었다. 그는 㰡”페스트㰡•에서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쥐가 전염시킨 페스트 병에 무구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을 언급하면서 유신론적 논증에 대한 반역을 시도한다. 첫째, 주민들은 의사와 합력하여 페스트와 싸우던가 아니면 신부와 합력하여 페스트에 걸리던가 해야 한다. (만일 페스트를 내린 것이 신이고 또 이것을 받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둘째, 의사와 합력하여 페스트와 투쟁하지 않는 것은 반인본주의적이다. 셋째, 그런데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것은 그것을 내리신 신께 대항하는 것이다. 넷째, 그러므로 인본주의가 옳다고 여겨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유신론/신본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선 까뮈의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리고 인본주의가 옳다면 전적 사랑의 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악의 원인이 되므로 반대해야 한다. 반유신론적 논증은 이런 기본형을 수반한다. 이 주장을 좀더 자세히 음미해 보면 약간 다른 접근을 할 수 있다. 예컨대 여기에서 유신론과 인본주의가 페스트를 두고 완벽하게 모순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페스트를 수용하는 것은 유신론이고 반면, 페스트를 배척하는 것은 인본주의라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가 좀 더 짚어져야 한다. 그리고 의사, 주민 및 신부와의 관계는 신의 뜻을 중심으로 서로 뭉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모색 불가능한 것인가? 이런 질문도 이전 질문이 만일 긍정적으로 풀린다면 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사람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는 것>이 페스트를 퇴치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전능, 전선의 섭리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논리가 가능할 경우에만 까뮈 식의 담론은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유신론과 반신론의 대치적 상황 설정이 모순율의 관계에서 설정되고 있는가를 짚어 보아야 한다. 의사와 신부의 관계가 정확히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대표되는 경우인가? 이것은 까뮈가 살고 있던 시대적 상식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단히 한계를 갖는 개념의 병렬이다. 모든 의사가 무신론자일 수도 없지만, 모든 신부가 창궐한 전염병의 감염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 자연스러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또 페스트의 치료가 반드시 의사를 통해서 가능한다 하더라도, 그 예방 활동은 의료적이기도 하면서 또한 신앙적이기도 한 환경의 여건을 생각할 수도 있다. 게으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들도 해야 할 노릇이므로 청결을 통해 쥐의 접근을 간접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예방의학 차원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식으로 통하는 방편이다. 이 경우는 비록 ‘의사-신부’의 공식이 성립하는 상황에서도 중립적인 혹은 중복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저 비유의 상황은 까뮈의 의도대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해석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Ⅵ. 그 밖의 반유신론적 논증의 형태들

푸케티 Ronal Pucceetti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에게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댈 수 없는 모든 견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신론자들은 전지, 전능 그리고 전적 사랑의 신이 순진무구한 자 ― 어린 아이 등 ― 를 고통 당하게 할 그럴듯한 이유를 하나도 댈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푸케티의 주장은 두 가지의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결백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지, 전능, 전선하신 신은 결백한 자가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실 푸케티의 주장은 유신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치명적인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인이 신의 전지 전능을 말하면서 아무리 그의 사랑을 예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전지, 전능, 전선을 동시에 만족시킬, 즉 불신자의 입장에서 수긍할 만한 예가 될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 이것은 유신론자들의 다음과 같은 답변에서 읽을 수 있다.
첫째, 불완전한 인간이 전적으로 완전한 신을 논리적으로 반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신의 논리가 인간에게 불완전하게 비치는 것 중에는 신이 순진무구한 자의 고통과 그의 사랑의 논리가 조화될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순진무구한 자의 고통은 전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동일하지 않다. 즉, 외부의 모양이 같다 해서 모든 내적 메커니즘까지 같다고 보는 것은 사태의 심층을 바로 보지 못하는 누를 범하는 것이다. 현대의 한 사조인 <논리실증주의>에서 보듯이, 모든 사태를 물리적 사건으로 환원시켜 이름표를 붙이듯이 하는 검증은 ‘성급한 보편성의 오류’(어린아이가 전화 카드, 은행신용 카드 … 을 하나로 보듯)를 범하게 된다. 셋째, 순진무구란 신에게 속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한 판단이므로 반드시 순진무구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깨끗한 사람이라고 도덕적으로 반드시 전적으로 청결한 것은 아니다. 순진무구라고 굳세게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넷째, 완벽하지 않을지 모르나 무신론적 반론에 대한 답변들이 신의 전능성, 전지성 및 사랑과 관련되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자에 의해 좀 더 정치한 반유신론적 입장은 끊임없이 제출되고 있다. 한 가지를 더 살펴 보자.
맥키 J. L. Mackie는 이렇게 주장한다. ‘전능한 신은 악을 제거할 수 있었고, 사랑의 신은 악을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악은 제거되지도 중지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신은, 전능하면서 사랑하는 자가 아니든가, 악을 중지시킬 수 없었으므로 전능하지 않거나, 아니면 중지시키지 않았으므로 사랑이 없거나 이다.’ 매우 논리적인 이런 주장도 다음과 같은 유신론적 반론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신은 악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전능한 신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둘째, 악은 없어지지 않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셋째, 악은 어떤 이유에서든 세계의 보다 큰 선에 항상 필수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가능성들이 배제될 수 없다면 신존재에 대한 도덕적 반증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나오면서

지금까지 논의에 대한 정리를 위해 우리는 노먼 가이슬러 Norman Geisler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합리적으로 불가피한 논증은 제안된 일이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 도덕률은 없는데, 그것은 하나의 심리학적 투사나 사회적 관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객관적 도덕률은 있으나 그 도덕률을 입법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신을 부정하는 어떤 도덕적 논증도 제안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악이 ‘더 큰’ 선을 위해 허용되고 있다는 주장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반신논증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오히려 유신론적 증명으로 역류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유신논증이 객관적 도덕 법칙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우주론적 논증의 전제에 의존하게 된다. 즉 유신론적 도덕논증은 불합리한 우주나 인과성이 적용되는 우주에서는 확실한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도덕적 논증은 우주론적 논증의 타당성이 밝혀지고 나서야 성립된다.
이 말은 도덕적 신존재 증명이 그 자체로 엄정하게 따져질 수 없는 제이차적 논증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 당위성을 두고 벌이는 유신론적 논증과 반신론적 논증은 모두가 담론의 영역이 부분적으로 겹치는 것이 있기는 해도, 양쪽이 다 일면을 주장하는 진술을 가지고 전체적 긍정 내지 부정을 이끌어 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덕적 당위의 문제는 끝없이 회귀되는 선결 문제의 오류를 물고 있다. 뿐 만 아니라 반신론적 주장들은 유신론적 재반박의 여지를 끊임없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논증 혹은 반증의 특징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합리적 접근의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부터 ‘뜨거운’ 신앙의 기반에서 선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교의의 문제이지, ‘차가운’ 합리성의 부지런한 모래성 쌓기는 아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도덕에 대한 칸트의 차가운 이성적 요청의 성 쌓기가 신존재를 위해 그렇게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수많은 논변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이 '신' 증명할 수 있나
신의 존재 증명은 과학으로는 무리…신앙의 영역으로 다가가야

 

황규학(GUIHAG) [조회수 : 506]

창조과학자들은 진화론 대신 정상 과학의 권좌에 오르기 위하여 과학적 실증과 도구를 최대한 이용해서 하나님에 대해 연구한다. 그러나 학문적 방법에서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즉 과학은 과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과학 외의 영역을 실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첫째, 계획성과 목적성에 의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알아보자.

창조과학자들은 초자연적 지성의 존재를 아퀴나스의 신 존재의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추론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우주론적인 논증 방법이다. 창조론자들은 자연법칙의 질서정연함과 우주의 신비함과 생명의 경외스러움을 볼 때 신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계획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계획성과 혹은 목적성에 의한 신 존재 증명 방식으로 자연세계나 인간들은 어떤 목적이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사물을 질서있게 계획하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향하게 해주는 어떤 초자연적인 지성의 존재가 있는데 이를 신(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계획성·목적성·인과론의 한계

근대에 들어와서는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가 그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이 논증을 제기했다. 페일리는 시계에 관한 유추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사막의 한 가운데서 시계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우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볼 수 없고, 누군가 목적성과 계획성을 갖고 설계한 지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계획성에 의한 논증을 오존층에까지 적용한다. 오존층이 강렬한 태양의 자외선을 걸러내어서 지상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조정해주는 것을 볼 때, 오존 가스층이야말로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유력한 재료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새의 날개는 공기에 맞도록 계획되었고, 지느러미는 물고기에 맞도록 설계되었고, 인간의 두뇌에는 수백만 개의 세포가 서로 협동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인간의 눈은 고도의 색 분별감을 가진 자동식 렌즈를 가진 영화 카메라처럼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연이나 자연의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지적 존재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신(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그의 저서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설계된 것같이 보이게 마련이다. 안정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생물은 질서와 적응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와 같은 사실은 어떤 계획과 목적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게끔 된다는 것이다.

둘째, 흄은 세계를 시계나 집과 같은 하나의 인조물과 비교하는 것은 유추론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을 창조한 설계자를 유추해낸다 하더라도 그 설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보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자연세계에 정밀한 어떤 질서와 법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식과 지혜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획성과 목적성에 의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 방식에는 한계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 인과론에 의한 하나님의 존재증명 방법이 있다.

인과론에 의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아퀴나스의 우주론적 증명의 두 번째 방식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방법을 가지고 자기들이 신뢰하는 과학의 구체적 예를 들어 인과론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밝히려고 한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의도는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 근거에 대해서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 구체적 예로 창조과학자들은 열역한 제1법칙을 증거자료로 내놓는다. 열역한 제1법칙은 총질량불변의 법칙을 말한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즉 에너지는 그 자체의 형태는 변화될 수 있지만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 나무를 불로 태워 재밖에 안남더라도 태우기 전과 태운 뒤의 질량은 똑같다는 것이다.

자연계의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총량은 항상 똑같다. 유명한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해서 "이 법칙은 과학자들이 이끌어낼 수 있는 법칙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왜 에너지가 보존되는지 근원적으로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창조과학자들은 결국 인과의 법칙으로 원인을 추적하면 근원적인 제1원인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열역한 제1법칙을 가능케 했던 에너지의 궁극적 출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창조론자들은 인과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고 있다. 인과론에는 생성인과론(generative theory of casuality)과 계기인과율(succession of casuality)이 있다. 생성인과율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인과율로 원인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능력으로 간주되며 그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계기인과율은 원인은 보통 어떤 상태나 사건의 앞에 오는 것으로 그 뒤에 그런 결과가 오리라고 기대하는 심리학적 경향을 획득하는 까닭에 그것에 대한 원인이라고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생성인과율에서 보면 원인과 결과는 서로 독립적이 아니며 결과는 원인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계기인과율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려는 것은 한 종류의 사건과 다른 종류의 사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주로 전자를 지지한다. 그러나 생성인과율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신의 존재는 신앙의 영역

그것은 인과법칙을 이제는 단순히 통계적인 확률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과 둘째는 흄이 주장하듯이 인과법칙을 단순히 생성인과율로서만 보지 말고 계기인과율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에너지의 제1원이 하나님이란 것은 단순히 으레 그렇게 생각해 온 것으로 심리적 경향을 띠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인과율에 의한 하나님의 존재증명 방식도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인 실증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 증명 방법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증명 방법이 과학의 영역을 넘어 형이상학적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이라는 영역 자체가 과학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영역에 속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은 과학의 영역이 있고,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있고 신앙은 신앙의 영역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성서의 주장을 믿는 우리의 신앙에 있기 때문에 과학적 실증 방법이나 철학의 형이상학적 방법으로도 그분의 존재 증명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창조과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황규학 / 목사, 에큐메니칼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