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반도 최강의 야구단, YMCA야구단!
▲ 영화 < YMCA야구단 >을 유심히 본 독자라면 배우 송강호가 월담해 들어간 집의 이름이 태화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그 건물의 모태. | |
ⓒ2002 명필름 |
특히 문화유산답사에 흥미를 갖고 있던 터에, 극중에서 배우 송강호가 짐짓 뭉근한 태도로 한번이라도 더 '뻬쓰볼'을 구경하러 월담을 해 들어간 집이 눈에 띄었다.
영화를 꼼꼼히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그 집의 중심 건물쯤 되는 집에 걸려 있는 편액은 다름 아닌 '태화관(泰和館)'. 물론 한자로 쓰여 있어 한자 세대가 아닌 젊은이들은 그냥 지나친 이들이 대다수였겠지만, 태화관은 그저 '영화의 한 배경으로서의' 태화관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를 제작한 '명필름'에 따르면 그 건물 자체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전주 향교'로, 원래의 태화관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당시 YMCA 선교사들이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으며 사용하기 시작한 건물이 바로 태화관이었고,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의 큰 맥을 잇는 3·1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건물이 바로 태화관이다.
"오늘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매우 영광스러운 날"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다. 당시 안순환이 만든 궁중요리 전문점 명월관의 지점이었다. | |
ⓒ2002 권기봉 |
3·1운동은 이름 그대로 3월 1일에 시작되었으나 기실 알고 보면 당초 거사일은 같은 해 1월 22일 승하한 고종의 인산일(국장; 國葬)인 3월 3일이었다. 그러나 3일에는 고종의 국장이 있기에 당시 사회 분위기 상 불경스러울 수도 있으므로 2일로 하루 당기려 했으나 이 날은 또 크리스트교인들이 중요시하는 주일, 즉 일요일이었기에 부득불 3월 1일이 거사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아직 추위가 싹 가시지 않은 1919년 3월 1일 새벽. 탑골공원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이미 2월 27일 밤 보성전문학교장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해 제1호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과 함께 배포된 약 2만1천 장의 독립선언문을 보고 또 듣고 해서 탑골공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바로 이 5천여 명의 사람들이었고, 거의 같은 시각 탑골공원 서쪽에 자리한 태화관에도 정오부터 민족대표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거사 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옴에 따라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당시 태화관 주인이었던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축배를 들고 있노라고 알리게 했다.
▲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 대표 29명은 오후 2시가 막 넘어서면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 |
ⓒ2002 권기봉 |
한편, 2시 30분 경 탑골공원에서는 이미 2시에 와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어야 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경신학교 졸업생이었던 정재용(鄭在鎔)이 탑골공원 중앙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직접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군중들의 만세 소리와 태극기의 물결이 서울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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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이라 할 민족대표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간 후 당시 유일하게 조직력을 갖춘 세력이었으며, 이후 약 한 달 간 실천력 있는 행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연이어 집회가 계속되는 가운데 3월 5일에는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중간 지점에 있었던) 남대문역과 남대문 사이에서 독립연설회(獨立演說會)가 개최되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학생들이 가세하는 등 그 세력을 날로 커져만 갔다. 특히 이날부터의 시위에는 종래 학생 참가자들의 대다수를 이루던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는 점차 격렬해져 갔다.
이후 다소 잠잠해지는가 싶더니만 3월 22일 오전 9시에 서울 봉래동 지역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시작으로 다시금 독립만세운동이 점화되었고, 이날 밤 11시쯤에는 (현재도 극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종로 단성사(團成社)에서 활동사진을 보고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다음날인 23일에도 이런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서울 정동 등지의 보통학교에서 진행 중이던 졸업식 도중 전학생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런 열기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운동이 사그라지는 4월초까지 근 한달 동안 조선 반도를 달구어 갔다.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서 독립선언을 하다?
▲ 2·8독립선언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 유학생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식민 모국이던 일본에서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했다. | |
ⓒ2002 권기봉 |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태화관이 있던 터는 일제시대 이전에도 정치사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즉 태화관이 있던 터에는 조선시대 중종 반정의 공신이자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웅대군 염의 사위인 정국공신 구수영이 살기도 했고, 안동 김씨 집안이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을 때도 있었고, 한때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으로 쓰이는 등 많은 세도가들이 이 집을 드나든 역사가 있었다.
터의 운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것인지 1908년 순화궁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가면서 빈집으로 남게 된 것을 바로 매국노 이완용이 사들여 별장을 조성하기에 이르렀고, 을사·경술 두 조약 때 친일파들이 모여 정국을 논하기도 하는 등 그들의 교우처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일합방이 있은 후 어느 날, 이 별장 마당에 있던 커다란 고목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이완용 별장에서 일어난 이 희한한 일을 두고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천벌'이라며 수군거렸다. 기분이 찜찜해서였는지 그 이유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이완용 역시 이 낙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을 팔려고 내놓았다.
▲ 한때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고,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기도 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에 들어선 태화 빌딩. 2002년 10월 서울 하늘 아래 지나간 역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 |
ⓒ2002 권기봉 |
당시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궁중기생들이 그를 따라 명월관으로 모이게 되어 '지체 높으신' 의친왕 이강(李堈)공이나 박영효 등이 출입했고 이완용이나 송병준 등 친일파들도 단골로 불릴 정도로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완용의 별장에 벼락이 떨어져 그가 그 집을 내놓게 되었을 때 때마침 명월관에도 화재가 나자, 안순환은 이완용의 별장을 사서 1918년 명월관 분점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름을 태화관(太華館; 이후 소리가 같은 泰和館으로 이름이 바뀜)이라고 했다.
'희망찬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슬픈 역사'는 그리 중요치 않은 것일까
▲ 3·1운동의 열기는 근 한 달 간 계속되었는데, 당시 고종이 승하하기 전 머물던 경운궁에서는 대규모 집회가 자주 열렸다. | |
ⓒ2002 권기봉 |
이후 일제 말기에 이르러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기도 하는 등 풍파를 겪다가 도시 재개발계획에 따라 이전 건물을 헐고 지금의 태화 빌딩이 들어서게 되었다.
한때는 세도가들이 드나들던 집이었지만 시대를 거치며 매국노 이완용이 을사조약 등을 모의하기도 했던 곳, 또 그와 같은 민족적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어보기 위함인지 매국노들이 '매국'을 획책하던 그곳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 그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고자 서울 시내 대부분의 상가들도 공동 철시를 결의했다. 일제 군경(軍警)이 아무리 협박을 해도 상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독립만세운동의 열기에 빠져들었다. | |
ⓒ2002 권기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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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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