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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애가 1:12_11/4 용산 화상경마장 이전 촉구 기도회 설교/ 김춘섭 목사님)

DoDuck 2016. 11. 15. 17:42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애가 1:12)

 

 

전철을 타면 앉을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아줌마 자리 잡기라고 했지만, 요즘은 아줌마 못지않게 실력을 발휘하는 젊은이들이 보이기에 아예 천천히 탑니다. 자리가 나도 앉지 않는 곳은 임산부 자리입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은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저는 어느 정도는 되어가는 나이인지라 노약자석에는 가끔 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더 나이가 많은 분이 오면 자리를 비킬 준비를 하고 앉습니다.

 

세월호의 기억

 

어느 날은 그렇게 앉아서 가는데 저보다 열 살도 훨씬 더 들어 보이는 점잖은 남자분이 옆 자리에 앉으면서 제 배낭에 매어 있는 노란 리본을 보더니 아직도 그런 것을 달고 다녀요?”라고 했습니다. 특별한 억양인지라 이북에서 내려 오셨군요.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6.25 전쟁 기억이 나시겠습니다.” 하고 말을 붙였습니다. “기억이 나다 마다겠어요. 부모님을 두고 내려왔는데, 당시 열두 살이었어요라고 하면서 “60년도 더 지났지만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저도 한마디 했습니다. “저도 제 손자손녀를 세월호 사고로 잃었습니다라고 했더니, 놀라면서 둘을 한꺼번에 잃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죄송하지만 제 마음에는 전부 제 손자손녀요, 모두가 아들딸로 생각되어 아직 달고 다닙니다. 특히 아직도 바다 속에서 해가 몇 번이 바뀌도록 찾지 못한 시신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남의 이야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 자식이라면 돈으로 보상받고 그냥 끝내려 하겠습니까? 왜 그렇게 침몰할 수밖에 없었는지 밝혀진 것이 있습니까? 그 일로 인하여 처벌 받은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제주 해군 기지에 쓸 철근 4백 톤이 어떻게 실렸으며, 왜 학생들을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는 선장부터 탈출했는지, 침몰의 원인과 구조하지 못한 모든 이유를 명백히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그런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유족들의 뜻을 함부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까지 유족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냥 잠잠하게 있어야 합니다.

잊지 말자는 것은 무슨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그렇게 모질게 굴지 않았습니다. 남을 저주하거나 해코지도 못하고, 반만년 동안 외세의 침입을 받으면서 꿋꿋하게 견뎌온 민족입니다. ()도 가슴 속에 그냥 새겨두었고, 넋두리나 노래로 달랬던 민족입니다. 제가 20여 년간 목회 활동했던 괌 주변의 마이크로네시아 섬들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때 징병과 징용과 정신대로 끌려와 처참하게 죽어갔던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습니다. 만났던 나이 많은 원주민들 중에 우리의 선조들이 고난 속에서 죽어가면서 불렀던 민요 아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어떤 이는 이 아리랑을 두고 거 봐라, 얼마나 못되었는가! 자기를 버리고 가는 님을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라고 노래하지 않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시다라는 존칭에다가 자까지 그대로 붙이고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는 ㅇㅇ라고 해야 속이 좀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십리도 못가서 다음에 붙일 저주스런 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붙이면 좋을지 한 번 붙여보십시오. 그런데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았던 역병이나 염병도 아니고 왜 발병이겠습니까? 딴 데는 다 멀쩡하고 발만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십리도 못 갔으니 다시 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발병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멈출 수 있으니까요. 곧 가지 말라는 노래입니다. 가봐야 발병 나서 거기 멈출 것이라는 미련을 담은 착하디착한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아픈 눈물

 

시위 현장에서 물대포에 맞아서 넘어져 의식을 잃고 317일 만에 숨을 거둔 고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이 내일 치러집니다. 그분의 삶을 보면 우리가 따르지 못하는 대단한 면이 많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종합관 입구에 학생회에서 그분의 영정 사진을 놓았습니다. 강의가 있는 매주 목요일이면 이곳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갑니다. 좋은 분이었습니다. 영정사진에서 보이는 인자한 웃음 그대로입니다. 특히 우리 밀 살리기에 많은 힘을 쏟은 분입니다. 전국을 다니며 우리 밀 씨앗을 구했습니다. 24Kg의 씨앗을 종자로 삼아 지금은 2만 헥타르의 땅에 우리 밀이 자라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분이 시위 현장에 뛰어든 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인물들이 이런 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떤 이는 그분은 실로 한 알의 밀이 되어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아픈 현실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레미야애가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유다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는 시입니다. 절망적인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한 가운데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된 날을 기억하면서 이 애가를 읽었습니다. 가슴 아픈 날을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일을 더 이상 겪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죄악으로 멸망당한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Jeremiah)는 비탄(jeremiad)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는 눈물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도성 시온의 성벽아, 큰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려라. 쉬지 말고 울부짖어라. 네 눈에서 눈물이 그치게 하지 말아라. 온 밤 내내 시간을 알릴 때마다 일어나 부르짖어라. 물을 쏟아 놓듯, 주님 앞에 네 마음을 쏟아 놓아라. 거리 어귀어귀에서, 굶주려 쓰러진 네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그분에게 손을 들어 빌어라.”(2:18~19)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오늘 우리의 형편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아픔이 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쟁으로 몰아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돈 많은 것도 실력이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얼마나 끔찍한 말인지 모르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그대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세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벌어지는 끔찍스럽고 힘든 일들이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1:12)!” 예레미야처럼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일들이 그대와 관계가 없는 일입니까?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관계가 없습니까?

이태째 화상경마장 이전 촉구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이 소중한 일입니다. 여기만이 아니라 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목회라는 일이 전면에 서는 데 지장을 줍니다. 두 가지 다 잘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공감이라도 표현하고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기도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하는 일에도 최소한의 시간을 내어 참석하고 있습니다. 제 능력이 다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지금까지 흘러왔고,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지만 파국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 잘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비관적으로 보는 자들은 다르게 봅니다. 이미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일어났고, 수많은 생명들이 처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들, 극심한 굶주림과 난민들 소식이 있습니다. 원자폭탄도 이미 수차례 사용되었으며, 앞으로도 사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합니다.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인간이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미 왔다고 합니다. 악은 점점 더 활개를 칠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낙관도 비관도 삼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낙관적인 눈도, 비관적인 눈도 가지지 않습니다. 다 삼켜버리고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집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서 슬퍼해야 할 때 함께 슬퍼하고, 울어야 할 때 함께 웁니다. 그리고 행동해야 할 때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멸망을 향해 가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라고 외치면서 눈물 흘렸던 예레미야의 그 마음을 다시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33)”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뒤를 다시 바라봅니다.

 (114일 용산 화상경마장 이전 촉구 기도회 설교: 김춘섭 목사)

 

 

*지난 주일(11/6)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좋은교회의 박찬길 목사님께서 말씀전해주셨습니다.

   

 


출처 : 평화를 만드는 교회
글쓴이 : 샬롬김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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