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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예수님은 좌파인데, 목사님들은 우파인가 ?"

DoDuck 2015. 11. 9. 10:10

저는 몇번 언급드렸다시피, 기독교에 관심이 많고 실제로 매주 교회에도 나가지만 그다지 믿음이 깊지 않은 반쪽짜리 신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심을 가진 분들을 이해도 하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느끼고 세상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만, 과연 그 신의 이름이 여호와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없어요.  그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해야 이번에 쓰는 글에 대해 오해가 없겠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물론 정식 신학 공부를 하신 신부님들이나 목사님에 비하면 어림도 없겠습니다만, 믿음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개신교 신자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읽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한가지 예만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부터의 내용은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진 두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둘다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한 악당인데, 그 중 하나는 죽어가는 순간에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deathbed conversion'인데, 그래서 불신자들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만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 이전에는 아무리 악당으로 살아도 천국행 티켓 걱정은 없다' 라고 빈정대기도 하지요.  아무튼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같은 장면을 그린 마태복음 27장 38절부터의 부분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 매달리신 예수님 양편에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강도가 예수님을 함께 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히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합니다.  왜 같은 성서에 서로가 모순되는 사실이 적혀 있을까요 ?  (참고로 이런 점에 대해 여쭈어 보면, 대부분의 열혈 신자들은 '너의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 라고 답합니다.  감히 목사님과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무릎 꿇고 기도부터 하자고 하실 것이 겁나서 그랬어요.)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신앙심이 전혀 없을 때 제가 받은 느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초기에 그냥 사실 그대로 쓰였는데, 누가복음은 더 뒤에 쓰여져 이런저런 픽션(?)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실은 이번에 읽은 책 레자 아슬란의 '젤롯 (Zealot)'에서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결론을 얻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제 주변의 일부 열혈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런 제 나름대로의 해석에 펄쩍 뛰십니다.  성서는 사람이 제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에 따라 쓰여진 것이므로 어느 글자 하나도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게 된 지금도, 저는 그런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반쪽짜리 신자인가 봐요.  그래도 지금의 저는, 모세가 홍해를 둘로 갈랐다는 것이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또 골고다 언덕의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을 찬양했건 욕했건 그런 역사적 사실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의 어느 독실한 신학생이 유럽 어디론가 신학 유학을 가서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차 목사가 될 독실한 신학생들로 가득찬 그 강의실에서 신학 교수님이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실제로 믿는 사람 손들어봐라' 라고 하니 유럽 출신 백인 학생들은 아무도 손을 안드는데, 자기만 손을 들더랍니다.  그러니까 그 신학 교수님이 웃으며 '너는 정말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 또 만약에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너의 신앙심이 흔들리느냐?' 라고 묻더랍니다.  저도 뭐라고 말로 설명은 잘 못하겠는데, 그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꼭 이렇게 해야만 신앙심이 생깁니까 ?)



하지만 아직도 깊게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이 있습니다.  짧고 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왜 예수님은 좌파인데, 목사님들은 우파인가 ?"


너무 짧게 써서 질문 자체가 무척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가령 좌파와 우파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모든 목사님들이 우파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다 등등 문제가 많은 질문이지요.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질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말씀인지 마르크스의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각자의 능력에 따라 걷어" 사도행전 11장 29절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사도행전 4장 35절)



예수님은 부자나 재물을 적대시하지는 않으셨지만, 분명히 부자와 권력자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굳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라는 유명한 구절이 아니더라도, 공관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언행을 읽으신 분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자들과 창녀들, 그리고 현재로 따지면 일본군 헌병 보조에 해당하는 민족적 배신자인 세리들처럼 점잖은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미국 공화당과 정치적 제휴를 맺은 예수님...  미국에서도 대형 교회들은 주로 보수적인 공화당 편이지요.)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바에 따르면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간지가 벌써 만 16년입니다) 적어도 한국 개신교 목사님들은 상당수가 보수 우익이십니다.  제가 직접 보고 들은 몇가지 사례들을 나열하자면... 그건 교회 목사님들의 너무 안 좋은 면을 내비치는 것 같아 관두겠습니다.  아무튼 특히 선거철만 되면 특히 목사님들의 설교 내용이 선관위 처벌 대상이 될 노골적인 수준까지 올라간다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제가 다니던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의 경우 듣다 못한 어느 신도에게 실제로 그렇게 고발을 당하시고는 어떻게 신자가 목사를 고발하냐, 교회가 무너졌다고 통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목사님들의 설교 내용은 거의 언제나 보수파를 옹호하고 진보파를 공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무현 시절 때에는 노무현과 유시민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자주들 하셨고, MB와 박근혜 대통령 때에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선출한 대통령인데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태를 보고 슬퍼하는 것은 좋으나, 그로 인해 분노해서는 안된다.  참된 기독교인은 순종해야지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특히 방송에서 국민들을 선동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런 것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라는 말씀을 설교 중에 하시더군요.  저는 매우 황당했습니다.  애초에 개신교가 부패한 카톨릭에 분노해서 저항하느라 생겨난 종파이고, 영어 명칭도 protestant인데 분노하지도 저항하지도 말라니요 ?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God help me. Amen !)




저는 대형 교회 두 곳을 다녀 보았고, 지금은 작은 동네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만, 그런 경향은 대형이나 작은 교회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대형 교회에서는 좀더 재물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했습니다.  심지어 예배 시작할 때 장로님이 앞에 나와 기도를 올리시면서 "불신자들이 저희를 비웃지 않도록 저희에게 재물을 내려주소서" 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경우까지 보았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입니다.)  특히 십일조를 강조하셨는데, 정말 여러번 반복하신 설교 내용이 미국의 록펠러나 포드 같은 재벌들이 십일조를 꾸준히 낸 덕분에 그렇게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큰 부자가 나와서 우리 교회를 크게 흥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좋은 축복 내용입니다만, 저는 뭔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한국 전통의 구복 신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이 소싯적 가난할 때부터 십일조를 낸 덕분에 당시 뉴욕타임즈가 "the most cruel, impudent, pitiless, and grasping monopoly that ever fastened upon a country" 이라고 평가한 Standard Oil 사를 창립한 록펠러이십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만 이 분에 대해 듣는다면 세상에 이렇게 착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 행했던 그 모든 악... 에이 아닙니다.)



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었습니다만,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성경 구절은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저는 전에 어느 분의 장례 미사에 갔다가, 신부님이 읽어주시는 이 글귀를 듣고... 감동도 좀 먹었지만 사실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지옥에 갈 죄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지요.  세상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 가족의 행복과 안녕이 더 급하고 더 귀하기 때문에 기부도 많이 안 하는 편이거든요.  아마 그때부터였나... 저는 복지를 위한 중과세에 적극 찬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지를 구현하여 세상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되면, 저의 가련한 영혼의 죄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45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굶주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자 동네에 살아서 직접 마주칠 일이 없더라도,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매일 그런 사연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녔던 대형 교회에서는 그런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목사님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하시는 것을 정말 들은 적이 없어요.  그에 비해 록펠러 이야기는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심지어 '일반 신도 수백명보다, 그렇게 거액의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신도 한 명을 얻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라는 말씀을 하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거짓말 같은데, 정말입니다.)  정말 개신교는 자본주의에 맞게 진화한 것 같았습니다.  하긴, 신년맞이 예배에서 목사님이 엄숙하게 '올해의 목표, 1. 교육관 건립  2....' 하는 식으로 그 해의 목표를 정해주시는 교회였으니, 제가 '대체 여기가 교회냐 회사냐 ? 잘하면 올해의 목표 헌금액까지 정해져 나오겠네'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리도 아니었지요.  (참고로 그 교회는 결국 교회 본당만큼 커다란 교육관을 세웠습니다.  할렐루야 !)

저는 한국 교회의 이러한 변질이 꼭 한국 개신교에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불교계도 변질되고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고, 카톨릭도 내부에는 많은 갈등과 부조리가 있겠지요.  생각해보면 모든 종교는 시작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창시되었으나, 종교 권력으로 성장하면서 결국은 부와 권력 편에 서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직접 보고 느낀 한국 교회의 모습은 정말 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모든 것이 결국은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결국 무슨 일이든 벌이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에는 당연히 권력이 따라 붙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카톨릭이 그런 경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미 카톨릭은 전세계적으로 탄탄한 조직과 재원이 마련되어 있고 개인적인 가정이 없으므로, 그런 돈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에 읽은 레자 아슬란의 '젤롯'이라는 책 내용은 매우 방대합니다만, 그것을 감히 3줄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예수님은 당시 로마와 그에 협력하는 예루살렘 대제사장 계급의 통치에 의해 날로 어려워지던 유대 하층민에게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던 혁명가였다.
2.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그의 동생 야곱과 베드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결국 야곱이 살해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그 맥이 끊어졌다.    
3. 예루살렘의 파괴를 목격한 해외 거주 유대인들은 야곱과 갈등 관계에 있던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위 내용에 제가 다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확실히 아슬란은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성서를 해석한 부분도 꽤 있더라고요.  젤롯의 내용 중 제가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유대교의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권력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아무데서나 하나님께 제사를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루살렘 지성소 바로 밖에 있는 정해진 장소에서, 대제사장의 집전 하에서만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부분이었지요.  그렇게 바쳐지는 제물로 인한 경제적 이익, 특히 성전에 봉헌되기 위해서 반드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을 성전세 지불용 화폐인 셰켈로 환전해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전 이익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를 관장하는 대제사장이 독차지하는 독점 제도에 대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니, 다들 아실만 한 어느 유명 복음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집에서 읽은 문답이 기억났습니다.  





(이것이 성전세 납부용으로 사용된, 예루살렘에서 주조된 화폐 shekel 은화입니다.  이 은화는 반 (half) 셰켈짜리입니다.  당시 성전세는 당시 성인 남자 일인당 반 셰켈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좋든 싫든 일반적인 화폐 데나리온을 반드시 반 셰켈 또는 셰켈로 환전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차익이 대제사장의 손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문답에서, 어느 신자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은데,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대신 직접 그 사람들 또는 단체에 기부를 하면 안될까요 ?' 하고 물으니, 그 교회의 단호한 답변은 이랬습니다.  '안된다.  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돕겠다는 것은 개인의 오만이다.  반드시 교회에 바쳐라.'

성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지성소에 쳐진 장막이 찢어졌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소통해야 한다는 제약이 사라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빈민을 돕는 것이 '개인의 오만'이니 허락할 수 없다는 모습에서, 저는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비난하시던 유대교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혁명을 추구하셨지만, 성전에서 대제사장의 돈벌이판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시고는 희생 제물용으로 판매되던 가축들을 쫓아내고 환전상의 가판대를 힘으로 뒤엎으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예수님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신 것은 권력을 이용하여 성전에서 경제적 독점권을 취하던 이들을 내쫓을 때 뿐이었습니다.)


저는 성서를 글귀 한글자한글자에 교조주의적인 맹신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전에 다녔던 대형 교회에서는 어느 복음서의 시작 부분이 '너희가 강녕하기를 바라노라' 라는 당시의 평범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것을, '봐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돈 많이 벌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신다' 라며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해석하시더군요.  특히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를 꼭 바치라는 부분은 글귀 하나하나를 정말 너무나 애용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부분은 그렇게 글귀만 보고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선을 그으시지요.







그렇게 글귀 하나하나를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바로 현재의 이스라엘 유대인들입니다.  가령 출애굽기 23장 19절에 이런 부분이 나오지요.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




여기서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구절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은 절대 고기 요리에 유제품을 쓰지 않습니다.  식기도 유제품용과 육류용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심지어 고기를 먹은 뒤 소화가 다 될 때까지 일정 시간 동안은 치즈나 우유 등의 유제품을 먹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건 고기와 유제품을 섞어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짐승이나 가축에게라도 지나치게 잔인한 짓, 즉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가령 비슷한 구절로, 신명기 22장 6절만 봐도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그런데 정작 식기도 유제품용과 육류용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어린이와 여자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가자 지구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격을 가해대고 있지요.  저는 정말 하나님의 정의는 현세가 아니더라도, 내세에서라도 반드시 단죄를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현재의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면 사실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싶은 생각이 강합니다.  특히 현 교황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에서,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 교회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분이 나오실 수도 있고, 또 이미 나오셨는데 제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확실히, 성서 문제는 저 같은 일반인 따위가 옳다 그르다 논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습니다.


출처 : Nasica의 뜻은 ?
글쓴이 : nasic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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