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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 김동완 목사님 영결식을 마치고

DoDuck 2007. 9. 17. 16:15

  김동완 목사님 영결식이 2007년 9월 15일(토) 오전 8시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 대예배실에서 열렸다. 오늘 영결식에는 김동완 목사와는 동지적 관계인 대선후보로 나선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정대철, 이재정 통일부 장관, 박형규 목사, 인면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신철영 고충처리위 사무처장, 숙부이신 권호경 목사 등 목모사와 그동안 인권.빈민운동을 해왔던 성직자와 평신도 등이 모였다.

  휴일 아침 일찍인데도 내가 도착한 8시경에 이미 대강당에 사람이 꽉 찾고 밖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예배 진행상황을 지켜봤다.

  김동완 목사님 영결예배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부회장인 김기택 감독이 집례했고, 기도는 내가 속한 기독교장로회 서울북노회 장로회 소속인 서미숙 장로가 드렸으며, 신망애복지관 대표로 있는 김양원 목사의 성경(고린도전서 15장 55절~58절)봉독, 말씀은 kncc회장으로 있는 구세군 전광표 사령관이 선포했다.

조가는 김동완 목사님의 소속 교단인 감리교 목사합창단(중창단) 이 "순례자의 노래"로 찬양했고, 조사는 김근태 국회의원, 한국교회 인권센터 이사장인 이명남 목사가 조사를 드렸다. 조시는 평시 친분이 깊었던 양성우 시인이 "그대 불�으로 살다 가는 사람"을 힘차게 낭송했다. 축도는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이며 7~80년대 인권 빈민운동의 태두라 할 수 잇는 박형규 목사가 했다. 마지막으로 김동완 목사와 빈민, 인권운동을 함께했던 숙부인 권호경 목사가 울먹이며 호상으로서 영결예배에 참석한 내빈에 가족들을 소개했고, 참석해 준 내빈에 감사함을 전했다.

  나와 김동완 목사는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73년 남산부활절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목사 등이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되고 손학규 지사 등이 수배 됐을때 나는 김동완 목사님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를 마치고 종로 5가까지 걸어 오면서 그때 막 출시됐던 "퍼모스트 아이스 크림"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김 목사님은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지켜보는 것도 좋지만 직접 그 속에 들어가 어울려 부둥켜 그들과 얼굴을 부비며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하셨다" 그래선지 김목사님은 평생을 빈민,노동, 인권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은 70년대 초반 내가 고등학교 시절 숙부가 형무소에 들어가시면 나를 불러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용기잃지 말고  학업에 열중할 것도 당부하셨다.

  김 목사님은 목사이시면서도 목수이기를 원하셨다. 전태일과 함께 천막교회를 지었던 목사님, 노동의 현장에서 하루도 눈을 팔지않고 사셨던 그분이 오늘 허망하게 가셨다.

  내가 사회부장 시절 서강대에 다녔던 딸(계리, 예리 ??)이 한총련 간부로 시위를 하다 서울 남부지청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는데 나올 수 있도록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학생운동에 심취해 있던 딸을 학생운동으로 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갖은 고민을 하셨던것 같다. 목사님은 나오면 외국으로 유학보낼테니 수단을 다해서 나오게만 해 달라고 하셔서 당시 남부지청장이었던 이훈규 지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보증을 설테니 석방시켜 달라고 설득해 하룻만에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 뒤 딸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1년동안 다녀왔다. 그리고 학생운동도 소원해 진 것으로 안다. 그러나 당신이 7~80년대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을 주도하면서 인권운동의 대부로 역할하던 목사님도 자식에게서만은 마음이 약했던 것 같다. 그런면에서 김 목사님의 딸과 우리 사촌(선인)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선인이는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총학생회가 중간고사를 전면적으로 거부했는데도 학생이 하나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시험을 치뤘다. 여기에 대해서 본인의 설명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 김목사님의 딸과 권목사의 딸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년전인가 지하철 종각역에서 기차를 타려는데 누군가 "주만아"해서 되돌아보니 김동완 목사님이었다. 목사님은 해맑게 웃으시면서 " 나 형제교회 복귀했다" 하셨다. 나는 "축하합니다" 했더니 함께한 사모님과 딸들과 총총 사라졌던 기억이 있다. 얼굴에 한점 때가없이 시골 아저씨같은 모습의 목사님은 가끔 뵈면 당뇨로 피골이 상접해 계신 모습을 보곤했다. 아마도 빨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도 그 당뇨가 원인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목사님은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70년대 인권운동의 4두 마차라는 박형규, 권호경, 김동완, 이규상 이렇게 4사람 중 가장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이규상 목사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괴로움이 크다.

  인간의 생사는 만물의 생명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이겠지만 그리고 하늘나라에 인재가 없어 불러 가셨겠지만 너무 이르게 가신것 아닌가? 이제 65살이면 한참 아니던가? 안타까운만 가득하다. 목사이기 이전에 목수이길 원하셨던 목사님이 하늘나라에서 목수로 이땅에 오셨던 하나님을 어떻게 뵐까? 아마도 겨면쩍게 웃으면서 마주하지 않겠는가.

 

""김동완 목사, 그렇게 목수가 되고 싶었는가??"

""이제 이자리서 나대신 목수로 함께 일하시게나"" 

이렇게 할까. 내내 궁금하다

출처 : 충남 부여 - 비홍 사랑
글쓴이 : kwon joom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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